〈 237화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에일린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복잡한 감정에 살포시 눈을 감았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박찬영과 에트나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눈을 감은 것이다.
에트나가 의외로 인기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깔끔한 외모.
꾸준한 운동으로 인해 군살 없는 몸까지.
에트나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남몰래 그녀를 마음에 둔 남학생이 한둘이 아님을 에일린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성이 활동적이고 운동을 잘하는 여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은…
아마 박찬영에게도 적용되는 듯싶었다.
‘…왜 다들 마법사에게 운동 신경을 기대하는 거야…’
마악관 안에서의 에일린은 만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단점이 없다 평가받고 있다.
그런 에일린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유일한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체력이었다.
고등학교 때와 달리 마악관에선 운동 관련 과목이 없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실 그녀는 운동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에일린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의향 자체가 없었다.
왜냐고?
에일린의 체력은 극단적으로 낮은 수준이냐 묻는다면, 그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최대한 절하하더라도 평균보다 조금 뒤처지는 수준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에일린의 체력을 형편없다 지적한다면,
무엇에 손을 대든 곧 잘 해내는 에일린이었기에 사소한 단점이 두드러져 보인 것이리라.
과거 에일린은 운동에 시간을 쏟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운동에 흥미도 재능도 없는 몸.
별 심각하지도 않은 단점을 없애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구는 것 보다, 자신의 다른 장점을 갈고 닦는 것이 유리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자에 반쯤 미쳐있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으나,
평소 연애란 관심 대상의 밖에 존재했던 것도 한몫했다.
‘으으… 후배는 운동을 잘하는 여자가 좋나? 옛날에 권유받았을 때, 걔들 따라서 운동 다닐 걸…’
그런 에일린에게 박찬영이란 후배는, 처음으로 이성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생기게 한 사람이었다.
이 관심이 단순한 호기심이냐, 아니면 연애적인 쪽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끝에 잘 모르겠다 대답하겠지만.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지금보다 더 친해지고 싶은 남자란 것이다.
“오. 2학년 선배들은 그런 것도 배우나요? 재밌겠네요. 게다가 과 5등 안에 들면 연습 재료비 전액 지원이라니… 욕심나네요.”
“뭐, 연금학과에 들어와야 받는 수업들이지만. 그보다 신기하네? 연금술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 듣는 남자는 처음이야!”
“다른 남자들은 연금술에 관심이 없나 봐요? 전 동성 친구가 없다 보니 잘 몰라서.”
“그,그러니? 큼. 아무튼 나는 연금술사가 천직인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데, 막상 남자애들에게 전공 이야기를 시작하면 알기 쉬울 정도로 지루해하더라고.”
“저는 평범과 좀 다른 것 같네요. 오히려 더 듣고 싶은걸요? 예를 들어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연금 재료나, 가장 기초가 되는 공식이라든지…”
“정말? 나,나야 좋은데… 사실 흥미 없으면서 억지로 듣는 거 아니지?”
“풋. 그리 걱정 말고 편하게 이야기해요. 제가 이런 거로 거짓말할 이유가 뭐 있나요?”
가만 대화를 들어보면 친구끼리 하는 일상적인 대화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오히려 후배 쪽에서 전공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듯한 문답.
허나 상황을 그리 일차원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어쩌면…
에트나가 연금술에 관해 이야기 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 오타쿠라는 걸 눈치챈 박찬영이,
의도적으로 그 주제에 대해 흥미 있는 척 화제를 유도하며 그녀의 호감을 쌓고 있는 중일 수도 있었다.
보통 반한 대상을 꼬시려면 사소한 호감 단계부터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아니… 후배님이 연애에 그토록 능숙할 것 같진 않으니 이건 아니려나?’
하지만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한들, 에트나의 호감도는 실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이 상황 자체가 에일린에겐 불만스럽다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 너무 무력하네.’
에일린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러한 감정이 드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질투.
허나 자격 없는 질투다.
에일린은 박찬영의 가족도, 연인도 아닌 친구일 뿐이니까.
그렇기에 두 명이 친해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에일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누군가의 잡담 사이에 끼어드는 건 손쉬운 일이었을 텐데.
이번만큼은 그리할 수 없었다.
- 끼익. 쿵.
다행히 둘의 잡담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5분이 지나 교수가 들어오며 잠깐 멈추었던 토론회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에일린은 그 사실에 작게 안도했다.
*
12시 30분.
강의실에 모였던 50여 명의 인원은 식사를 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가 끝나도 이들이 다시 이 강당으로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오후가 시작된 지 30분이 지났지만, 원래 계획대로라면 세미나는 오전까지만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세미나는 끝났다.
세미나를 견학한다는 후배의 목적 역시 끝났다.
그는 식사도 동아리실에서 했기 때문에, 에일린과 에트나에게 인사를 마치곤 사라졌다.
‘…후배님은 하루에 두 번 찾아가면 별로 안 좋아했지? 오늘 말고 내일 가야겠네.’
사실은 부족했다.
오늘 얼굴을 보긴 했지만, 평소와 같은 느긋한 잡담은 없었기에.
마음 같아서는 찾아가서 잠깐이라도 잡담을 나누며 안정을 찾고 싶었다.
게다가 에트나와의 일을 봤기 때문인지 더욱 조급해졌지만,
이런 때인 만큼 에일린은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혹여 찾아갔다가 미움을 사버리면 본말전도다.
어째서 그리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후배가 에트나에겐 너그러워졌을까?
이미 자신이 한번 마음의 문을 열며 기본적인 장벽이 낮춰져서?
정말로 연금술 자체에 흥미를 느껴서?
그도 아니면…
후배가 에트나에게 한눈에 반해서?
궁금했다.
너무나.
허나 에일린은 여러 가능성 중 무엇 하나 확신하지 못했다.
‘…상담이나 한번 받아볼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길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고 한다.
체스 같은 보드게임에서 훈수를 둘 때는 본래의 실력보다 두세 단계 상승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에일린은 조언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성과의 관계 부분에서의 그녀는 초짜 중 초짜에 불과했으니까.
남자를 많이 만나보며 경험이 많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후배의 의도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금 더 알 수 있으리라.
적당히 식사를 마친 그녀는 친구를 찾았다.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연애 경험이 많으며, 입도 적당히 무거운.
다행히 위 조건에 적합한 세 명의 친구를 발견했다.
게다가 기꺼이 상담에 응해 주기까지 했다.
“네가 우리한테 상담? 특이하네.”
“나도 들은 이야기긴 한데… 이런 거에 대해선 나보다 너희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이건 내 친구의 이야기인데…’라는 서두로 시작된 에일린과 박찬영, 에트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당연히 가명을 사용했기에 그녀의 친구들은 누가 누군지 유추할 수 없으리라.
깊은 사정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있었던 일만 살짝 각색하여 들려주었다.
그렇게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은, 이내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장.”
“어장질이네.”
“빼박이다 빼박.”
어장질?
에일린은 마음이 살짝 불편해졌다.
조언을 구하러 온 주제에 만장일치로 모아진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건 속 좁은 짓이란 걸 확실히 알곤 있으나…
그들이 후배를 나쁘게 말한 것에 대해 알게 모르게 울컥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장질이라니, 억측 아니냐? 너희들이 오해한 것이겠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내 설명으로만 들은…”
“아. 골치 아프네. 이 새끼 벌써 단단히 그물에 걸렸어.”
“근데 얘 같은 황금 물고기를 어장 안에만 두는 남자가 있어? 보통이라면 빠져나갈세라 화들짝 낚아 올릴 텐데.”
“그러고 보면? 얘가 가끔은 얼빵해서 그렇지,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으니까.”
“그… 방금 이야기, 내 이야기 아닌데?”
“응. 네 이야기 맞아.”
“얘 거짓말을 이렇게 못했냐?”
“…지,진짜인데? 정말 지인의 이야기라니까?”
“아! 하나 더. 보통 어장질 잘하는 놈들은 잡은 물고기 앞에서 대놓고 다른 물고기한테 먹이 안주잖아.”
“맞네. 얘 몰래 그 NTR녀한테 연락하는 게 여러모로 물고기 관리하기 편하니.”
“어장질 치곤 좀 많이 어설픈데?”
에일린의 변명은 무시당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이미 이야기의 주인공을 완벽히 특정해낸 듯했다.
진한 농도의 수치를 느낀 에일린은 최선을 다해 부정하려 했지만, 흑역사만 더 만들어내는 꼴이란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적어도 다른 등장인물의 정체는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까?
“아… 오늘 날이 아닌가 봐. 진짜 되는 게 없네…”
“야. 혹시 그 남자애, 알고 지내는 여자 많아? 딱히 애인이 아니더라도.”
“…아니. 전혀.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어. 친하게 지내는 여자도 나 말곤 없고.”
“역시… 이러면 답 나왔는데?”
답이 나왔다?
그 말에 에일린은 고개를 들어 친구를 바라보았다.
비록 그녀의 속마음이 친구에게 전부 공개되는 쪽팔리는 경험을 했지만,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뭔데?”
“뭐긴 뭐야. 여자에 익숙지도 않은 남자가 어떻게 어장질을 해볼 생각을 해? 그냥 어장질이 아니었던 거지.”
“딱 보이는 그대로… 넌 친구로만 생각했던 거고, NTR녀한테 반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 사실 숨겨진 이야기 따위는 없었던 거야.”
“와… 나 상상만 했는데 내상 입었어… 얘 지금 ‘내가 먼저 좋아했었는데’ 당한 거냐?”
“그…! ……아니. 아니다.”
‘그 여자의 전공에 큰 흥미가 있어서 말을 걸었다는 가능성이 있다.’라는 말이 턱까지 새어 나왔지만,
에일린은 차마 말을 뱉어내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보까지 친구들이 알게 된다면 다른 등장인물의 정체까지 특정될 수 있다.
“근데, 나 그 남자애 이성적으로 좋아하지는 않거든? 그냥… 아직은 친구고, 살짝 관심만 있는 수준이야.”
“그래? 그렇구나.”
“응. 정말 믿음이 가.”
“사실 내 꿈은 우주비행사야. 그리고 최면 어플 오너도 되고 싶어.”
“……”
개소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제 와서 연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헛소리 같았기에, 이번에야말로 변명하지 못했다.
‘…그래도 도움이 안 된 건 아닌가? 정확한 결정은 내일 직접 대화하고 내리자.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