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아직 별이 빛을 내는 밤.
살짝 밝아진 하늘을 보니 곧 동이 틀 무렵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연금 공방을 뒤로한 채 하얀 고래 용병단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다들 숙소에 모여있을 테니까.
늦저녁에 시작된 전투.
선왕이 보드엠의 손에 사로잡힌 것으로 상황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또한 슬슬 급박한 정리 정도는 끝마쳤으리라.
그렇기에 용병은 보상을 약속받은 채 일단 해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부적인 국정의 수습마저 용병 같은 외부인의 손을 빌릴 수는 없을 테니.
‘…걔는 외견이 그래서 그런지, 자꾸 어린애 대하듯 해버린다니까. 그래도 이상한 오해는 안 산 것 같지만.’
백을 넘는 책을 선물 받은 데이지는 기뻐했다.
며칠을 번역에 매진한 보람이 있을 정도로.
보이지 않던 희망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났으니 기쁨을 느낄 만 하다.
나는 그런 데이지에게 차마 한 가지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 부작용을 지우는 것에,
큰 장애물 한가지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
[아이템 정보 확인] -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이름: 완성된 불로(不老)의 비약
종류: 소모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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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재료는 단 하나도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미완성 상태의 비약을 완성상태로 끌어 올리는 최후의 작업에 대한 방법을 알아내었습니다.
(■■ ■■■■ 마법이 단 한 순간도 끊기지 않은 채 10,000일을 유지.)
오감을 잃던 부작용이…
.
.
.
=
지난번 확인했던 ‘불로의 비약’의 정보창에는…
제작에 10,000일이란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비약을 제작한 전설의 연금술사도 시간을 단축하지 못한 채 기다리다 수명이 다해 죽어버렸으니까.
연수로 환산하자면 대략 27년.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일 년이다.
즉, 정상적인 제작법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내가 그렇게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을 때.
“찬영! 찾고 있었어!”
“크리스?”
숙소가 보일 정도까지 다가왔을 때.
입구 근처에 서 있던 크리스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여태 기다린 거야? 밖에서?”
“당연하지!”
- 와락!
우선 팔을 벌린 채 안기려는 크리스를 받아주었다.
껴안은 크리스의 몸에는 여러 냄새가 감돌았다.
꽤 익숙해진 체취와 약간의 혈향.
다행히 크리스의 몸에서 난 피는 아닌 듯 했다.
“다친 곳은 없어?”
“마법사들, 찬영이 말한 대로 허공에서 기습하니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더라. …다들 싸우는 거에 비해 너무 편한 역할을 맡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네가 없었다면 희생이 몇 배로 늘어났을걸?”
“응. 알긴 하는데… 그래도 뭔가 좀.”
그야말로 전쟁의 주역이라 칭해도 올려치기가 아니다.
오늘 크리스가 살려낸 목숨이 몇이나 될까?
만일, 그날 영지전에서 봤던 화염구 수십 개가 아군을 향했다면…
국왕을 사로잡으며 승리한 것과 별개로 거대한 피해를 보았으리라.
- 쿡. 쿡.
크리스가 내 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찌른다.
약간 간지러웠지만, 어째서 이러는지 알 법해서 말리지 않았다.
“걱정 마. 안 다쳤으니까.”
“으음… 그런 것 같네. 자넷에게 다친 곳 하나 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중간에 사라졌다고 해서 놀랐잖아.”
“뭐야. 그래도 나 정도면 이 세계 기준으로도 상당히 강할 텐데. 날 못 믿은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알면서.”
약간 삐친 듯 말하는 크리스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대로 아무 행동도 안 하면 연기가 아닌 진짜로 삐칠 수도 있기에, 이미 내게 안긴 그녀를 힘주어 더욱 끌어안았다.
그러자 크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몸을 한층 더 기대어 왔다.
비록 말은 이렇게 했으나…
나 역시 연인이 가지고 있는 무력과 별개로 걱정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이론상으론 크리스가 다칠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맡긴 역할에 대해 내심 걱정했으니까.
멜은 용병 여럿과 함께 기사 하나를 상대했으니 상대적으로 변수가 적지만,
주요 인물의 암살을 맡은 크리스는 다르다.
이 세상은 판타지적인 물건이 존재하는 세계다 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자신을 죽인 대상에게 저주를 내리는 부두술이 있다던가.
다행히 변수는 없었나 보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준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해? 우리 내부에 사상자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사람은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 은퇴해야 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사람도 없고.”
“역시. 우리 용병단이 엘리트 집단이긴 하네. 멜은 어디 안 다쳤어?”
“멜씨? 아, 완전 건강하셔. 아직도 흥분에 차서 칼을 헝겊으로 닦고 있더라. 자신의 칼날이 피를 머금었다나?”
“큭큭. 평소의 멜이 할법한 행동이네. 그럼 단장은?”
“자넷…은… 몸은 멀쩡한데, 음…”
크리스가 작게 망설였다.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것이 눈에 읽혔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곧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무언가를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며.
“아마, 찬영이 직접 보는 게 빠르겠다.”
*
‘길드장이 죽었다라…’
죽어도 죽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남자가 죽었다.
그의 특성을 알고 있던 나는, 그가 죽지 않는 걸 믿고 있었던 만큼 꽤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자넷을 설득하여 로저를 이 전장에 끌어들인 것이기도 하고.
가장 최근 그와의 만남의 끝은 싸움 비스름한 것이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그닥 친하지는 않았어도, 지인의 죽음이란 무언가의 씁쓸함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특히 자넷과 나는 꽤 친하다고 볼 수 있는 사이였고,
자넷은 로저를 가족처럼 여기는 듯했다.
그 정도야 눈치 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길드장에게 큰 관심이 없던 크리스가 내게 로저의 부고 소식을 알릴 때 그리 안타까운 얼굴을 했던 것이다.
“단장.”
“…아. 파계승. 돌아왔냐?”
“따로 말없이 이탈해서 죄송합니다.”
“야야. 괜찮아. 네 행방은 2 왕자에게 들었어.”
자넷이 손사래를 치며 내 사과를 받았다.
표정은 웃고 있다.
목소리에 떨림도 없다.
어딜 봐도 평소와 같은 자넷이다.
“이야, 진짜 난 놈이네 너? 능력도 능력인데, 나보다 더 기회를 잘 잡는 놈이 다 있다니.”
“제가 기회를 잡는다니요?”
“뭐야. 곧 국왕이 될 2 왕자에게 잘 보여서 한자리 받아내려고 따라간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물론 받으면 좋긴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잃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지금 시국은 정권이 완전히 뒤바뀐 스타트 지점.
현대로 따지면 공무원에 해당하는 귀족을 쥐 잡듯이 잡을 차례다.
근 1년간은 FM대로 빡빡하게 법률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귀족이란 이름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상응하는 이득을 주겠지만…
그건 이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주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
내게는 귀족의 의무와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딱히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권유받더라도 거절할 수도 있겠네요.”
“…다른 용병 놈이 똑같은 말을 했다면 헛소리 말라고 뒤통수나 후릴 텐데, 한때는 수도의 길을 걸었던 네가 말하니 허투루 들리지가 않냐.”
“저 의외로 욕심 많은 사람인데요?”
“알아. 너 돈은 겁나게 밝히잖아. 그래서 수도승이 아닌 파계승이고. 큭큭.”
“……”
아무리 그래도 농담까지 해가는 자넷을 보니 이질감이 들었다.
나는 숙소에 들어오며 자넷의 상태에 대한 예측을 3가지 했는데,
첫째가 방에 틀어박혀 울고 있는 거고, 둘째가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것.
세번째가 애써 멀쩡한 척하며 우리의 걱정을 사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접 보니 셋 모두 아니다.
어설픈 연기가 아닌, 자넷은 실제로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였다.
로저의 부고 소식을 듣지 못했을 확률은 없겠지.
그렇다면 사실 자넷과 로저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기억 속 길드장과의 첫 만남.
그때 자넷과 로저가 하던 대화 사이에 느껴졌던 따스함은…
나의 오해라고 덮어씌우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단장님. 들으셨습니까? 그…”
“응?”
“용병 길드장님이요. 지난번에 저희를 소개해 주었던.”
“…아.”
자넷의 표정이 살짝 어색하게 변했다.
몰랐던 이야기를 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두 분은 친하셨지요?”
“…친했지. 응.”
“그런데 꽤 괜찮아 보이시네요. 솔직히, 한창 울고 계실 줄 알았는데.”
“큭큭. 뒤질래? 울기는 누가 울어.”
“뭐, 우는 건 너무 간 것이라고 쳐도… 적어도 술 정도는 드실 줄 알았습니다.”
“글쎄. 그러네. 술 생각도 잘 안 나고. 왜 그럴까?”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멀쩡하다면 짐작이 가는 건 하나다.
하지만 내가 이 가능성을 말하기 전에, 자넷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 거 있잖아. 실감이 잘 안 된다는 놈. 그런 비슷한 게 아닐까?”
“어라? 생각보다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정말 친했던 사람이 죽었어. 그런데 눈물은커녕 슬픔조차 안 느껴지면, 그것밖에 없지 뭐.”
게다가 나와 비슷한 경우, 주변에도 몇 놈 있었어. 자넷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동료의 죽음이 흔할 수밖에 없는 용병 업계에서는 그렇게까지 희귀한 현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본인도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가?’
간접이라곤 해도 경험자는 경험자다.
어느 정도 대응법을 가지고 있으리라.
그리 안심을 했을 때.
자넷의 표정을 보곤 생각을 달리 해야 했다.
“단장님? 심란한 듯 보이십니다. 좀 많이요.”
“…어라? 내가 그랬어?”
“설마… 그런 반응을 보였던 지인의 최후가 안 좋았습니까?”
“……이상한 억측 하지 마. 멀쩡하게 살아가는 놈도 있으니까.”
내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안 좋은 선택을 했던 사람도 몇 명 있었다는 뜻이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가족, 연인, 스승 또는 그만큼 소중했던 누군가를 잃었단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한동안 예의 주시해야겠네.’
멀지 않은 날.
오늘 찾아오지 않은 감정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친했던 지인의 불행한 소식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 대비할 수 있는 한 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니, 걱정하는 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도 않다.
불행 중 다행일까.
“기분은 좀 어떠신가요?”
“그냥. 좀 멍하네. 의욕도 사그라든 느낌이고.”
“…당분간은 의뢰를 하지 마시고 좀 쉬죠. 그러다 사고 납니다.”
“안돼. 나는 용병단의 단장이잖아. 내가 쉬면 모두가 쉬어야 해.”
“괜찮아요. 오늘 있었던 일만 해도 꽤 큰 건수 아닙니까? 게다가 지하 유적에서 복귀한 뒤 제대로 휴식도 못 했고요.”
“그래도…”
“다들 불만 않고 번 돈 전부 쓸 때까지는 얌전히 있을 겁니다. 으음… 술에 취해 도박하는 용병을 ‘얌전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요.”
“…그러려나?”
“제가 보증하죠.”
“큭큭.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응. 그래야겠다.”
자넷이 감사를 담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약해지긴 약해졌다.
원래의 자넷이라면 오기로라도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을 테니까.
“그럼, 자세한 건 내일 말하기로 하고… 슬슬 쉴까? 너도 그렇고 다들 밤새웠잖아? 게다가 굶은 채로.”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다들 저녁을 걸렀죠?”
“그래서인지 모두 밥부터 먹고 있지만, 나는 생각이 없네.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볼게.”
자넷은 그리 말하곤 1인실로 발을 옮겼다.
그녀를 배웅한 뒤, 나는 다른 단원들과 너무나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제가 기사의 왼쪽 옆구리 방향으로 칼을 찔러 넣었죠. 칼을 명중 시키기보다는, 공간을 장악한다는 느낌으로!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었을 때의 그 쾌감은… 히히힛!”
식탁 위 대화를 이끌어 간 것은 멜이었다.
나와 크리스를 비롯한 다른 단원들은 밤샘 전투의 여파로 무척이나 피곤해했기 때문이다.
“이건 비밀인데, 그 발상은 사실 찬영님을 보고 떠올린 거예요! 그때 강철 골렘에서 함께했던 합공을 제 나름대로 조금이나마…”
아무 말 없이 먹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는 식사 자리가 좋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 듯, 다 같이 멜의 무용담에 호응해주며 배를 채웠다.
‘이야… 멜은 지치지도 않나 보네? 젊음이 좋기는 좋아…’
그런 아저씨 같은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친 뒤.
모두들 때 늦은 수면을 만끽했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떠 다들 비적비적 일어나 모였을 때.
한동안 의뢰가 없다는 공지는 내가 해야만 했다.
자넷의 방문이 하루종일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욕도 없고,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였다.
자넷은 그날 하루를 통째로 굶었다.
방문을 두드리고 안부를 물어보면 대답은 해준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무려 그다음 날 저녁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