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똑똑똑.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슬슬 일주일이 다 되어 가나?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기척을 없애기 위해 고요한 발자국을 활성화하기까지 했다.
“으음… 대답이 없네. 지금 없나?”
슬슬 귀에 익어가는 목소리가 문밖에서부터 들려왔다.
들려오는 말은 내게 작은 희망을 주었지만…
고작 이 정도 대응으로 포기할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포기했겠지.
- 끼익.
“에이. 모르겠다. 들어갈게?”
역시.
방문 희망자는 굴하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창 공부하던 책을 덮어야 했다.
내가 가진 연금술 관련 책들은 전부 그리다니아 언어로 되어 있기에.
“어? 뭐야! 있었는데 왜 대답을 안 해?”
“공부에 집중하고 있어서 못 들었습니다.”
“아! 맞아! 나도 그럴 때가 종종 있더라. 공부하다 정신 차려보면 시간이 훅 사라진 느낌?”
핑계는 대충 데이지가 자주 하던 말을 빌렸다.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는데,
개의치도 않고 공감을 하네.
“그럼 후배님, 내가 공부 좀 알려줄까? 나 이래 봬도 학생회에 들어 올 정도로 공부에 자신 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막히는 곳이 생기면 물어볼게요. 제가 직접.”
“…응? 어어? 그,그래! 언제든지! 부담 가지지 말라고!”
필요할 땐 도움을 구하겠단 내 긍정적인 답변 때문일까?
그녀는 어쩐지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착각이다.
방금 발언을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내가 도움을 구하기 전까지 신경 쓰지 마라’라는 뜻이 된다.
즉, 내가 공부 중인 것에 대해 그녀의 관심을 떼어놓기 위한 말이었다.
싱글대는 표정을 보니 내게 친절히 공부를 알려주는 미래를 그리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착각과 달리 평생동안 그녀의 도움을 구할 일은 없지 않을까?
내가 지금 공부 중인 건 연금술이니.
“후배님은… 온종일 혼자 있는 것 같은데, 안 심심해?”
“공부할 것이 많아 심심하지는 않습니다. 자꾸 찾아와 방해하는 누구 때문에 지금 진도를 못 나가고 있지만요.”
“괜찮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해도 돼!”
“방해꾼이 누군지는 아시나 보네요. 선배님이 돌아가시면 하겠습니다. 그러니 좀 가세요.”
“킥킥. 마음 착하기는. 내가 찾아왔을 때 공부에 집중하면, 나 혼자 어색한 채 남으니 배려해 주는 거야?”
“와… 이건 참, 골때리는 발상인데요?”
“봐봐. 매번 거부하면서도 꼭 말 상대는 해주고.”
아무리 봐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 왜 이러지?
들러붙는 정도가 살짝 질릴 정도다.
그 정도로 내 외모가 특출난 축에 드나?
‘외모 이외의 것을 보고 반했다기엔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짧고… 아무리 봐도 내 얼굴에 반했다는 가능성 밖에 안 떠오르는데.’
반한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구애를 한다라…
살짝 두려워졌다.
만일, 그녀가 매우 특이한 성격이 아니라 아주 보편적인 여성의 성격이라면?
세상 모든 여성이 그녀 정도의 집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이 세계야말로 내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세계일 지도 몰랐다.
평소의 나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면, 침대 위에서 칼 맞기 딱 좋은 세계였으니까.
“왜요. 아예 등하교 때 저를 따라다니시죠? 점심시간이나 공강 시간에만 찾아오지 말고.”
“에이. 농담도. 그건 아무리 봐도 스토킹이잖아. 그런 걸 실제로 했다간 웃어 못 넘겨.”
안 낚이네.
차라리 대놓고 선을 넘는다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박을 텐데, 그것도 아니다.
게다가 찾아오는 것도 하루에 한 번, 길어야 한 시간이다.
“그런데… 후배님은 이렇게 교실로 등교하지 않아도 돼?”
“교장 선생님에게 허가는 받아서요. 전 이쪽으로 등교해도 출석 인정이 됩니다.”
“아니. 이사장의 허락 같은 문제가 아니라…”
“그럼?”
“…다 같이 초면에 친해지는 거면 몰라도, 이미 만들어진 그룹 안에 끼는 건 꽤 힘들 거야?”
“상관없습니다.”
친구는 무슨.
인싸 놀이는 과거에 지긋지긋하게 해봤다.
애초에 교실로 복귀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완전 남 일이지만…
이 여자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어때. 1학년 애들 얘기라도 좀 해줘?”
“어차피 흥미 없다고 해도 멋대로 말씀하실 거죠?”
“킥킥. 당연하지. 1학년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 하면… 역시 데이안이려나.”
데이안.
지구에 살던 평범한 현대인이지만, 이 세계로 빙의 된 원작의 주인공 이름이다.
사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향적인 성격이며, 오히려 그런 성격 때문에 더 눈에 띈다고 했다.
그의 행방이란 별로 호기심이 가는 정보는 아니었다.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타인이며, 앞으로도 그와 나 사이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테니.
아마 지금쯤 한창 히로인들과 안면을 텄으려나?
“…해서 지금 내 친구들도 친해져 보려고 난리가 났다니까?”
“그러게요. 초면에 그리 멋대로 들이대면 남자 쪽에선 오히려 불쾌하던데… 그죠?”
“코,콜록…”
이번에는 일부러 강하게 말을 했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그녀라도 이번에는 좀 타격이 있었는지,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솔직히 나도 마음이 편하진 않다.
남자면 또 몰라, 쓸데없이 눈길을 끄는 외모다.
내게 일방적으로 호의를 보내는 상대에게 면박을 주는 것도 정도가 있기도 하고.
손만 뻗으면 딸 수 있는 과일?
그 정도가 아니다.
깨끗하게 세척되고, 한입 크기로 잘려져 있으며, 앙증맞은 포크까지 꼽혀 접시에 예쁘게 담긴 과일이다.
그냥 입에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포크를 들어선 안 된다.
마음을 준 이상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다.
내가 결별을 선택했을 때는, 서로의 마음이 식었을 때뿐이다.
‘으음…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자존심이지.’
신념이라 부르기엔 질이 너무나 낮기에.
게다가 언제든 저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이상, 신념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당장 나보고 크리스와 멜 중 하나만 선택하라 하면 망설임 끝에 크리스를 고르지 않겠는가?
“선배님.”
“응?”
“그냥 대놓고 물어볼게요. 왜 저랑 친해지고 싶나요? 역시 사귀고 싶어서?”
“으음… 강제로 고백하게 만들고, 차버릴 속셈이야? 다시 네 앞에 못 오게 하려고?”
단번에 꿰뚫네.
역시 이 여자는 결코 눈치 없는 축이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싫으면 도망쳐도 되고. 모르는 척해줄게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자존심을 긁었다.
이 세계에서는 여자가 남성처럼 행동한다 했지?
네가 과연 이성에게 이런 말을 듣고 꼬리를 말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계산해 놓고 행동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악질적인 행동이지만, 내가 언제부터 그리 착해빠졌다고.
“하하핫!!”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던 그때.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행동에 호응해 주는 대신 조용히 응시했다.
그녀가 웃음으로 어물쩍 대답을 흘리지 못하도록.
“이야. 후배님, 나 진짜 헷갈려. 넌 강한 거야? 아니면 여린 거야?”
“강합니다.”
이 세계를 기준으로 엄청 강하다.
내 무력을 드러내면 아마 꽤 커다란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쟁이 없는 세계이니 큰 유용함은 없으리라.
어디 스포츠 경기에서 이름을 날리면 몰라도.
그녀가 물어본 부분이 내 무력적인 측이 아니란 걸 알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약하지 않다 생각했기에 당당히 그리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둘 다 같은데… 하긴, 그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강하다 약하다 딱 두 개로 나누려 들었던 것이 이상했을지도.”
“저도 검정이나 하양보단 회색을 좋아하긴 해요. 그런데 대답은 언제쯤 해줄 건가요? 저랑 사귀고싶습니까?”
“기다려봐. 지금 열심히 말 돌리면서 대답 솎아내는 거 안 보여?”
“…그걸 보통 대놓고 말하나요?”
“이미 눈치채고 있는 것 같던데 뭘. 차라리 대놓고 말하는 게 시간 벌기 더 좋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네.
데이지가 보는 내가 이렇게 보일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이한 사람으로?
“내가 만약에… 친구로 지내고 싶은 마음 80%, 흑심 20%라고 한다면?”
“음… 아쉬움을 숨기는 척을 하겠죠. 살짝 슬퍼하는 척을 하거나.”
“아쉬운 것도 아니고, 아쉬운 척? 왜?”
“고백받으면 금방 수락할 것만 같은 연기를 한 다음, 선배의 진짜 고백을 끌어낸 뒤에 정색한 채 차버리려고.”
“와… 지,지독하네.”
그녀가 오한이 들었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설마 내가 부끄러워하는 연기를 했으면 정말 고백이라도 했으려나?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거 말해줘도 되는 거야? 나 분명 속았을 것 같은데…”
“뭐 다른 답이 있겠습니까? 고백받기 싫어서 그랬죠.”
“고백받기 싫…? 어! 그 말은…”
역시 그녀는 내 말의 진의를 단번에 눈치챘다.
상당히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으니까.
“고백을 받기는 싫고, 그렇다고 고백을 차버리면 다신 안 볼 것 같고… 그러니 고백하지 마세요.”
“너…”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저도 머리를 식혀야 하니까.”
동아리실에 나를 만나러 찾아와도 된다는 내 은유적인 수락에,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갑자기 그녀를 받아들였냐고?
그야 연인과 친구는 완벽히 별개니까.
난 테라포밍 세계에서 블랑과 이강인의 친구였지만,
이후 딱히 그들을 챙겨주지는 않고 있다.
눈앞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은 친하게 지내 되, 우리가 떨어지게 된 이후에는 각자 제 삶을 살 게 되리라.
“80% 정도로 친구로 지내고 싶다 했죠? 나머지 20%, 열심히 감추세요.”
“…하하. 사실 20%도 안 되는데, 남자애들은 이성에게 그런 눈으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도 상처받잖아? 그래서 선의의 거짓말을 한 거지.”
“그건 더 좋은 소식이네요. 부디 진심이기를 바랄게요.”
“역시. 너라면 더 좋아할 줄 알았어.”
선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아무래도 완전히 허언은 아닌 것 같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서 다행이다.
솔직히 두 가지 선택지 중 고민했다.
첫 번째로 지금처럼 애매하게 연인의 선택지를 열어놓느니 확실하게 친구 관계로 만들던가,
아니면 연인 관계로의 발전은 없다는 엄포를 둬 놓고 섹파로 지내던가.
‘아. 선배한테는 후자가 더 좋았으려나?’
사실 나 역시 감성적으론 후자가 끌렸지만, 이성적으론 전자가 더 이롭다는 판단이 섰다.
몸을 섞으며 오는 떡정이라는 놈이 결코 무시할만한 게 못되니까.
게다가 그녀와 나는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다.
섹파는 섹스할 때를 제외하고 만나면 관계가 상당히 꼬이게 된다.
쓸데없는 정이 붙어버리니.
“그럼. 후배님. 이젠 내게 물어볼 게 있지 않아?”
눈앞의 그녀가 장난스럽게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요 일주일간 암묵적으로 이어졌던 줄다리기의 끝을 내자는 신호 같다.
승리자는 그녀고, 패배자는 나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패배를 선언하기로 했다.
“…그러네요. 제가 졌어요 선배님. ……이름이 뭔가요?”
“에일린. 그게 내 이름이야.”
만남 이후 그녀는 내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 역시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단순한 장난 섞인 자존심 싸움이었다.
굳이 이름을 외울 사이로 남기지 않을 것이란 내 의지와,
반드시 내게 이름을 물어보게 만들겠다는 에일린 사이에서.
내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이유?
그녀의 이름을 들을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끝이다.
그런데 에일린이라…
…이거 왜 이렇게 익숙한 이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