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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끈적해. 이상한 냄새도 나고.”

“아니, 냄새를 왜 맡아요?”

“그러고 보면 먹기도 한다던데… 탈나지 않을까?”

“해롭지는 않겠지만… 추천은 안할게요.”

“무슨 맛 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그러네. 네가 알면 이상한 거네. 응.”

자넷이 자신의 위에 걸쳐진 정액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하얀 액체는 젤리처럼 찐득했지만, 굳이 상세하게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액이니까.

- 스윽.


“뭐,뭘 봐.”


땀에 젖어 관능적으로 빛나는 자넷의 몸을 말 없이 감상하고 있을 때.
시선을 느낀 그녀가 이불을 끌어당겨 가리며 말을 톡 쏘았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슬슬 우리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 현실감이 와닿은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방에서 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야 의심의 시선을 피할  없을테니.
즉, 보통 연인이 몸을 섞은 뒤 나누는 분홍빛의 잠자리 토크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말 없이 있으면 어색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워버릴 것이다.
세세히 따지자면 첫 경험은 아니지만, 넓게 보면 첫 경험을 겪은 그녀다.
훗날 오늘을 추억할 때.
외로움 같은 약간의 부정적인 기억이 섞여버릴 수 있다.
섹스는 본게임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의 케어도 무척이나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자넷을 혼자 두고 돌아가야 하는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곁에 있어주고 싶은데.


“큼… 그. 음음… 오늘은, 술…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없으니까 슬슬…”

“흠. 벌써  보내시려고요?”


“…그렇다고 함께 잘 수는 없잖아.”


자넷이 슬프게 웃으며 내게 그리말했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이다.
허나, 설득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분명 ‘조금만 더’를 외치고 있는 그녀의 속마음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리라.

띠링!

나는 시스템을 조작해 잠깐 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가지 물건을 챙긴 뒤, 다시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로 들어왔다.

자넷은 지구에 다녀오기 전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보인 나는 잠깐 가만히 서 있었던 것으로 느껴졌겠지.


“잘 자고. 내일 애들한테 걱정끼친 것도 사과할테니  걱정은 마. 어떤 바람둥이 덕에 기운 차렸으니까.”


“정말로 보내시려나 보네. 전 아직 부족한데.”

“…누군 좋아서 이러는  알아?”

살짝 삐친듯한 얼굴.
하지만 조금 더 같이 있고싶다는 내 말에 기분은 좋아진 듯 하다.

결국 나를 보내려 하는 자넷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돌아가기 싫었다.
오늘  같이 있어준다는 최선의 선택은 못하니까, 차선이라도.

“조금 정도는 더 있다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잠깐 엎드려 보세요.”


“엎…드리라고? 왜?”

자넷은 갑작스러운 요구에 궁금증을 느끼면서도 시키는대로 엎드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매끈한 등이 보인다.


가까쓰로 그 등에서 시선을  뒤.
인벤토리를 뒤져 지구에 다녀왔을 때 준비한 수건을 꺼냈다.


수건은 적당한 온기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따뜻한 물에 푹 적신 뒤, 한번 비틀어 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손에 들린 것은 몸을 닦아주기에 딱 좋은 용도의 수건이다.

- 움찔!

“흣?! 뭐,뭐야?”

“단장. 며칠간 못씻었잖아요? 그렇다고 이 시간에 목욕물을 준비하긴 힘들고. 청결, 매번 신경쓰시는 것 같길래… 대신 닦아주려고요.”

따뜻한 수건이 닿자 자넷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다행히 금세 가라 앉는 것이, 뜨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나보다.
나는 세심한 손길로 자넷의 등을 부드럽게 닦아갔다.

- 스윽. 슥.


“혹시 뜨겁지는 않죠?”

“아니… 딱 좋기는 한데… 큼.”

사실 자넷의 몸은 그리 더럽지 않았다.
요 며칠간 땀흘릴 정도로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먼지를 뒤집어 쓴 것도 아니다.
그녀를  껴안았을 때도 악취가 아닌 살결의 체취가 느껴지는 정도였으니까.

“그… 이건 술 때문에 한 실수라고 하기엔… 애,애틋한 연인들끼리 하는 애정행각에 가깝지 않…나?”

“이런식으로 몸을 닦아주는 것, 부상을 입은 동료들한테도 흔히 해주잖아요?”


그렇기에  행동의 목적은 스킨십이다.
대놓고 스킨십을 하면 크리스에게 미안해 할 자넷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핑계를 만들어 놓은.

“난 딱히 다치지 않았는데…”

“대충 마음이 다쳤다는 걸로. 싫다고 해도 계속 할거니까, 조용.”

“…뭐야. 건방져.”


“큭큭큭.”

자넷도 모르는 척  핑계를 수긍해주었다.
얼굴을 베개에 묻은 걸 보니, 나름 이 상황을 즐겨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최대한 세심하게 자넷의 몸을 쓸었다.
단순히 몸을 닦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내가 봉사하기를 자처  정도로 자넷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있도록.
이따 내가 이 방을 떠나더라도 자넷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온기가 담긴 수건이 자넷의 등을 스쳐지나간다.
자넷에게도 분명 이 온기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대로 수건이 머금은 체온 정도로 달궈진 습기가 아닌,
좀 더 서정적이고 오글거리게 표현해야 하는 그런 온기가.

“…향기로운 향이 나.”


“수건에 뭘 좀 묻혀놨어요. 냄새, 나쁘지 않죠?”

“향유?”

“비슷한데, 자세한  비밀.”


“비쌀  같은데…”

“시시하게 돈 얘기는 꺼내지 말죠. 지금 분위기 꽤 좋은데.”


분위기가 좋다는 말에 자넷의 어깨가 다시한번 움찔거렸다.
그 말대로 우리 사이에는 꽤 달콤한 분위기가 펼쳐져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순간 우리는 분명한 연인이었다.


나는 웃음기를 억누르고 자넷의 대답을 예상해 봤다.
음…
내가 아는 그녀는 정곡에 찔리거나 부끄러우면…
이걸 감추기 위해 욕부터 하려나?


“…이 바람둥이 새끼.”

맞췄네.


“큭큭. 등은 전부 닦았어요. 이제 앞으로 돌아 누우세요.”

“아,앞도 닦게? 앞은 내가 닦는 게…”


“저희 이것보다  격한 것도 했습니다.”

“……”

자넷이 무언가를 반박하려다가 결국은 얌전히 돌아 누웠다.
이제와서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 도리어 쪽팔리다 생각했나보다.


아까 마음껏 만졌던 가슴이 드러났다.
손에는 아직까지도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있자니 또다시 만지고 싶어진다.
여성의 가슴이란 그런 것이다.

자넷은 지금 붉어진 얼굴로 눈을 부릅 떠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마치 뭘 뻔히 보냐고 눈으로 말하는 모양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가슴을 보고 있다고 솔직히 말해주는 대신에,
기습적으로 다가가 입을 맞춰 주었다.

- 쪽.


“윽, 뭔데…! 갑자기…!”

키스의 순간은 짧았다.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움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빤히 보시길래 키스해 달라는 줄 알고. 착각했다면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는데… 그냥. 큼. 놀라서?”


후…
가벼운 입맞춤 한번에 저리 기뻐하는 얼굴로 바뀌는 걸 보니 저절로 음심이 동한다.
당연하지만 자넷은 물론 나까지 알몸인 상태 그대로.
심지어 편히 누운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있기에 이대로 몸을 기운다면 곧바로 맨살에 맨살을 맞댈 수 있다.
하지만…

‘시간에 쫒기는 게 한이네.’

분명 여기서 더 달아오른다면 한발 이상을 빼야 진정할 것 같다.
그러니 스킨십은 가벼운 키스와 지금처럼 몸을 닦아주는 정도까지만.
발기가 풀리지 않아 여관 복도를 어기적 거리며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자. 팔도 좀 들어 올려주세요.”

“…응.”

나는 아까 그랬던 것 처럼 정성을 다해 자넷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젖은 수건이 식기 전에 닦아야 한다.


그렇게 그녀의 몸을 닦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살짝 들었더니 자넷이 멍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 아직 꿈에 취한 것만 같은 얼굴이다.


“왜요? 혹시 정말로 취하셨나?”

“아니. 상황이 좀 신기해서…?”


“그런가요? 별 이상한 것 같지는 않은데.”

“…글쎄. 적어도 남자가 알몸으로 내 몸을 상냥히 닦아주고, 나는  남자의 몸을 조용히 구경할 날이 올거라 생각은 못했지.”


“제 몸을 보고 계셨나요? 좀 부끄러운데.”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자넷이 눈꼬리를 살짝 떨었다.
군살 하나 없는 몸이라 당당하게 행동할  있었다.


“그래서 감상은?”


“감상?”

“저 몰래 보고 있었으면 적어도 칭찬이라도 해주세요.”


“큼. 봐줄만. 응. 봐줄만한 몸이야.”

“봐줄만한이라… 저처럼 근육이 많은 남자는 싫어하세요? 그래도 우락부락한 타입은 절대 아닌  같은데.”


“아,아니. 나도 파계승 너처럼 과하지 않은 게…”

“않은 게?”

“…끝이야. 왜 되물어?”


“단장님 입에서  칭찬이 나오는  기다리는 중이라.”

“……”


결국 자넷의 입에서 ‘너처럼 과하지 않은 게 좋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좋아’라는 말에 싱글벙글 기뻐하는 척을 해주었더니, 자넷의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련은 이런식으로 하는 거지.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잠자리 토크를 대신할 수준의 연인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자넷의 다리를 닦아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결국 대화의 시간은 끝나버렸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은 부분은 제가 못하겠죠?”


“혹시 하려 들었으면 존나 때렸을 거야.”


“그럴 것 같았어요. 수건 두고 갈게요. 혹시 찝찝하면…”


“야!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 쓰지 마…!”


그녀의 몸  내 수건이 닿지 않은 부위는 그 부분밖에 없었다.
당장 자넷이 다리를  채 어떻게든 감춰보려 애쓰는 음부.

나는 바싹 마른 수건 하나를 더 꺼내 자넷의 몸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닦아주며 마무리 지었다.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옷의 먼지를 턴 뒤 입고, 슬슬 작별할 준비를 했다.


“이번엔 진짜로 가볼게요. 내일 봐요.”


“…응. 잘자고.”

자넷이 침대에서 허리를 일으켜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전히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그대로였다.

물기를 닦았다고 한들 한번 젖었던 몸이다.
혹시나 감기가 걸릴새라 이불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 포옥.

마지막으로 한번 가볍게 껴안아 준 뒤.
문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을 때, 자넷이 나를 멈춰세웠다.

“잠깐…만.”


“네?”


“아니, 그. 몸 닦아준 거. 고맙다고도 못한 것 같아서.”

“큭큭. 고맙긴요.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한건데.”


우선 날 멈춰 세운 이유로 감사 인사를 택하긴 했으나,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어보이는 눈이다.


무얼 물어보고 싶은 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자넷의 성격상 결코 물어보지 못하겠지.
실제로 자넷은 몇번이고 입을 벌렸다 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눈치껏 대답해 주기로 했다.


“몸 닦아준 거. 크리스랑도 안해본 거에요. 단장이 처음.”


“…정말?”

“네. 정말로. 애초에 인지하고 해드린겁니다.”

“너… 그래도 되는… 거냐?”


나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는 이미 내 인생의 중요한 업적을 죄다 선점하고 있다.
자넷의 인식과 달리 나의  연인은 크리스가 아닌 안젤리지만, 아무튼.


이미 크리스는 내 처음을 가져간 것이 수없이 많다.
그래도 조금 정도는…
내가 자넷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었다.

“제 첫키스랑 첫섹스는 못드려도,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제가 미안해요. 이런 이상한 것 밖에 못해줘서.”


내 모든 것의 처음이 크리스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리 말했다.
이 말이 자넷의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어쩐지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다.

“…아니야. 기뻐.”

“단순히 몸을 닦아주는… 스킨십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건데, 그리 기뻐해주시면 도리어 죄송해져요.”

“정말로… 기뻐서 그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자넷은 결국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에서 용기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무언가를 얻었나보다.
원래의 자넷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질문을 했으니까.

“…오늘 한 거는? 그러니까… 그, 야한 거. 크리스랑도… 해본 거…야?”

“그건 비밀.”

“뭐야. 왜?”


“어떤 대답을 들으셔도 슬퍼할 거면서. 그럴 바엔 저만 알고 있을게요.”


“…너 진짜… 후… 으… 진짜. 양아치. 바람둥이 새끼.”

“그리고 단장은 그 바람둥이한테 코가 꿰였죠.”

“………맞아. 나 이제…”

그녀가 어깨를 감싼 이불을  손으로 꼭 쥐었다.
그렇게 고개 숙인 자넷은…


- 퍽!


“억?”

말을 잇는 대신에 내 허벅지를 발로 찼다.
발차기를 맞을 거라 전혀 예상조차 못했던 상태였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에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삼아  건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가! 이제 좀 가라! 어? 나도 쉬자!”


“…당황스럽네. 방금 저희 엄청 애틋한 분위기 아니었나요?”


“큭큭큭! 그랬는데, 언제까지 신파극 찍을 거냐? 어?”

“부끄럼타시기는. 기운 차리신  같으니 정말 가볼게요.”

“그래. 꺼져.”

어쩐지 무척이나 후련하고 밝아보이는 표정.
그 표정을 본 뒤, 이제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넷은 오늘 홀로 남은 방에서 외로워 하지 않을 것이다.


- 끼익. 쿵.

그러니 나는 안심하고 방을 나올  있었다.
과연 내일 아침 나를 본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까?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나를 모르는 척 할까?
아니면 뻔뻔하게 인사를 하러 올까?
솔직히 좀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 탁탁탁.

“단장! 도망치지 마세요!”


“도,도망치는 거 아닌데? 아침이라 목이 말라서  좀 마시러 가는 거야!”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마침 저도 물이…”

“……”


- 탁탁탁!!

“앗!”

짧은 시간동안 자넷과 술래잡기를 해야 했다.
얼굴을 마주보기 부끄러웠는지 마구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 속도는 내가 본 평소 그녀의 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나도 꽤 진심을 다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을 수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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