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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어떤 이윤지 놈들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채 달리고 있었어! 최대한 빠르게 쫓아가면 금방 따라잡을 수…”

그렇게 다리에 마나를 부어 넣으며 2 왕자의 뒤를 쫓아 달리던 때.
그들은 한 명의 기사와 마주쳤다.
투구를 쓰지 않아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알아볼  있었다.


“번 그레이? 성 외각의 경계를 맡은 네가 왜 이곳에?”


내성 및 주요 왕족의 수호를 맡은 모런 뎀프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다못해 귀족의 서자조차 아닌 질 낮은 혈통을 가진 자다.
때문에 진급이 막혀 왕성의 내부로 발을 딛는 것조차 허용이 안 되었다.
그런 번 그레이가 이곳에서 발견된  경질을 해야  일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이 중요한  아니었다.

“당장 길을 비켜라! 지금 네놈과 어울려 줄 시간은 없다!”

스릉.

비록 출신과 계급의 차이가 난다고는 하나, 같은 왕실 기사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그만큼 상황은 시급을 다루고 있었다.

분대 규모의 적군이 왕성에 무혈로 입성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발생한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국왕이 인질로 잡힐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워워. 모런 뎀프시, 진정하자고.”


“내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다면 베고 지나가겠…”


“침입한 적군의 뒤를 쫓는 중이지? 왕좌가 있는 쪽으로 가고 있고.”


“…네놈도 그들을 만났나 보군.”


이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어떻게 번 그레이가 내성에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역시 2 왕자 수하에게 속아 길을 내준 것이리라.

격에 맞지 않는 피를 가져 눈에 거슬리는 놈이지만,
십여 년간 주제를 넘는 왕실 기사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가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그리 판단한 모런 뎀프시는 눈짓으로 합류를 지시했다.
왕좌로 향한 반역자 일행의 수는 열을 넘겼으니.


“내가 앞장선다. 따라오도록.”


“잠깐, 지금 설마 왕좌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 허, 2 왕자의 기만에 놀아나고 있군.”


“헛소리! 너는 듣지 못했나? 그들은 왕좌로 향하고 있어!”

“그게 속은 거라는 거야. 냉정히 생각해봐. 그들이 제정신으로 우리들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해 주겠어?”

“…!”

번 그레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설득을 시작했다.
너무나 그럴듯한 말이기에,
급박하게 왕좌를 향해 가던 이들의 발이 잠깐 멈추어 섰다.


“왕좌로 향하고 있다, 딱 봐도 ‘국왕을 노리고 있다’라는 생각을 유도하는 말이잖아? 이미 국왕님은 왕좌 근처에 떨어져 비밀 통로로 피신했을 게 분명한데.”

“헛? 그,그렇군…? 왕좌가 있는 알현실은 지금쯤  비어 있을 테니…”

“그렇지. 그들의 목적지는 왕좌가 있는 곳이 아니야.”

“설마 목표는 비밀 통로…? 허억! 그들의 주군인 2 왕자는 비밀 통로의 위치를 알고 있… 젠장!”

“정확히는 그곳에 피신 중인 국왕님과 1 왕자님을 붙잡는 것이 그들의 목표야.”

“왕좌로 향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 탁탁탁!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런 뎀프시를 비롯한 기사들은 바닥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밀 통로가 있는 곳과 알현실은 방향이 비슷했지만…
하마터면 헛발질을 한 몇 분의 차이로 국왕을 인질로 잡힐 뻔했다.


그러나, 기만을 꿰뚫은 번 그레이는 합류하지 않았다.
복도에 멈추어  기사들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런 번 그레이를 향해 일갈했다.


“뭐하나! 어서 따라와라! 시간이 별로…”


“아니.  여기 남는다. 곧 놈들의 후속이 들이닥칠 거야. 그럼… 우리는 놈들에게 앞뒤로 포위당하겠지.”


“……내성의 수많은 복도마다 수호를 담당하는 기사들이 둘 이상씩 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줄 것이야.”

“틀렸어. 적군 무리가 들어온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 담당하는 기사들은… 그들을 뒤쫓아 오느라 지금 이곳에 모였지? 그럼 그 길들은 지금 텅텅 비었겠네?”

“이런…!!”

이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었나?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모런 뎀프시는 아직까지도 왕궁에 들어선 이들이 적군이란 걸 눈치채지 못하고, 합류하지 않은 골빈 기사 몇몇이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차분히 정리할 시간만 주어지면 금세 허점투성이의 계획이란  알겠지만…
상황은 너무나 급박하게 흘러갔고,
깊게 생각할 시간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에 혹했을 뿐.


“…앞에 놓인 것이 함정이라고 한들 일단 전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국왕님의 안전을 확보할 때까지, 그리고 앞서간 적군을 제압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그 시간은 넉넉하면 넉넉할수록 좋지.”


“그 시간을… 네가 끌어 보겠다?”

“마침 이 복도는 그리 넓지 않아. 포위당할 염려는 없겠지. 적어도… 10분은 받아낼  있어.”


번 그레이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일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내성에 있는 이들을 빈정거리던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일면이었다.
복도에서 홀로 기사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이미 죽음의 각오가 깃들어져 있었다.

‘…기사로군.’

모런 뎀프시는 그 희생정신에 감탄하면서도 약간 불쾌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기사 교육을 받으며 자라 온 그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정상적인 여색을 탐하는 그보다,
자신의 죽을 자리를 스스로 정한 저 평민이 더욱 기사같이 보였기에.


“…유언은.”


“그리다니아에 영광을.”

“음.”


- 탁탁탁!

기사들은 그를 내버려 두고 추적을 다시 시작했다.
그의 곁에 한 명쯤  두고 간다면 벌 수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리라.
하지만 십수 명의 기사들 중 나서는 이는 없었다.

번 그레이가 희생을 결심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동등한 기사에게 죽으라 명령할 권한 따위 없었기에, 모런 뎀프시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본인도 자진에서 죽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고.

그렇게 다 떠나간 뒤.
홀로 남은 번 그레이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꽉 넣었던 주먹의 힘을 풀었다.



*




- 드르릉…


멋들어진 알현실의 가장 깊은 곳.
구조상 꽉 막혔으리라 생각되었던 왕좌의 바로 뒤쪽의 벽은,
보드엠이 왕좌의 장식물  몇몇을 건드리자 일부가 갈라지며 돌아갔다.
그렇게 드러난 것은 하나의 문이었다.

“이것이… 비밀통로…”
“입구 근처에 인기척은 없습니다. 아마 목표물이 꽤 깊은 곳까지 간 듯합니다.”

“어서 들어가지. 주어진 시간이 많이 없어. 분명 우릴 쫓아오는 이들이 있으니.”

비밀 통로를 열었을  난 소리는 크지 않았다.
보드엠을 비롯한 기사들이 하나둘 비밀통로로 진입했을 때.
그들의 뒤로 접근하는 이가  명 있었다.

- 스릉!


“멈춰!”
“누구냐!”


“잠깐.”

보드엠이 금방이라도 칼을 내지르려는 기사들을 제지했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가면 속 두 눈동자가 이방자의 모습을 흩었다.


“접니다. 2 왕자님.”


“…용병?”

검은 머리와 검은 동공을 가진 남자였기에 몇 번의 만남에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용병들을 선동하라는 어려운 의뢰도 멋들어진 상황을 연출하며 쉽사리 성공해낸 용병.
박찬영이었다.

“일이 급합니다. 왕자님, 우선 가시면서 이야기하시죠.”


“…그래. 다들 서둘러 움직여라!”


“허. 왕국의 명운이 달린 대계를 치르는데, 용병이 합류한다니…”
“으음… 용병과 신뢰는 단어 사이에 거리감이 너무…”

항상 군말 없이 보드엠의 의견을 따르는 이들이었지만, 곳곳에서 걱정 어린
도리어 그리 충성심이 높은 이들이었기에 이 정도 선에 그친 것이다.
그들은 박찬영과 초면이 대부분이었으니.
게다가 동양인이라는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한몫했다.

“왕자님. 이 자는 돈에 목숨을 파는 용병입니다. 왕실 측에 매수되었을 수도 있음을 고려하셔야…”


“아니, 이 사내는 좀 다르다. 용병을 대표하여 과인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내려받은 자이니. 믿을 수 있는 아군이다.”

오늘의 계획을 꽤나 깊숙한 곳까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기사들은 눈앞의 남자가 적어도 첩자는 아니란 걸 믿을 수 있었다.
첩자라면 진작에 배신했을 테니까.

어느 정도 반발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보드엠은 비밀 통로를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들 역시 화들짝 놀라 그의 사방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건 박찬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보드엠 왕자의 곁에 따라붙었다.
용병이 너무 가까이 붙는 걸 경계한 기사에게 제지당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했지만.

- 탁탁탁!!

“자네는 어떻게 이곳에 왔지?”


“내성으로 향하시는  발견했습니다. 제가 눈이 좀 좋아서.”


“…잘 믿기진 않는군.”

“아! 그리고 저희를 뒤쫓는 자들이 늦게 따라잡도록 수를 썼습니다. 아마 10분가량은 더 벌지 않았나 싶네요.”

“…흠? 거짓 없는 진실인가?”


- 끄덕.


어떻게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다른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어째서 자신들을 따라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별동대를 직접 이끄신다는 건 아마 국왕이나 1 왕자를 잡으러 간다는 뜻이고…  추적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같은 감이 와서요.”


“자네는 용병이고, 과인의 측근들은 모두 기사야. 하나하나 자네보다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지.”


“무력 말고도 도움이 될 방법은 많죠. 가령…”


- 터억!

“억! 놈!! 역시 이럴 줄… 어라?”

순간, 사내가 가장 선두의  기사의 몸을 손으로 막아섰다.
돌변하여 공격하는 줄 알고 기사가 반격하려 했지만,
용병의 목적은 그저 기사의 발을 멈추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기사는 자신의 움직임을 막아서려는 물리력에 대해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용병의 힘에 기사의 발은 멈추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인…!!”

“아까 제 눈은 꽤 좋다 말했죠?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함정인지 모를 수상한 것들을 미리 발견해  수 있습니다.”


“…뭐?”

그 말에 기사는 사내의 시선을 따라 발밑을 보았다.
그러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묘하게 어긋난 타일이 보였다.
앞으로  걸음만  디뎠다면 분명 저 타일을 밟았으리라.
그제야 기사는 가능성  가지를 떠올릴  있었다.


“…함정?”


사내는  어긋난 바닥 타일이 함정인지 알지 못한다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기사를 멈춰 세운 사내는 저 타일이 함정이라 확정 짓고 있었다.

“…선왕께서는 분명 이 비밀 통로에는 함정이 없다 하셨는데…”

“그럼 현 국왕이 몰래 설치한 것이겠지요.”

보드엠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저 타일이 함정이 맞다면…
그들의 추적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비밀 통로에 함정이 한 개밖에 있을 리 없으니까.

“어쩔 수 없군. 전원 속도를 늦춰! 발밑을 주의 깊게 살피고, 수상한 것은 절대 건들지 마라!”

“아니요. 함정은 방금처럼 제가 찾겠습니다.  정도 속도로 달린다면, 제 눈이 함정을 먼저 발견할 수 있으니.”

보드엠은 살짝 황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남자의 대답은 오만했기 때문이다.

“…자네 눈 하나에 우리 전부의 목숨을 맡기라는 뜻인가?”

“달라지지 않았네요.”


“음? 무슨 소리지?”


“이미 지난  제게 계획을 설명해주셨을 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을 맡긴 것 아니었습니까?”


곧 왕이 될 자를 눈앞에  사내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다.
계획이 실행되기 전까지 사내가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했다면?
보드엠은 이미 지금쯤 목이 효수되어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면…
정말로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하하하! 그래. 달라지지 않았군. 자신은 있겠지?”

“왕자님뿐만이 아니라,  역시 목숨을 걸었습니다."

“좋아! 그럼 부탁하지!”


탁탁탁!

이후 이리저리 꺾인 비밀 통로를 달린  한참이나 지났을 때.
보드엠은 박찬영을 믿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단 하나의 함정조차 놓치지 않은 채 발견해 내었으니까.


덕분에 추적 속도는 줄지 않았다.
운동이라곤 해본  없고,
식욕을 이기지 못해 군살이 이곳저곳 들어찼으며,
머리가 희게 셀 정도로 늙은 목표물을 따라잡는 건…
건장한 사내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보입니다.”

“보인다면… …그래. 따라잡았군.”

여태 증명했듯 눈이 좋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가장 먼저 목표를 발견한 건 박찬영이었다.
그다음은 기사.
마지막이 눈이 별로 좋지 않은 보드엠이었다.

 가면 너머 똑똑히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풍채 좋은 등판이.
달리 말해 뒤뚱거리며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는 추악한 기생충을.


- 탁탁탁!

“더 이상 등을 돌린  도망치지 마시오! 그대가 스스로를 이 나라의 지아비라 여기고 있다면!”


뒤에서부터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달리던 국왕이 멈추어 섰다.
그를 멈춰 세운 목소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결국…
왕은 몸을 돌려 자신의 혈육을 마주했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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