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바닥에 나뒹굴며 먼지를 먹은 책 하나를 들어 펼쳐보았다.
그리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첫 페이지부터 서론따윈 없다는 듯 바로 연구 내용이 데이지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금화 단위로 팔아먹는 값비싼 연금술 교재와는 차원이 다른 정보 밀도다.
한 장. 두 장.
손이 의지를 벗어나서 페이지를 넘긴다.
읽으면 읽을수록, 외견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 정도로 밀도가 높은 학술의 향연이었다.
고작 10여 년 만에 어엿한 연금술사가 된 그녀다.
스스로를 꽤 재능이 있다 여긴 만큼 더 커다란 충격이 뇌리를 덮쳤다.
이 서적은 최소한 왕실 연금술사급의 지식을 지녔어야 겨우 이해가 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딱히 책에 마법 따위는 걸려있지 않았는데도, 일정 수준에 닿지 못하면 그 편린조차 얻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그녀의 손에 들린 이 책을 경매에 내놓으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녔을까?
적어도 왕국이 삼킬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제국, 혹은 그 밖의 강대국들이 얻어내기 위해 온갖 압박이 들어올 테니.
극소수만 만지는 것이 허용된 서적.
알고 있는 것만으로 위기를 끌어들이는 금지된 지식.
그녀의 감정을 단순히 ‘호기심’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스스로를 학자라 여긴다면 가질 수밖에 없는 그 탐욕스런 욕구가, 순식간에 차오른다.
그대로 책에 빠져버린 데이지는…
- 턱.
“꺄으아악?!”
“나중에 읽어. 어차피 다 너 줄 거니까.”
어깨에 얹어진 손에 화들짝 놀라 책을 손에서 놓쳤다.
다행히 책은 바닥을 뒹구는 대신에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단순히 놀래키는 거면 몰라도, 책이 떨어지면 정말로 화를 내는 데이지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 너 이런 심각한 얘기 하는 도중에도 날 놀리고 싶어?!”
“그래. 우린 심각한 얘기 하는 도중이었지. 그리고 넌 나를 잊고 독서에 빠져들었고.”
“…윽.”
“몇 번 불렀는데 대답을 안 했잖아. 그 정도로 집중했어?”
“…그,그냥 귀가 안 좋아진 것뿐이야!”
학자를 묶는 마력이 깃든 책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또한 자신과 박찬영이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었는지 떠올렸다.
그렇기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버렸다.
아무리 귀한 책이라도, 지금은 독서를 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큭큭. 쪽팔리기는 한가 봐?”
“…닥쳐.”
“좋아. 일단 너도 이 책들이 진품이란 건 깨달은 것 같으니… 이제 믿겠어?”
“……”
“해답지가 여기 있는데, 시도해볼 만하잖아. 완벽한 불로의 약을 만드는 것.”
데이지가 시선을 돌려 책으로 만들어진 산을 쳐다보았다.
어림잡아도 100권은 가볍게 넘을만한 양.
“설마… 이 수많은 책이 전부?…”
“다 같은 사람이 쓴 책이야.”
“트리스… 메기스투스…”
“찾아보면 불로의 약과 관련이 있는 책도 많을걸? 대답이 의문형인 이유는… 일단 해석해 옮겨 적으며 읽어보긴 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더라.”
“그렇겠지. 이건 초보자용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리라.
이 책들은 절대 가볍지 않은 정보를 담고 있을 테니.
그런 책이 백을 넘는다.
물어볼 때가 아닌 걸 알지만, 너무나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들은 도대체 어디서?”
“수도 근처 지하에 유적이 발견됐단 소문은 들었지? 거기서 발견했는데, 몰래 빼돌린 거야. 아까 보여준 물건을 나타났다 사라지게 하는 능력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도대체 어디에…”
“수도승의 비술.”
“……”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실제로 그녀의 앞에서 시연하기도 했고.
데이지는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이 수많은 책은 분명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렇다는 말은 갑작스럽게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 후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들이켰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우연히 수도 지하에 유적이 발견되었고,
우연히 유적의 주인은 전설 속의 트리스 메기스투스였다.
우연히 왕실 연금술사와 전설의 연금술사가 연구하던 주제는 같았고,
우연히 유적에서 서적을 빼돌린 박찬영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를 살리기 위한 열쇠가 되어 찾아왔다.
“…말도 안 돼… 내가 사실 마왕이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으려나?…”
“아. 그 유적에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왕실 연금술사가 맞을 거야.”
“유적에 드나든 흔적이 있었다고?”
“응. 거기 있던 책은 전부 왕국에서 쓰는 글자가 아닌 암호문으로 적혔는데, 유일하게 책 한 권만 왕국어로 적혀 있었거든.”
“…어? 나,나 바보인가? 그러고 보면 그 유적의 입구가 발견된 땅의 주인이…”
“네가 죽인 왕실 연금술사지. 나는 다른 경로로 알고 있던 정보였어. 그리고, 너 바보 맞아.”
“이익!… 아,아무튼!”
데이지는 허겁지겁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한켠에 놓인 자신의 책을 발견하고는, 그 내용을 뒤졌다.
별 실력이 없던 연금술사가 기미도 없이 불현듯 보여주던 천재성.
가끔 외출을 핑계 삼아 어디론가 사라지는 거동.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는 불사의 약에 대한 연구…
모든 것은 한가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개자식. 지금껏 낸 그 경악스러운 발상의 논문들도 자신의 것이 아니란 뜻이잖아?”
지금 데이지의 손에 들린 책은 죽기 전 왕실 연금술사가 쓴 책이다.
동시에 가장 소중히 여겼으며, 항상 들고 다니며 읽어댔던 책을 가져온 것이다.
본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책을 그토록 반복해서 읽는 것이 미심쩍었는데, 그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이건 분명 그 암호문이란 걸 어찌어찌 번역해서 옮겨 적은 책이리라.
“어쩐지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군데군데 이상한 것 같더라니…!!”
책 자체에 담긴 내용은 획기적이었다.
그렇기에 데이지도 항상 들고 다니며 이해하려 노력 한 거니까.
하지만 읽어도 읽어도 구간마다 어물쩍 넘기는 느낌이 꼭 났었는데,
이는 번역하지 못한 부분을 왕실 연금술사가 임의로 메꾸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자신이 모자라기 때문에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책해 왔던 데이지로써는 허탈한 결말이었다.
비록 실패작이긴 하나, 불로의 약 제작에 대한 진척을 어느 정도 진행시킨 연금술사가 쓴 책이다.
그렇기에 책 속에 자신의 몸을 치료할 힌트가 있으리라 생각한 데이지는 이 책을 손에 떼지 않고 읽어왔다.
하지만 그 실적은 전부 거짓이었고, 왕실 연금술사의 본래 실력은 그리 특출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지난 몇 달간… 도대체 무엇을 위해…”
- 스윽.
“너무 허탈해하지 마. 전처럼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아닌, 진짜로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찾았잖아?”
“…’사막에서 바늘 찾기’라, 표현이 재밌네.”
데이지의 머리에 투박한 손이 얹어졌다.
이 남자는 그녀가 연상이란 걸 알면서도, 꼭 이렇게 어린애 취급을 하곤 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쳐버린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의 추악한 과거, 씻지 못할 죄를 듣고서도 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이 손해 보길 좋아하는 남자는…
결국 그녀를 쳐내지 못했다.
혹여 데이지가 박찬영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분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텐데.
‘…아. 그러네.’
그제서야 데이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과 그는 너무 달라서, 도저히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고.
어떤 제정신 박힌 사람이 그녀를 도울까?
트라우마 때문에, 연애 대상은 결코 못 된다.
그렇다고 진짜 소녀처럼 순박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득을 위해 어린 소녀를 연기하는 계산적인 성격을 가졌다.
시한부 삶에 동정심을 주기에는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다.
다른 단점도 한두 개가 아니다.
신경 안 써주면 금방 자기혐오 섞인 불안에 빠지는 귀찮은 성격이지,
말투는 더러워서 저도 모르게 비속어로 욕을 하지,
또 자존심은 세서 술을 마셔본 적도 없는데 있어 보이려고 명주를 마시는 것이 취미라는 거짓말을 하곤 하지,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은 잊는 것이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억해 달라는 무척이나 이기적인 부탁을 하지,
처음 보는 사람은 무조건 적대하는 반 사회적인 성향이지…
그리고. 또 이것도. 그 밖에 여럿.
분명.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호구가 아닌 한.
“너 또 울어? 큭큭. 내일 아침 되면 눈 팅팅 붓겠네.”
“나… 혹시, 살 수 있을,까?”
“제작법이 적혀있다고 한들, 불로의 약이라는 게 쉽게 만들 수 있는 물약은 아니잖아? 당연히 장애물이 많을 거야. …나도 걸리는 게 몇 개 있고. 그래도, 한번 맡은 일. 어떻게든 해볼게.”
“불로의 비약…을… 먹는다고 해도 부작용이, 사라진다 장담할 수 없잖아.”
“그래도 난 될 것 같아. 출처는 내 느낌.”
그가 미소짓는 소리가 들린다.
어째서냐면, 불로의 비약만 만든다면 그녀를 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확신에, 데이지는 마음속 여러 불안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속 편한 놈. 머릿속에 꽃밭만 든 멍청이. 쓸데없이 긍정적인 호구.”
“뭐야. 부끄럼타는 거야? 짜식.”
“너,너어!! 제정신이야? 이걸 어떻게 그리 받아들이는…!!”
“나도 최근에 깨달은 건데, 감이란 의외로 신뢰할만하다?”
“……”
“아니 진짜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자꾸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줄까?
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할 남자다.
분명 들어도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대답이 돌아오겠지.
그러니 그냥 받아들이자.
자신은, 데이지는 박찬영의 곁에 있을 운명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된다.
이런 기적. 이런 우연.
비록 불로의 약 제작에 실패해서 수명을 늘리지 못했다고 한들,
꽤 행복 속에서 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미련은 철철 남겠지만, 그래도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가면을 벗은 그녀를 긍정해준 이가 있으니까.
- 스윽. 슥.
“…그런데 이 손은…”
“아, 머리? 싫었으면 진작에 화냈을 거잖아? 네가 손을 안 쳐냈다는 건 암묵적인 수락이지.”
“그,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비약이야!”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에 울컥해버렸다.
동시에 약간 골이 나버렸다.
이것이 암묵적인 수락이란 것까지 알았으면, 그대로 어물쩍 넘기며 암묵적인 채로 두는 것이 좋지 않은가?
굳이 수면 위로 꺼내서 데이지가 손을 쳐내게 만들다니.
아쉬움을 연기로 감춘 채 눈매를 모으며 손을 치웠다.
눈가가 물기로 젖어 전혀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어도.
- 탁!
묘하게 안정감을 주던 투박한 손바닥이 머리 위에서 사라졌다.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는 것도 웃기겠지.
데이지는 대놓고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대로 눈앞의 청년을 응시했다.
자신과 비슷한 머리카락.
자신과 비슷한 나이.
동양인 특유의 약간 동안끼가 맴도는 외모.
제법 봐줄 만하게 생긴 얼굴과 반대되는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
천성이 선해 독을 먹인 사람과 친하게 지내려 든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친구를 위해 세상을 바꿨다.
그야말로 호구가 따로 없는 성격.
어디 가서 사기라도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올까 걱정되지만…
의외로. 정말로 의외로,
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듬직하다.
“있잖아. 너 혹시, 막 남에게 무언가를 퍼주고 그러면 성적인 쾌감을 느껴?”
“…농담이지?”
“킥킥킥. 아님 말고.”
울면서 웃는다.
스스로의 꼴이 얼마나 웃기게 보일지 예상이 가기에, 더 큰 웃음이 터져버렸다.
분명 못 봐줄 정도로 못생겼겠지?
“아하핫!!”
“으음…”
그는 속눈썹에 눈물을 매단 채 소리 내며 웃는 데이지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빵한 모습에, 한 방 먹여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당히 유쾌해졌다.
방금의 말이 농담인지, 진심으로 그런 오해를 산 건지 헷갈리고 있는 것이리라.
‘역시 넌 머저리야. 내가 진짜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날 볼 때, 그런 추잡한 눈을 하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데.’
지금은 아니다.
당장은, 그 끔찍한 일상으로부터 해방된 지 반년도 넘지 못한 데이지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만약,
그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미래가 찾아온다면,
그건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