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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다음날.
해가 밝자마자 나는 헨리의 연금 공방을 찾았다.

- 끼익. 쿵.

“…왔냐.”

“어라?”

“뭐? 매번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한다고? 개뿔, 이 구라쟁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가 그녀의 방 안에 들어온 나를 보곤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내게 평범히 인사를 건네는 데이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한창 책에 빠져있다가 내게 놀래킴 당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내가 노크를 생략한  들어 온다는 사실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큼. 오늘은 책 안 읽어? 어쩐 일이래?”

“노크! 노크한다면서! 어딜 어물쩍 넘어가려고 그래?  사실 맨날 노크  하고 들어왔지?!”

“으음…”

“대답해!”

“…그래도 처음에는 열심히 했다고.”

“이익!”

눈빛을 보니 변명을 해도 통할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화를 돋우기 전에 솔직하게 말하며 사과하기로 했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일까?
데이지는 씩씩대며 성을 냈다.

조금 양심에 찔리네…
아무래도 한동안은 계속 노크를 해야 할 듯싶었다.
설령 데이지가 듣지 못한다고 한들.

“큼. 미안해.”

“후우… 노크해도 대꾸 없이 널 가만히 문밖에 세워두는 내 잘못도 없다 하진 않겠지만…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숙녀의 방이라고? 응?”

“이해했어. 오늘부턴 노크 꼭 할게. 약속.”

“약속은 지랄…”

결국 데이지는 투덜거리면서도 사과를 받아주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소의 그녀다.
하지만…
그런 데이지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지 않았다.

평소에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독서에 열중하는 그녀가 휴식이라니?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가령 불로의 약에 대한 연구  장애물에 부딪혔다든지.

“어디가 막혔어?”

“막혔다라… 으음… 그러네. 그런 걸지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는 거야? 하긴, 그 책의 저자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천재라고 했지?”

나 역시 머리를 비운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다.
직접 손으로 옮겨 적으며,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이렇게 얻은 연금술에 대한 지식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볼로의 약’과 관련 있는 책을 분류하는 것조차 힘겨운 수준이었다.
그런 만큼 데이지 역시 고전 중이라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이론 부분은 원활하게 진행 중.”

데이지는 내 예상을 부정했다.
오히려 ‘원활하다’라고 평가까지 내렸다.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말투로.

“…진척은? 어느 정도야?”

“큰 줄기 정도는 얼추 이해가 끝났어.”

“벌써?”

덤덤하게 하는  치곤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이다.
그녀가 이론의 줄기 정도만 이해했다고 말했다면,
실제론 90% 이상까지 이해했다는 뜻이니까.

‘아니.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는 않나?’

그녀의 연금술 스킬 레벨은 무려 5.
왕실 소속 고위 마법사들의 스킬 레벨이 4에서 5 사이에 머문 걸 생각해 보면…
초보 수준이라 평가될 경지는 결코 아니었다.
그 분야에 대해 능통한 숙련자라 불리면 몰라도.

“네가 평소 얼마나 노력하는진 여태  오며 알고 있지만, 재능도 엄청 뛰어난 축 아니야?”

그녀가 뛰어난 연금술사라는  이미 알면서도 자꾸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 같다.
 덜 여문 소녀 같은 외모 때문에.

무엇보다…
과거의 그녀에겐 한시라도 더 빨리 연금술을 익혀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10년간 잠잘 시간도 줄이며 공부에 매진했거든. 조금이라도 빨리 배울수록  연금술사 손에서 일찍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네.”

“뭐, 네 말대로 괜찮은 재능을 타고난 덕을 보기도 했고.”

데이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 무거운 대화를 계속하는 대신에 화제를 본론으로 돌리기로 했다.

“고작 한 달 만에 핵심을 파악했다라… 확실히 대단한 일이야.”

“후후! 그래! 비록 세습이 불가능한 직위겠지만, 난 언제든 귀족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귀족?”

“전에는 반제국파 때문에 왕성에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잖아?”

내 감탄 어린 목소리가 그녀의 기분을 무척 좋게 만들었나 보다.
데이지는 신나서 자랑을 시작했다.
실컷 띄워주면 좋아하는 걸 보니 정말 어린애 같네.

“네가 귀족이라니… 허. 이것만큼은 도무지 연상이  되는데.”

“…잠깐! 그,그렇다고 존대를 하라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알아두라고.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지…?”

“존대는 무슨. 나도 언제든 기사 자리쯤은 따낼 수 있거든?”

“뭐어? 거짓말! 기사가 그리 쉽게 등용되는 줄 알아?”

“이젠   전인가? 그때  홀로 제압한 왕실 기사만 몇 명인데. 게다가 보드엠… 큼. 국왕님이 넌지시 자리를 권유하기도 했고. 한 3년 정도 종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고,고작 삼  만에 왕실 기사…? 너,너,너어 그렇게 강했어?”

“걱정 마. 돌려서 거절했거든. 난 지금 용병단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고 보면 네가 있는 용병단. 개인 무력만 따지자면  번째로 친다고 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생각을 긍정해주었다.
하얀 고래가 꽤 강하긴 하지.

“그럼 데이지 너는 귀족이 되고 싶은 거야?”

“…생각은 없긴 한데, 내가 바란다고 한들 아마 안될 것 같아.”

“어째서?”

“불로의 약. 못 만들  같거든.”

마지막 희망, 치료 약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결론.
데이지는 자신이 손에서 책을 놓은 이유를 내게 말해주었다.

이론의 이해가 막힌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붉은 실타래를 쓰며 본 장애물 중 몇 가지를 그녀 역시 발견했다는 뜻이 된다.

“문제가 있나 보네.”

“맞아. 개수는 적은 데,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가벼운 놈들이 아니야. 내게는… 1년, 아니. 이젠 반년도 남지 않았잖아?”

그 반년조차 시각과 청각, 촉각을 포기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데이지의 청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파악한 문제의 종류는?”

“첫 번째는… 비약의 제작에 필요한 재료.”

“구하기 힘든 것이 많나 보네.”

“단순히 비싼 거라면 구할  있어. 나 돈이 꽤나 많거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수백 년 전 무분별한 채집으로 이미 멸종 판정을 받은 재료가 있다는 거야.”

“어딘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보면 있을 거야.”

“그래.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오지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잖아?”

원래라면 그랬으리라.
사람을 풀고 수소문한 끝에 결국 얻어내지 못하고 시간에 맞추지 못했겠지.
그 멸종  재료란 것이 한두 개가 아닐뿐더러,
애초에 지금 시대에  재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도, 시간에 맞춰 얻는 방법도.

“구해야 하는 재료 목록, 적어서 내게 줘.”

“그러지 마. 헛수고야. 이 재료들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

“아닐걸. 난 국왕이란 인맥이 있잖아?”

“…어?”

“그분, 내게 빚 진  많거든.  어려운 부탁이라도  번쯤은 들어주지 않을까? 가령 창고에 몰래 숨겨두었던 극도로 희귀한 재료를 보상으로 받는다든지.”

“……어어?”

데이지가 어벙벙한 얼굴을 했다.
수백  전만 해도 어마어마한 번영을 이루었던 그리다니아라면, 혹시 찾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닿은 모양이다.

음…
사실 창고에 없는 재료도 많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찾으러 가면 된다.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 문제  건 없다.

“잠깐!… 너… 방금 네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한 나라의 국왕에게 지운 빚을 쓰겠다는 뜻.”

“…병신. 진짜 이해가  돼…”

호구니 뭐니 또 험악한 욕이 날아올  알았는데, 데이지는 그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길 포기한 것만 같은 눈이다.

“뭐. 어차피 그 빚을 날 위해 쓸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으려나?”

“쓸 일이 없다?”

“문제는 재료뿐만이 아니거든. 다른 장애물을 듣다 보면 알아. …그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정말, 신기한 놈. 어떻게 망설임 하나 없을 수 있을까? 후후후.”

“그래? 다음 문제가 뭐길래?”

“마나. 특이하게도 비약 제조에 마법진이 필요한데, 그 마법진에 현실성 없는 마나의 양이 필요하거든.”

지하 유적, 그 중앙 실험실에서 액체 골렘을 상대했을 때.
바닥에 은은한 빛을 내던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은 까마득한 세월 동안 동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 평범한 방식으로 제작된 건 아니리라.

“이 문제는 국왕의 도움으로도 해결이 안 돼. 왕실 마법사 전원이 달려들어도 1%를 못 채울 걸? 그 전원이 1년 정도 마나를 불어 넣는 것에만 매달리면 몰라도.”

“1년이나 제작을 기다릴 수는 없지. 도대체 어느 정도 양이길래?”

“최상급 마나석을 기준으로 가격으로 환산하자면… 이 나라를  수 있을 정도?”

“무식하네.”

“큭큭. 맞아. 무식하지. 세상에 그리 많은 마나석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데이지가 말하길, 트리스 메기스투스는 드래곤 하트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게 세상에 있을 리가.
데이지는 드래곤 하트는커녕, 드래곤이 실존한다는 것조차 처음 알았다고 한다.

“봐봐. 어쩔  없지? 역시 불로의 비약은 제작이 불가능…”

“마나라… 그건 문제없어. 내가 해결할  있을걸.”

“…뭐?”

마나의 양?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난 언제든 지구에서 마나를 회복하고  수 있으니까.

만일 한 번에 많은 양을 쏟아내야 하는 것이라면 곤란했으리라.
나는 유지력이 무한한 것이지, 순간 출력이 높은 건 아니니까.
허나 단순히 일정 수준의 마나를 채우는 것이라면?
시간만 들이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다.
실타래가 내게 그리 일러주었다.

“해결할  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아… 널 상식으로 판단하면  되는 걸 알긴 하는데, 이번에는 좀 걱정이 될 정도라고?”

“큭큭. 왜. 내가 정신이라도 놓은  같아?”

“아,아니! 그런 건 아닌데… ………사실 조금은?”

“비록 이 자리에서 보여줄 수는 없지만, 방법이 있어. 농담도 아니고, 허언도 아니니까, 이 부분은 내게 맡기고 걱정하지 마.”

“억지도 이런 억지가… 후우…”

데이지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하는 선의의 거짓말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최대한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말하려고 노력한 것이 효과가 있나 보다.

“더는 모르겠다. 그럼 마지막 장애물이나 들어.”

“이것만 해결하면 끝이란 뜻이네?”

“…글쎄. 과연 해결할  있을지 모르겠다. 제일 심각한 문제라.”

“말해줘.”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큰 장애물은… 시간이야.”

역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대답이다.
불로의 약에 대한 상태창,  설명을 읽었기에 나 역시 알 수 있었으니까.

“최대한 단축해도, 완성되기까지 10,000일의 시간이 필요해. 연수로 환산하면… 27년을 조금 넘기는 정도.”

“……”

“봐봐. 아무리 너라도 시간은 어쩔 수 없지? 킥킥.”

“으음…”

“참고로 다른 방법은 없다?  증명으로, 다른 불로의 비약 제작법이 있었다면 트리스 메기스투스가 여태 살아있었겠지.”

세기의 천재 트리스 메기스투스.
제작법을 만든 그조차 이 10,000일의 시간을 어찌하지 못하고 기다리다 늙어 죽어버렸다.
그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이 장애물은 넘을 수 없다.
아무리 데이지가 뛰어나다고 한들 지금으로선 그의 발자취를 쫓는 것이 고작이다.

“차라리 후련하네. 더이상 공부할 필요가 사라졌어. 으음… 남아버린 시간을 어떻게 쓸까? 이왕이면  알차게 보내고 싶긴 한데…”

힐끗.

데이지가 나를 슬쩍 보았다.
목소리에서 가벼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마음 정리까지 마친 모양이다.
코앞까지 닥쳐온 자신의 죽음에 대해.

“큼. 큼. 그,그래서 제안이 하나 있는데, 너 한 반년… 아니, 몇 달…이 안 되면 한 달이라도 수도에서 쉬지 않을…래? 그, 잠깐 용병 생활을 멈추고.”

“……”

“그 왜, 무얼 하든 휴식이 필요하잖아? 게다가 최근에 넌  싸움을 하기도 했고… 그래! 너도 연인이랑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

“이미 한 달째 의뢰를 하지 않은 채 휴식 중인데? 나를 비롯한 하얀 고래 전원.”

“…그러니까.  곧 떠날 거잖아. 좀, 그, 심심할  같단 말이야. 그냥. …응.”

입으로 전해 듣지 않더라도 데이지의 마음이 읽혔다.
아무것도 없던 과거와 달리, 그녀에겐 추악한 면을 보였음에도 곁에 있어 준 나라는 친구가 있다.
그렇기에 삶에 대한 거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은 듯싶었다.
그녀가 따로 부탁하지 않더라도, 나는 죽은 그녀를 기억할 것이며, 그녀의 기일마다 무덤을 찾아올 테니.

그렇다면 이대로 데이지의 뜻에 따라 그녀를 놓아줘야 할까?
아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얼마  가능성 하나가 나의 손에 쥐어졌다.

배속.
완결 세계관에 한정에 최대 100배속까지 늘릴 수 있는 추가 기능.
하지만 결코 이 상황에 대한 만능 해답이 되지는 않는…
그저 ‘가능성’이 되어 주기만 하는 길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무척이나 힘든 길이란 것을 안다.
고민은 짧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걷기로 결정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던 데이지에게 말했다.
그녀가 기다리던 대답과 조금 다른 종류의 말을.

“야. 나 연금술 좀 알려줘라.  혼자 불로의 비약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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