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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6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해서, 단장을 따라 어떤 건물로 들어갔지. 근데 2 왕자님… 아, 이제는 국왕님이지? 아무튼 그분이 기다리고 있더라?”

별일이 아니라는 듯.
천천히 풀어지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기밀 사항이 분명한,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가 싶은 내용도 거리낌 없이 해주었다.


애초에 그가 행동한 모든 것은 그녀를 위함이란 것을 눈치채버렸다.
데이지가 점점 쑥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 감정이 부끄러움까지 닿았을 때.


‘…나,남 좋은 일만 해주는 등신 주제에 힘냈네.’

참지 못하고 속으로 욕을 해버렸다.
본심과 전혀 다르지만 의도적으로 퉁명스럽게  것이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상냥한 호의에,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서.

“크흠… 스스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네 인식보다 꽤 유능하다?”

“…어? 어어?”


“그렇게까지 등신은 아니니까 걱정 마.”

데이지는 변명을 하는 남자를 보곤 꽤 당황했다.
방금 그녀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욕이  밖으로 나왔단 뜻이니까.


이래서야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욕을 해버린 것이 된다.
남자는  마음에 두지 않은 듯 넘어가려 했지만…
이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넘어가게 두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이상한 곳에서 완고한 데이지의 성격이.


“그래서 내가…”

“잠깐! 아니니까!”


“응?”


“마,말이 헛나왔다고. 등신이라고 한 거, 진심이 아니었어.”

“어… 뭐?”

“야! 하,한번에 좀 알아들으라고!  귀도 나보다 훨씬 좋으면서 왜…!!”


“아니, 알아듣기는 한번에 알아들었는데… 좀 놀라서. 너 원래 그런 낯간지러운 말 직접 하는 성격이냐? 큭큭.”

“이익! 사람이 기껏 마음 써서 사과했더니!”

- 퍼억!


말실수해 사과를  것보다,
귀여운 무언가를 본 것처럼 실실 웃는 시선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을 놀리는 듯한 시선은 위험하다.
전처럼 열만 받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지금은 참을  없을 정도로 정감이 가기에 더더욱.


“아무튼. 어찌어찌 용병들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해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오늘 하루 만에 전부 일어났으리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왕성에서의 전투 부분은…

“다행히도 우리 쪽이 이겨서 좀 과격한 왕위 계승은 성공적으로 끝났지. 전 국왕과 1 왕자는 모두 사로잡았고.”

“…”


“그리고 나는 빠져나와 달려온 거야. 이곳으로.”

“…그게 끝이야?”

“응. 끝.”

“……”

이야기가 너무나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왕성의 전투가 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분명 그가 겪었던 전장은 고통과 죽음이 가득 내려앉았을 것이다.
적군은 물론, 어쩌면 그의 동료에게도.

‘…쓸데없는 배려하긴. 얘는 날 정말 어린애로 여기고 있나?’

다행히 외견상의 그는 어딘가 다친 곳은 없는 듯했지만…
혹시 데이지가 걱정할까 심각한 묘사를 피한 것이다.


허나 그녀는 겉보기와 달리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생략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위험했는지 충분히 떠올릴  있었다.
하물며 평범한 전장이 아닌 왕국에서 가장 방위가 집중된 왕성 내부다.
데이지로썬 왕성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함락되는 일 따위 상상 불가능했다.


“그럼… 포션은? 내가 준 포션.”


“아, 고마워! 전부 썼어. 당부받은 대로 남에게는 안주고, 전부 내가 사용했지.”

“…전,부?”

남자의 대답에 데이지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동시에, 목소리에 떨림이 담기고 말았다.

떠나기 전.
분명 위험할 수도 있는 의뢰라고 들었다.
그런 만큼 의뢰가 단 하루 만에 끝날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자연스럽게 건네어 준 포션의 양은 최소 며칠 분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꽤나 넉넉히 사용했을 때를 가정해도.

“그걸, 전부… 썼다고?”


“아. 맹세컨대 절대 빼돌리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런 걸, 의심한 게, 아니라고…  머저리야…”

데이지의 고개가 숙여졌다.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 많은, 포션을 전부… 모조리 써야 할 정도로 다쳤,다는 거,잖아…”


“…어…? …그게 그리되려나?…”

남자가 어색한 얼굴로 변명했다.
그녀가 무언갈 오해하고 있다는 둥,
애초에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둥,
증거로 상처 하나 남지 않은 몸을 보라는 둥…

결국에는 한숨을 내쉬더니, 엄살을 부려서 과다 복용을 한 거라고 말했다.

물론 데이지는 저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저 모든 것이 하나의 배려로 다가왔다.
포션의 가치를 아는 그가 가벼운 부상 정도로 포션을 사용할 리 없기에.

‘멍청이가… 별 상처 아니었는데 엄살 부린 거라고? 거짓말. 그럴 리 없잖아… 섬뜩한 수준으로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은 너였는데…’

어쩌면 순순히 고백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부상을 당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위기를 한 번도 아닌, 두세 번을 훌쩍 넘게 겪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데이지로써는 예측밖에 할 수 없었다.
쓸데없이 상냥하고 호구 같은 저 남자가, 그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줄  없으니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오래전 메말라 버렸으리라 생각했던 눈꼬리가 습기로 젖어버렸다.
후각이 사라진 것이 다행이다.
만약 그에게서 혈향이 조금이라도 났다면…
데이지는 분명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눈물을 보인다니?
어제의 그녀에게 알려준다면, 분명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자신이라면 이러지 않을 테니까.

어린 날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제 목숨을 붙잡고 살아가는 뻔뻔한 년.
탈출을 계획하긴커녕, 그 끔찍한 상황을 이용해보려 드는…
이성적이지만 독하기 그지없는 더러운 년.
죽어가는 몸뚱이를 어떻게든 치료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추한 년.
이것이 과거가 말해주는 데이지의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 젠장. 이젠 나도 모르겠다. …반하지는 마라?  많아지면 슬슬 곤란하거든.”


“…반하,기는… 미쳤어 아주. 누가, 누구보고, 도끼병,이래?”

“목소리에 울음기나 감추…”

“안 울거든?!”

당장 지금을 보라.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은 동생에게 아무런 언급도 없이 홀로 이별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별을 알아챈 그가 감성적으로 변하며 발생시킬 변수가 걱정된 것이다.
이로 인해 헨리가 받을 상처보다 더.

물론 그녀의 자기 혐오적인 평가와는 달리 그닥 이성적이지도 않다.
손해를 보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하는 상냥함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데이지는 자신의 인간성을 밑바닥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흐읍! 후우… 야. 호구 자식아. 미리 말하는데, 나 너한테 줄 거 없다? 다리 치료해  때 준 포션도 자주 만들진…”

“알아.”


“……”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안다.
남자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것이 아니란 것쯤은.
방울진 눈으로 힐끗 올려다본 그의 표정은, 깜짝 선물을 받은 데이지의 반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저절로 마음이 뭉클해지는 지는 호의다.


‘저런 눈을 하는데… 어떻게 오해를 안 해? 내,내가 자의식 과잉인 게 아니라고…’


만난 지 얼마  된 친구를 보는 눈치고는 너무나 깊었다.
그녀가 아무런 근거 없이 오해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데이지의 걱정과 달리, 그는 그녀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는, 박찬영은…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


‘난… 좋은 사람이 전혀 못 되는데…’


친구 사이에 궁합을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정도로 좋은 사람을 만나버리면 자신의 못남이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감쪽같이 만든 가짜 보석이라고 한들, 진짜 앞에 두고 비교하면 그 부족함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처럼.
초라하고 초라해져…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나로서는…’


그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꼬이듯, 곁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언제나 있으리라.
그녀 말고도.

이미 연인이 있는 남자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연인과 둘이 있을 시간을 빼앗고 있다.
과연 친구가 한계인 데이지가 연인과의 행복보다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언젠가 떠나야  용병이다.
의뢰를 받게 되면 자주 자리를 비울 것이다.
아니.
거점이 없는 하얀 고래 용병단 소속인 그는, 오히려 한 달에 하루도 채 못 만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한부 인생이다.
그것도 완치 확률이 사실상 없는.
1년 뒤에 그에게 남겨줄 것은 영원한 작별의 고통밖에 없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란…
까마득히 오래전,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버지가 읽어주셨던 동화 속에만 존재한다.
어른이 되기 한참 전부터 포기하는 법을 배운 그녀다.
그렇다면.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지금 데이지가 자신을 위해, 그를 위해 해야 할 판단은 무엇일까?


“…야. 해줄 이야기가 있어. 따라 들어와.”


“네 방? 지난번처럼?”

- 끄덕.


그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숨기고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데이지를 떠나갈 확률이 아주아주 높을 것이다.
어째서 데이지가 스스로를 더러운 년이라 여기고 있는지, 눈앞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이도 알게 될 테니.

- 끼익. 쿵.


“할 이야기가 뭔데? 음… 꽤 진지한 얼굴이네.”


“…앉아.”

이번에는 술의 힘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
올곧은 정신으로 말하고 싶었다.
이 남자와의 짧았던 인연의 최후만큼은.
그녀가 자랑하는 뻔뻔함을 앞세워.

‘…고마워. 네 덕분에, 죽기 직전에 떠올릴 추억을 받았어. 그러니 이젠…’


흑심 하나 없이 그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
일수로 헤아리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시간 따위에 구애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무언가를 받았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도.
앞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무언가를 느낄 수 없게 되어도.

언제든 이 온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이제 괜찮다.
사실 조금만 더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그러도록 스스로를 세뇌했다.
데이지는 포기에 익숙했다.
그녀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아비가 그러했듯이.

“…연금술 실험 사고로 죽었다던 그 왕실 연금술사 기억해? 나에게 연금술을 알려준 그 소아성애자.”

“살아만 있었다면 잡아다 네 앞에 묶어 던져 줬을 텐데… 죽었다니 아쉽지.”

“그 왕실 연금술사. 사인은 사고사지만, 사실 내가 죽였어.”


“…역시 그랬구나.”

“뭐야. 눈치챘었어? 아,  의외로 눈치가 빨랐지…”

“그냥 느낌상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네가 몸을 최대한 사려야 하는 이유도 그거면 설명이 되고.”

“…거기까지 알았네. 잘났어 정말…”

데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눈에 띄는 머리카락 색은 언제나 걸림돌이 되었다.
왕실 연금술사 밑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노예 시종이 있다는 건,
연금술사와 친분이 있는 이들은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연금술사의 밑에 있었던 건 한두 해가 아니었으니.


아직 연금술사가 사망한 지는 반년도 되지 않았다.
데이지로썬 잠잠해 질 때까지 몸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데이지의 신분이 들킨다면…
최소한 도망치지 못한 다른 노예 시종처럼 왕국 재산으로 귀속될 테고,
최악에는 범행이 들켜 얼마 남지 않은 수명 동안 옥살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난 그 사람 밑에서 10년 가까이 있으면서  신뢰를 받고 있었거든. 연금술 재료를 바꿔치는 건 손쉬웠지.”

“10년…이라… …아무튼  손으로 이뤘구나. 복수.”

“제일 중요한 복수는 네가 대신해서 해줬지만. 고마워. 진심으로.”


“…뭐야. 의외로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네? ‘난 그런  바란 적 없어!’ 나, ‘내가 복수하려 했는데, 가로채다니!’ 같은 소리 들을  알았거든.”

“내,내 성대모사 하지 마! 그리고 너는 날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더럽게 꼬인 사람도 아니고, 이루지도 못할 복수를 대신 해준 사람에게 설마 화내겠어?”


“이루지도  할이라, 너무 비관적인데.”

“그냥… 현실을… 알았던 거지. 상대는 왕국 전체라 봐도 무방했잖아? 내 힘으론 영원히 복수가 불가능했어. 냉정하게.”

데이지는 시선을 돌려 남자의 눈을 피했다.
이제부터 나올 이야기는…
도저히 눈을 마주치며 할 자신이 없었다.

“있잖아. 지난밤에, 내가 혹시 죽게 되면 나를 기억해달란 말. 아직 잊지 않았어?”

“잊을 리가.”


“그 약속 취소할게. 잊어도 돼.”

이 다음 이야기는 헨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데이지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담아만 두고 있던 이야기.
그녀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

“…어째서?”

“듣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었다.
분명 아무 일 아니라고 얼버무리면, 그는 무엇도 물어보지 않으리라.
하지만 데이지는 떨어지는 입을 막지 않았다.

‘와… 무섭네. 엄청 무섭지만…’


설령 그에게 환멸을 산다 하더라도 더는 숨기기 싫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위해 이런 거대한 선물을 준 그에게,
이해득실을 따지며 가면을 쓰긴 너무나 싫었다.

모든  내보이자.
그리고 그 결과는 받아들이자.
이것이 그녀가 가장 소중한 친구, 박찬영에게   있는 최대의 용기였다.


“우리 첫 만남에서. 내가 깨끗한 년이 아니라고 했던 것.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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