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하늘에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오색의 축포가 피어나고,
지상에는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악기들의 합주가 어우러졌다.
왕위 계승의 시발점이 되었던 왕성 앞 광장은, 현재 그리다니아의 새로운 주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되었다.
인해(人海).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다.
그 단어가 결코 과장이 아니란 듯, 모인 사람의 수를 헤아리자면 일만은 우습게 넘기리라.
수도의 주민은 물론 주변 위성도시의 사람들까지 전부 몰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금 수도의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가득 찼다.
- 시끌시끌!
확실히 백 년에 한번 볼까 한 커다란 축제이긴 하지만…
새로운 왕의 탄생식이라 치기엔 약간 조촐하긴 하다.
값비싼 음식이 테이블 가득 들어찬 연회도, 10M를 넘는 조각상이나 기념비도, 하다못해 몇 시간에 걸친 연설도 없었으니까.
허나 타국의 비웃음을 살 정도로 빈약하지는 않았다.
당장 하늘을 올려다보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볼 일 없는 화려한 마법이 몇 시간을 끊이지 않고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의 위상과 인건비를 생각해 볼 때, 지나치게 돈을 아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뭐, 저들 모두 왕실에 소속된 마법사기에 실제로 보드엠이 쓴 재화는 그리 많진 않겠지만.
사치와 인색 그 중간에 존재하는 희미한 선.
국왕 보드엠은 정확하게 그 기준 위에 서 있었다.
띠링!
[*HARD MODE* 퀘스트, ‘다시 떠오르는 태양’ 클리어!]
=
햐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의 핵심 퀘스트,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모든 분기를 클리어했기 때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클리어 완료한 분기: [선동], [점령], [계승] (3/3)
보상: 소모품,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타래 (3개)
[완결 세계관 시간 축 조정]의 보조 기능 [배속] 해금
기타, 마공학 모터사이클 ‘Gran Turismo’
추가 보상 - 선택과 집중 Lv - [Passive] [기타]
=
그렇게 인파 사이에서 계승식을 구경하고 있을 때.
익숙한 시스템 소리와 함께 인벤토리에 무언가가 들어찼음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확인할 수는 없었다.
홀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럴 시간 없는데. 새롭게 공부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개면 몰라도…”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의 소음에 묻혀 다른 일행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얼굴에 불만이 새겨진 작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이내 이 소녀의 청각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그녀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목소리를 높이면 떨어진 채로도 충분히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다른 일행도 우리의 대화 내용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 스윽.
“잠깐 귀 좀.”
“뭐,뭐야. 좀 떨어져. 너무 가까운데.”
“이런 기회, 놓치긴 아깝지 않냐?”
“기회? 갑자기 무슨 소리?”
“방금 네가 중얼거린 불만 사항에 대한 대답.”
“그걸 들었어…?”
데이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긴,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야지.
그녀도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너 연금술사 밑에서 도망친 뒤에서도 자유로운 몸은 아니었잖아. 혹시 널 알아보는 사람이 나올까 봐 연금 공방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그…렇지?”
“널 알고 있는 귀족도 다 목이 잘렸겠다, 한 번쯤은 마음 편하게 구경도 해봐야지. 하물며 축제까지 열렸으니 더할 나위 없고.”
“……”
내 말에 데이지의 눈이 새롭게 바뀌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흩었다.
이렇게 과할 정도로 사람이 많으면 키가 작은 데이지는 결코 눈에 띄지 않으리라.
사람 사이에 숨는다면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질 것이다.
“확실히, 평생 수도를 구경한 적이 없기는 하네. 10년을 넘게 수도에 살았는데도…”
“이제야 좀 흥미가 가?”
“…그냥 산책만 좀 하다 들어갈 거야.”
다행히 같이 다닐 마음은 들었나 보다.
시종일관 뚱하던 표정이 풀렸으니.
“내가… 내가 축제를 즐긴다니, 나로선 상상도 안 되는 색다른 시각…이네.”
“억지로 끌려 나온 보람은?”
“…뭐, 잘하면 있을 수도? 견문이 넓어지면 영감이 떠오르기도 한다니까.”
“큭큭. 솔직하지 않기는.”
“또 뭔 헛소리… 아악! 야 이 개…!!”
나는 데이지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흩트리곤 자리를 떴다.
분노 섞인 욕설이 뒤에서부터 들려왔으나, 그냥 귀를 닫기로 했다.
이제 이쪽은 어느 정도 처리가 되었으니까…
내게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주제에 끊임없이 나를 힐끗거리는 사람을 상대할 차례인가?
- 터벅터벅.
“축제가 크지 않아서 아쉽겠어요?”
질문은 돌아오지 않고 무시당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당황한 자넷이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못 들은 척 하기로 해버린 듯하다.
그러니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축제, 기대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단장.”
“…어? 나?”
“그럼 제가 말을 걸 사람이 단장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아니 뭐… 여럿 있잖아. 크리스라던지, 너랑 두루 친한 애들이라든지.”
자넷이 내 눈을 슬쩍 피하며 말을 이었다.
자신한테 말을 건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는.
‘그날’ 이후로 일주일이 훌쩍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 어색함을 버리지 못한 눈치다.
나름대로 열심히 평소를 연기하고 있기는 하나, 그녀의 언행은 내가 아니더라도 이질감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다들 그 원인을 로저의 죽음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축제라… 내가 술과 연회를 좋아하긴 해도, 지금은 상관없어.”
“이미 만족스런 보수를 받았으니까?”
“뭐 그렇지.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게다가 이 정도 규모 축제면 우리끼리 즐기기엔 충분하고.”
“외교관 자리, 걷어차지 않으셨습니까? 보수가 충분하긴 무슨.”
“외교관? 나 같이 못 배운 놈이 외교관 같은 거창한 직함을 달았다가는 크게 사고 쳐서 목이 잘릴걸. 난 내 주제를 아는 년이라고.”
“음… 전 단장이라면 외교관과 무척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요. 그만한 능력도 있으시고.”
비록 업무 권한이 용병업에 한정됐다고 한들,
자넷의 특성을 떠올려보면 어떠한 험난한 거래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을 것만 같았다.
…특유의 털털한 말투를 고상하게 바꿀 수만 있다면.
온갖 기발한 비유와 중의적인 의미를 섞는 복잡한 귀족의 화법을 사용하는 자넷이라…
도저히 상상이 안 되긴 했다.
직구로 욕설을 때려 박으면 몰라도.
확실히 그걸 생각해 보면 외교관 자리에 대한 거절은 나름 현명한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내 능력이라… 글쎄. 너만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
“어째서 그리 생각했나요?
“…큼. 넌 그…”
“예?”
“…넌 내 좋은 쪽만 보고 있잖아. 그러니 분명 과대평가야.”
“풋. 맞네요. 분명 제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있긴 하죠.”
“그,그래. 그런 거라고.”
부끄러운 듯 볼을 긁으며 말하는 자넷.
나는 그런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눈앞의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여인은 내 재빠른 수긍에 귀를 약간 붉혔다.
솔직히 자넷이 외교관 자리를 걷어찬 건 내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그녀가 공무에 집중하게 되면 지금처럼 자유롭게 만날 수 없게 될 테니.
그러니 더이상의 설득은 그만두기로 했다.
난 아직 자넷을 곁에 두고 싶었다.
“오래오래 보자고요. 우리.”
“무,뭐냐. 파계승 너 우리 몰래 술 마셨냐?!”
“저 원래 이런 거 알잖아요. 속마음에 솔직하게 사는 것.”
“…역시 넌 어딘가 맛 갔어. 그런 말, 보통은 입 밖으로 안 뱉잖아.”
인연을 최대한 오래 이어가자, 어지간히 낯이 두꺼워선 하지 못할 말이긴 하다.
하지만 난 뻔뻔한 얼굴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넷은 신기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저라도 모든 속내를 내보이진 않아요. 그래도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어느 정도 솔직히 행동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마,마음을 연… 음. 음. 물론 나쁜 건 아닌데…”
“아닌데?”
“난 성격이 이래 생겨 먹어서 기묘하게 매려…억… ……색다르게 다가오긴 하는데, 고지식한 여자는 널 안 좋게 볼 수 있다고. 계속 그리 행동하면 인기 없어진다?”
“그럼 단장 입장에선 좋은 거 아닌가요?”
“…어? 어어? 그,그런가?”
자넷이 무언가를 마구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완전한 문장의 형태가 아닌 툭툭 튀어나오는 단어의 조합이기에,
전부 듣기는 했으나 자세한 내용을 유추하긴 힘들었다.
아무래도 고민이 단시간에 끝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혼란에 휩싸인 그녀를 두고 본래의 자리로 향했다.
크리스의 곁으로.
그렇게 돌아본 크리스는 지금…
데이지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있었다.
“혹시 단 거 좋아하니? 자. 꿀 사탕 한 개 줄게!”
“가,감사합니다…”
데이지가 낯가림을 연기하며 사탕 막대를 받았다.
저런.
쟤는 저걸 먹어도 맛을 못 느낄 텐데.
그래도 데이지는 열심히 맛있음을 어필하고 있었다.
크리스도 기뻐하는 데이지를 보고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죽도록 어색해하는 데이지를 구하기 위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 둘이 꽤 친해 보이네? 크리스 너 아이를 좋아했나?”
“으음… 그냥 그랬는데, 이 아이는 은인이잖아. 찬영의 다리 치료를 도운?”
“…그렇지.”
“응! 보답으로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이미 찬영에게 충분히 받았다며 한시코 거절하더라. 너무 예의 바르고 똑똑한 아이인 것 같아!”
크리스는 호감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어색하게 웃는 데이지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이 소녀가 어쩌면 크리스보다 연상일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알까.
당연하지만 나는 데이지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데이지를 위협할 귀족들이 사라진 지금.
이젠 나이에 관한 비밀을 밝혀도 위험해질 일이 없겠으나,
그녀에겐 이 급변한 주변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게다가 커다란 문제 한 개가 남기도 했고.
“내가 얘한테 보답을 해줬다고? 무슨?”
데이지가 말한 ‘보답’이란 건, 아직 둘만의 비밀이었기에 쉽사리 말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저절로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가 크리스에게 댄 보답의 핑계가.
“찬영이 이 아이랑 놀아줬다면서? 그걸로 전부 보답받았다더라!”
“놀아…줬…다고? 내가? 그러니까, 얘를?”
“응! 줄곧 혼자 지내느라 친구가 필요했대. 솔직히, 대답이 상상 이상으로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꽉 껴안을 뻔…”
“잠깐…!? 크리스님!! 그,그건 비밀로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아. 그랬…나?”
데이지가 분노와 수치가 반반씩 섞인 눈빛으로 크리스의 말을 끊었다.
표정은 용케 수줍은 소녀를 연기하고 있었다.
나였으면 표정 연기가 무너져 내렸을 텐데.
“푸흡… 큭… 그래. 데이지, 친구가… 큭큭… 필요…했구나. 푸흐흡…!”
“……”
“잠깐, 나 더는 못 참겠어…”
허벅지를 거세게 꼬집었다.
어느 때보다 크게 터지려는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 고통이 필요했다.
같이 웃고 떠들 친구가 필요했다니?
데이지의 본래 성격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순수하디 순수한 대답이다.
당장 데이지는 나를 향해 악귀와 같은 얼굴을 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 내가 웃음을 참는 것에 실패한다면…
이미지며 뭐며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만 같네.
나는 최대한 슬픈 생각을 떠올리며 목젖을 치는 웃음을 억눌렀다.
억눌러야 했다.
안 그래도 입이 험한 쟤가 제대로 삐지면 도대체 어떻게 돌아올지 상상이 안 되었기에.
“큼큼. 그래 데이지.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
“네에에엑… 감사합니다악…”
데이지의 이빨 경도가 실시간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그만큼 내게 알리기 싫었던 듯했다.
데이지가 이처럼 수치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히, 친구가 필요했다는 말에 반쯤 진심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웃음을 터뜨리는 이유는 결코 비웃음이 아니다.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너무 순수한 대답에 귀여웠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내 웃음이 비웃음이라 여기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 오해를 좀 풀어야겠다.
“크리스. 멜은?”
“아… 멜씨는 본인이 축제를 가장 즐기고 말겠다며 인파 사이로 사라졌어.”
“참, 꾸준하다 해야 할지… 어떻게 예측을 벗어나질 않네.”
“길을 잃진 않으시겠지?…”
“멜도 성인 남성인데 뭘. 알아서 놀다 돌아오겠지. 아, 우리도 오랜만에 둘이서 다닐래?”
“와! 그래도 돼?”
“단장에게 간단하게만 말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
우리는 둘이서 축제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내가 유독 청각이 좋은 걸 이용해서 ‘나중에 보자 개새끼야.’라고 중얼거리는 데이지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지구보다 훨씬 낙후된 세계지만, 괜히 축제는 아니라는 듯 볼거리는 의외로 많았다.
축제 특유의 자극적인 음식도, 기묘한 악기와 이색적인 음률이 담긴 음악도 전부 처음 경험하는 것투성이였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마법이 귀한 세계라 지구에서 볼 수 없는 공연이 거의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
그래도 하루를 질릴 정도로 즐길 수 있었다.
데이트 때 무얼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연인끼리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즐겁기에 데이트이지 않은가?
그렇게 오랜만에 바쁜 하루를 보내고 밤이 찾아왔을 때.
- 띠링!
나는 드디어 하드모드 퀘스트 보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