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 탁탁탁!
전황이 명백하게 아군의 손을 들어주고 있을 때.
나는 보드엠 왕자가 십여 명의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왕성 깊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나설 정도로 중요한 일.
그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놓쳐선 안 될 놈들을 직접 잡으러 가나 보네. 그것도 직접.’
마시던 힐링 포션을 전부 목 뒤로 넘긴 뒤, 나 역시 전선에서 슬며시 이탈했다.
하드모드 퀘스트 내용은 왕성 내부에 있는 적대 왕족 및 귀족을 놓쳐선 안 된다고 했다.
또한 보드엠이 죽는 순간 모든 노력이 공허로 돌아간다.
변수의 제거.
혹시 모를 불상사의 방지를 위해선 반드시 그의 뒤를 따라갈 필요가 있었다.
“파계승? 슬슬 빠지게?”
- 채앵! 챙! 푸욱…
“이,이놈들! 네놈들에게 명예라곤 없는 건가! 비겁하게 여럿이서 덤비지 말고 한 명씩… 컥…!!”
“비겁은 개뿔.”
후열로 물러서는 나를 발견한 자넷이 부단장과 함께 기사를 사냥하며 말했다.
나는 목덜미를 지켜주는 견갑의 틈에 깊게 박힌 칼을 빼내려 발버둥 치는 기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투구의 눈구멍 사이.
공포에 질린 동공이 읽혔다.
“퉷. 괜한 동정심 주지 마. 변방 귀족가에 있는 기사라면 몰라도, 왕실 기사 놈들은 무조건 한 번 이상 어린애한테 손을 댔으니까. 시발놈들. 죽어도 싸지.”
“제가 손수 죽인 놈들만 몇인데 갑작스럽게 동정을 하겠습니까?”
“…그,그러네.”
넌 기사도 이길 정도로 존나 쎄지?, 자넷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단독으로 기사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나 보다.
- 꾸벅.
왕실 기사는 아직 두 발로 서 있었다.
하지만 반항 의지를 잃었으며, 죽기까지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리 판단한 듯, 부단장이 나와 자넷을 슬쩍 보고는 전선의 다른 동료들을 도우러 사라졌다.
여전히 강하면서도 과묵한 인간이다.
나는 부단장과 자넷이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 파악! 퍽, 우드득!
“끄륽!……”
죽어가는 기사를 밀어 차 넘어뜨린 다음, 칼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치며 기사의 목뼈를 확실하게 끊어주었다.
어두컴컴한 감정을 띠던 동공이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확인 사살도 필요 없는 즉사.
명예를 잃은 기사는 마지막 순간 명예를 울부짖으며 죽었다.
“휘유… 잔혹하네.”
- 스윽.
자넷이 투구를 벗으며 크게 숨을 돌렸다.
안쪽이 엄청 후덥지근했나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자넷으로부터 뜨끈하면서도 꿉꿉한 공기가 밀려온다.
‘역시, 투구를 안 쓰길 잘했네.’
평범한 인간의 체온만으로 저리 열이 오른다.
혈귀화를 쓰면 체온이 팍 올라가는 내가 투구까지 쓴다면 차오른 열기가 빠져나갈 수 없다.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이 이성을 유지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자연 치유의 덕에 그 부작용이 덜하겠지만, 자칫하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아직 이 스킬을 100% 제어 하에 두었다고 장담을 할 수 없는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뭐. 뭘 봐.”
“…땀 냄새.”
“야!! 여기 전장이다? 뒤통수에 칼 맞고 싶어?!”
자넷이 땀에 젖어 볼에 달라붙은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나를 위협했다.
신경 쓰이긴 하는지 내게서 한걸음 물러나며.
“싸,싸우는데 땀을 어떻게 안 흘려? 어? 봐봐! 너도 땀을 흘렸잖… 어라? 뭐야?… 넌 왜 땀을 거의 안 흘렸냐?…”
“큭큭! 땀 냄새는 당연히 농담입니다. 그리고 전 쉽게 안 지치는 체질이라서요?”
- 스릉.
“…치사한 새끼. 너 땀 안 나서 좋겠다.”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의 목에 박힌 그녀의 칼을 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왕 주는 것, 칼끝에 묻은 피를 좀 닦아서.
자넷은 나를 째려보면서도 마지못해 칼을 받았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시체가 된 기사에게로 향했다.
목이 꺾여서 안 될 각도로 꺾여 있었다.
내가 손수 즉사를 안겨준 것이다.
“…배려야?”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죗값을 받아 내는 것도 좋지만, 슬슬 피곤해서요. 고통스런 비명은 이미 제 손으로 쥐어 짜내기도 했고…”
저 멀리 조용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보드엠과 그의 기사를 보며 말했다.
내 시선이 후열을 향하자, 자넷은 내가 전선에서 빠져 휴식을 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한듯했다.
사실 그런 의미로 이해하라고 한 언행이 맞다.
“넌…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치고 너무 날뛰기는 했지. 제 몫을 채우다 못해 넘치게 하기도 했고. 무리하지 말고 쉬어.”
“고마워요. 그럼 뒤는 맡길게요. 단장.”
“잠깐!”
그렇게 사라지기 직전.
자넷이 살짝 망설이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그녀가 물어온 질문은 정말 엉뚱한 것이었다.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근데 있잖아… 좀 뜬금없을 수도 있는데, 아니. 뜬금없는 게 맞는데… 으…”
“뭘 그리 질질 끄시나요? 답지 않게. 그냥 편하게 물어보세요.”
“크흠… 그렇게 말해 준다면. 크,크리스는… 음… 인간이야?”
“…네?”
“아니, 그… 요정족이나 그런 게 아닌가 해서.”
크리스가 요정?
자넷의 표정은 농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름 진지하게 묻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연인끼리 하는 애정 표현의 의미에서 ‘요정 같이 느껴진다’라 묻는다면…
…아무리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는 못할 것 같다.
요정처럼 아름답다고 말하기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요정의 이미지와 크리스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요정은 시비 거는 사람의 몸을 바닥에 처박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 앞에서는 한없이 여리게 보이려 노력하나,
가끔 자넷을 포함한 타인에게 본래의 거친 성격의 편린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화를 내다가도 내 시선이 있음을 깨닫자 순식간에 표정을 풀고 천생 여자인 척을 연기하지만.
솔직히, 내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모르는 척 속아주고 있었다.
자넷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둘은 같은 성별이니 여관방을 자주 공유하지 않나요? 게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친해지기도 했고.”
“으음…! 그,그러려나? 큼!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단장님도 크리스에 대해 완전히 모르지는 않겠네요. 그런데 평소 그녀가 요정처럼 느껴졌나요? 잡담하거나 같이 잠잘 때.”
“아니. 절대 아니지. 걔처럼 성격 불같은 요정이 어디 있어?”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인간관계에 서투른 자넷이라도,
크리스의 본래 성격이 내 옆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온순한 성격이 아니란 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왜?…”
“음… 이게 비밀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봐버렸거든.”
“봤다고요? 도대체 뭘?”
“그… 전설 속 요정처럼 휙 사라지고 휙 나타나는걸.”
자넷이 엄지손가락과 눈짓으로 한 장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장소의 바닥은 특이하게도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왕성 마법사가 화염구를 폭발시킨 곳…’
이번 전투 동안 단 한 번 있었던 마법의 흔적이었다.
“다들 걔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같지만, 나는 봤거든. 그리고 걔가 사라지자마자, 두 번째 파이어볼이 허공에 흩어진 것도.”
“으음… 그 난전 중에 보고 계셨나요? 크리스를.”
“야! 그래도 이런저런 일이 있으면서 꽤 정도 붙었는데, 걱정도 하면 안 되냐?”
자넷이 당황한 얼굴로 변명을 했다.
그녀가 크리스의 능력을 우연히 발견한 이유는, 전장에서 크리스를 챙기려 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도 누누이 자넷과 잘 지내보겠다고 말하더니…
의외로 둘은 많이 친해졌나 보다.
“큼… 아무튼 걔가 지금 마법사를 막고 있는 거지? 덕분에 이쪽 희생자가 확 줄었어.”
“비밀…까지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크리스의 능력을 막 말하고 다니지는 말아주세요. 비장의 수 비슷한 거라.”
“그건 당연하지. 괜히 지금까지 그 능력을 안 쓴 게 아니잖아?”
자넷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찌 보면 자넷이 크리스의 행적을 알게 된 것은 호재라고 볼 수 있었다.
전투가 마무리된 이후, 그녀가 탈영했다는 오명을 쓸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비록 비밀로 하기 때문에 실적에 비해 뚜렷한 보상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돈은 이미 넘치도록 있고, 작위 같은 건 필요도 없으니 상관없으려나.’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으면 챙기지 않을 이유는 없겠으나…
귀찮은 일만 피하면 당장은 만족이다.
“혹시 크리스가 돌아오면 최대한 챙겨 볼게.”
“부탁할게요. 그럼 저는…”
“어. 고생했다.”
인파 사이로 슬쩍 사라지며 기척을 줄였다.
기술적으로 줄인 것이 아니라, 고요한 발자국 스킬을 활성화 시키면서.
지금부터 할 것은 2 왕자의 미행이다.
동시에 그가 놓치는 인물을 잡거나, 암암리에 호위를 하고자 했다.
나는 본성 안쪽의 옆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저들의 뒤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
“주군. 우선 놈들이 도망치고 있을 것이 분명한 비밀 통로로 향하겠습니다.”
“아니, 왕좌가 있는 곳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보드엠의 거절에 기사들이 군말 없이 동의했다.
분명 왕좌는 이미 텅텅 비어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왕좌에 앉아보고 싶다는 때에 맞지 않는 욕구 때문이 아닌,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기에 그 장소로 향하는 것이란 굳건한 믿음이 있기에 나온 대답이었다.
보드엠은 그런 무거울 수도 있는 믿음을 당연하게 감당했다.
그리고 머리 한켠에 의문이 있을 그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곳에 직계 왕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 통로가 있다. 원래 알아야 하지만, 1 왕자조차 모르는 곳이야.”
“그럼 그곳에…”
“국왕이 도망치고 있겠지. 홀로.”
국왕은 보드엠은 물론, 후계자인 1 왕자에게까지 비밀 통로의 정보를 숨겼다.
비밀이란 홀로 알고 있어야 불상사를 방지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하지만 국왕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2 왕자 보드엠이 그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다니아의 선왕이자,
나병이라는 병에 걸려 고통받는 보드엠을 불쌍히 여긴 그의 선조부(先祖父)가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 탁탁탁!
“속도를 높인다! 통로는 왕성 밖까지 이어져 있어! 국왕만큼은 놓쳐선 안 된다!”
보드엠은 별로 높지 않은 체력으로 최선을 다하여 발을 움직였다.
몇 번 시녀와 집사를 비롯해 성 내부를 지키는 왕실 기사를 마주쳤지만…
“멈춰! 당장 정체를 밝혀라! 네놈들은 누구…”
“로터스 기사단의 단장, 볼테릭 벤턴 백작이오! 왕성을 침략한 외적의 급비 정보를 알리기 위해 알현하러 가는 중이니 어서 길을…!!”
“배,백작님?”
“진심으로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길을 내주시오! 후에 책임지기 싫으면 당장!”
“허억! 아,알겠습니다!”
가로막은 이들은 고작 몇 명 뿐이었지만,
최대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 싸우지 않고 넘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기사단의 증표를 보여주자, 마주친 기사들은 전부 길을 비켜주길 선택했다.
특히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그렇게 2 왕자 일행이 지나가고 한참 뒤.
그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잠깐. 로터스 기사단이라면 2 왕자의 최측근 아니야?”
“2 왕자라면… 아까 마나를 담아서 선전 포고를 했던?”
“…이런 시발!!”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기사들은 사라진 지 시간이 꽤 지난 그들의 뒤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뒤로 누군가가 합류했다.
마찬가지로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이들이었다.
“이,이봐! 방금 이곳을 지나간 기사단 무리가…”
“젠장! 이곳도 늦었나! 빨리 쫓아가!!”
속은 기사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열은 넘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