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에일린…?”
“어허. 까마득한 선배님 이름을 그리 함부로 불러?”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당황해서요.”
“응? 왜? 혹시 내 이름 들은 적 있어? 으음… 그,그래도 나쁜 소문은 없을 텐데?”
“아뇨. 그냥 이름이 이뻐서?”
“그럼 다행이고. 근데 이름이 멋지다면 몰라도, 이름이 이쁘다니? 킥킥. 재밌네. 그런 표현은 너밖에 안 쓸 걸?”
이 세계에서는 이름이 아름답다는 말은 흔하지 않나 보다.
남녀 역전 세계란 의외로 복잡하구나.
아니, 그런 것보다 에일린이라니?
그녀는 스스로를 학생회에 들어가 있다 소개했다.
전에는 흘려들었던 정보지만, 이제는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학생회라는 작은 모임에 동명이인이 있을 확률은 너무나 낮으니까.
눈앞의 이 선배는, 원작 속 그 에일린이 맞는 것 같다.
‘아… 왜 메인 히로인이 이곳에…’
추악하게 생겼으며 성격까지 나쁜 내 몸주인 가르시아.
가르시아는 같은 신입생이면서 자신과 다르게 모든 주목을 끌어모으는 주인공 데이안을 질투했다.
하물며 데이안은 좋게 포장해 내향적인 성격, 원작 독자의 평을 빌리자면 찐따 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런 데이안으로썬 일방적인 악의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른 채 당황할 수밖에.
그때 데이안을 백마 탄 공주처럼 구해주는 것이 바로 메인 히로인인 에일린이다.
내가 가르시아의 역할을 대체하며 1,2,3화의 에피소드가 소멸하리란 건 어렵지 않게 예상했지만…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원작이 핵심 스토리가 거의 없는 소설인 만큼, 이후의 에피소드 중 에일린이 열쇠 역할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데이안의 곁에 에일린이 사라진다고 한들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갈등의 원인인 가르시아가 사라졌는데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걸리는 건 왜 하필 나랑 엮였냐는 말이지.’
아무래도 원작에 비중이 있었던 캐릭터인 만큼 살짝 당황스러웠다.
설마 오늘의 변수를 원인으로 원작 사건에 얽히고 마는 건 아니겠지?…
물론 억측에 가까운 가능성이긴 하다.
내가 상황이 그리 흘러가도록 손 놓고 볼 리가 없을 테니까.
“후후. 애들한테 너랑 친구 됐다고 자랑해도 돼?”
“그건 마음대로 하셔도 되는데, 부디 친구분들을 끌고 이곳을 찾지는 말아주세요. 말 상대는 한 명으로 족해서.”
“당연하지! 네가 데려와 달라고 해도 안 그럴 거야.”
“제가 요구한다니, 어지간해서는 그럴 일 없을걸요?”
“그럼 다행이고. 음… 나를 중개인으로 너랑 손쉽게 친해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배 아프잖아? 내가 어떤 노력을 해가며 네 마음을 열었는데!”
“마음을 열었다? 제가? 선배한테?”
“야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좀 생긴 이성 후배랑 친해진 일이 친구에게까지 자랑할만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랑하려면 자랑하라지.
어차피 이 동아리실 밖으로 나다닐 생각은 없으니, 내게 피해만 없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딱 하나 걱정이 된다면…
“앗! 걔들이 나 몰래 널 찾아오리란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런가요? 선배 주위에 행동이 가벼운 사람은 없나 보네요.”
“응. 그것도 그렇지만… 큼! 스스로 이런 말 하긴 뭐한데, 내 발언권이 좀 세서.”
덕분에 한창 걱정하던 미래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란 건 알았다.
그런데,
지금 설마 은근슬쩍 권력을 과시한 건가?
“…풋.”
귀여운 발상이네.
하긴, 이들은 전부 사회로 진출하지 않은 학생들이다.
이성에게 과시할만한 자신의 능력이란 이런 종류밖에 없겠지.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더럽고 추잡한 일을 많이 겪고 온 탓일까?
내 눈에는 에일린이 꽤 순수한 사람으로 보였다.
받아쓰기 시험에 100점을 맞았다 자랑하는 어린애처럼 귀여웠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뭐,뭐야. 왜 웃어?”
“아뇨. 든든하고 안심이 돼서요.”
“…아무리 봐도 그런 얼굴이 아닌데…”
이 세계에서의 나는 에일린의 연하지만,
실제의 나는 그녀보다 약간 연상이다.
지구에서 먹은 나이에 소설 속 세상에서 보낸 시간을 더한다면, 아슬아슬하게.
“크흠. 별걱정 마. 후배님도 말 상대는 한 명이면 딱 좋다 했고, 나도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하는 게 좋단 말이지?”
“20%. 없애기로 했지 않았나?”
“에이. 그거 빼더라도. 후배님은 방문자가 둘 이상이 되면 분명 말과 행동에 짜증이 가득 섞일 것 같단 말이야? 방금 그 말은 그런 상황이 싫다는 뜻이었지.”
에일린은 능청스럽게 내 공격을 흘렸다.
방심할 수가 없네.
저 핑계가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에일린은 나와 둘이 있는 시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듯했다.
이건 어느 정도 집착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드디어 요 일주일간 나를 궁금케 했던 질문을 물을 기회가 왔다.
먼 훗날 내가 침대에서 칼에 맞지 않기 위해선 꼭 해야 하는 질문이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나 집착… 그러니까 소유욕이 선배만큼 강하나요?”
“응? 나? 소유욕이라… 그야 남자에 비해 조금 강하긴 하지만,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드네.”
“당연히 모든 여자가 그렇지 않다는 건 알아요. 그냥 보편적인 성향을 물은 겁니다. 선배도 그렇지만, 제가 여자 자체를 잘 몰라서.”
“엇? 어? 어… 그게…”
내 말에 에일린이 눈에 띌 정도로 당황했다.
심지어는 얼굴을 살짝 붉히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아. 설마?’
방금 나의 말을 좀 꼬아서 해석하면…
내가 여자와 사귀긴커녕 친해진 적도 없던 순수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으려나?
지구에서 보통의 남성들은 자신이 연인의 첫 남자가 되길 희망하곤 하니,
이 세계에선 그 개념이 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
이걸 말실수라고 분류해야 할까.
내가 이런 식으로 보일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에 계속 오해의 여지를 준다.
그렇다고 ‘사실 저 연인도 여럿이고, 날마다 존나 떡 치고 다녀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정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몸도 마음도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가르시아’가 과거 연인이 있었을 확률은 너무 낮고…
어쩌면 지금 에일린이 한 오해는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큼! 보통 여자들은 나랑 비슷한 정도의 소유욕이 있기는 하지. 적어도 내가 볼 때의 나는 여성 평균에 근접하는 것 같아.”
“대답 감사합니다. 그런데… 뭘 그리 뚫어지게 봐요?”
“아니. 그냥. ……그, 이건 그냥 빈말인데… 방금 그 질문. 다른 여자들한테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단다.
나는 얌전히 에일린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
“이건?”
질문과 함께 작은 손이 내게로 내밀어진다.
그 손에는 식물 한줄기가 들려 있었다.
비슷한 생김새를 굳이 찾아보자면 목화일까?
하지만 이 식물은 목화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같은 회색빛을 띄긴 하나…
내가 아는 목화란, 건조한 젤리 대신 실뭉치 같은 놈이 달렸기 때문이다.
“으음… 안개망울 같네. 효능이 갈리는 재료를 섞어야 할 때 중화제로 곧 잘 쓰이는.”
하지만 난 이 식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 젤리 같은 부분을 모아 간단한 연금 작업을 해주면, 내가 앞서 말한 중화제가 탄생한다.
실물로는 처음 보네.
“그럼 이거는?”
“으음… 겉보기엔 버섯… 인데, 이런 게 있었나? 너무 평범해 보여서 좀 헷갈리네.”
“……잘 봐봐.”
- 스윽.
내가 쭈글쭈글하게 말라비틀어진 버섯을 보고 감을 못 잡고 있자,
문제를 낸 그녀가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버섯에게 향하는 빛을 차단시켰다.
그러자 버섯이 미세하게 생기를 되찾는 것이 아닌가?
그 힌트 덕에 버섯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 설마 그게 밤버섯이야? 엄청 구하기 힘들다던데… 이거 정말 해가 지면 크기가 두 배는 커져?”
“…펙스웰의 위상 유도 법칙.”
“유사한 효능을 가진 재료를 동일 조건으로 섞었을 때, 이후 넣은 반응 촉진제의 약효가 강한 재료 쪽으로 강하게 몰리는 현상… 맞지?”
“나,나블라의 분리 역산.”
“필요 없는 효과를 없애는 것이 아닌, 따로 추출해야 할 때 사용하는 연금식. 한 솥에서 동시에 여러 물약을 제조할 때 쓴다던데?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기가 터무니 없을 정도로 까다로워서, 나 같은 생초보는 절대 시도하지 말라 했지만.”
“마,말도 안 돼…!”
데이지가 멍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
책 속의 그림만 봐야 했기에 헤맬 수밖에 없었던 재료 구분이라면 몰라도,
이론 부분은 완벽하게 외웠다고.
“슬슬 믿겠어?”
“…아니, 하지만…”
“그럼 확신이 들 때까지 문제 내던가. 난 자신 있어.”
“……후우. 아니야. 이제 시험은 됐어.”
데이지는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이제야 좀 믿는 모양이다.
내가 정말로 스무 권에 달하는 이 책들의 내용을 전부 외웠다는 것을.
“혹시 몰라 물어보는데, 부정행위를 한 건 아니지?”
“네가 눈앞에서 봐 놓고?”
“너 정도 능력이면 나를 속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아서. 여러 비밀스런 능력도 많은 것 같고.”
데이지의 감은 정확했다.
나는 하고자 하면 언제든 답지를 볼 수 있었으니까.
허나 양심껏 말하건대, 지구에 컨닝하러 다녀오지 않았다.
저 책들의 내용은 언젠가 외워야 할 내용인데 미룰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고작 이런 거로 널 속이겠어? 어젠 날 믿는 티를 팍팍 내놓고는 이제 와서 의심하긴.”
“…다,닥쳐 제발.”
“풋. 학자면 두 눈으로 본 걸 의심하지 말라고.”
“큼큼… 아무튼! 보고도 잘 안 믿기네. 시험에 부정이 없었다는 건, 이 스무 권의 책을 단 하루 만에 다 외웠다는 거니까.”
“내가 놀라지 말라고 했지?”
“글쎄. 내가 널 보고 놀라지 않게 되는 건 상상하기가 힘든데…”
데이지는 즐겁다는 듯 그리 말하고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이건? 설마 또 외워야 하는 게 있는 건 아니지?”
“단 하루 만에 외웠으면서 엄살은. 그래도 이 책은 외울 게 아니야. 이건… 네가 앞으로 쓸 교과서.”
“교과서?”
- 챠락.
이 책을 한동안 끼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책의 첫 장을 펼치며 내용을 살폈다.
그림이라곤 한 장 없는 글씨의 향연.
곳곳에는 연금 공식에 사용되는 생략 기호가 존재했다.
일주일 전의 나였다면 한 줄조차 읽지 못했겠지만…
지금, 20권에 달하는 용어 사전을 외운 나는 막힘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으음. 연금술 입문서 비슷한 거야?”
“조금 달라. 우리는 정석 루트를 밟지 않기로 정했잖아? 거기 담긴 것들은 당장 네게 필요한 내용뿐이야.”
“오. 필요한 책이 딱 있었어? 기묘한 우연이네. 아, 네게 준 수백 권의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책 중 입문자가 쓸만한 책이 있었으려나?”
“…응. 비슷해.”
가볍게 책의 흐름만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속독을 시작했다.
대단원을 알아 놓으면 이후 공부 스케줄 잡기가 편해지니까.
“앗! 잠깐! 뒤,뒷면은 지금 보지 마.”
“응? 왜?”
“야!! 내가 아직 보지 말라고 했…!”
지금 보게 되면 좌절할 정도로 어려운 챕터가 기다리고 있나?
하긴, 이 책은 무려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책이다.
쉽더라도 앞부분만 쉽겠지.
하지만 아무리 내용이 어렵다 한들 내가 좌절하지는 않으리라.
오히려 의욕을 내면 몰라도.
어지간해서는 데이지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내 손은 데이지가 말리기 전에 책의 뒷부분을 펼쳤다.
- 챠락.
“…어?”
“씨… 내가 이래서… 으으…”
데이지가 나를 말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책의 뒷부분은 아직 공백이었다.
게다가 끊긴 부분을 살펴보니, 어색할 정도로 뜬금없는 곳에서 문장이 끊겨 있었다.
저자가 책을 쓰던 도중 잠이라도 든 것처럼.
“시,시간이 부족했다고… 원래는 3일에 걸쳐서 만들 생각이었는데… 네가 하루 만에 다 외워버리는 바람에…”
“……”
그제서야 이 책의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다시 보니 종이의 잉크도 방금 막 마른듯한 모양새네.
난 이걸 왜 눈치 못 챘지?
‘그러고 보면 얘의 필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책을 읽는 것만 봤지, 쓰는 건 못 봤으니…’
기묘하게 간질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차분한 마음으로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의외로 꽤 정갈한 글씨체다.
“풋. 네 성격치곤 너무 얌전한 글씨체 아니야?”
“…꼬우면 이리 내.”
“그럴 리가. 안 봐도 밤새워서 만든 거지?”
“…아,아닌데? 내가 왜?”
“응. 고마워.”
내게 잠자코 책을 외우도록 명령해 놓은 데이지.
그녀에게 놀 생각이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내가 쓸 교과서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녀도 진심을 담아 나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 중이란 뜻이다.
‘몇 년을 제대로 쉬어 본 적도 없는 애가… 좀 쉬지.’
최근 들어서야 여러 가지 것들을 포기하게 된 그녀다.
지금의 그녀에겐 휴식을 방해하는 더러운 손길도,
필사적으로 연금술을 공부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십여 년 만에 얻은 자유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밤까지 새워가며 내가 편히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인 이상 며칠쯤은 마음 편히 쉬고 싶을 텐데.
어쩐지 속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목덜미를 긁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