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복부가 뜨거웠다.
아니, 차가웠다.
뱃속으로 파고든 칼날의 냉기는 뜨거워진 로저의 몸을 식혀주었다.
‘아… 하하… 하…’
주마등이 스쳤다.
몇 가지 기억이.
순식간에 로저의 머릿속에 파고든다.
주마등.
주마등이…
“단장!”
“이런 시발!…”
현실로 일깨워 준 것은 경악에 찬 단원들의 목소리였다.
로저는 현재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차분히 확인했고,
이내 자신이 허탈하면서도 괴로운 미소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로저는 투구에 가려져 타인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 감사했다.
분명 너무나도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까.
“크읍…”
- 파악!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우선 발리에르가 칼날을 더 깊숙이 박아넣기 전에 반격을 시도했다.
로저의 칼날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지만, 뱃속에 박힌 칼을 빼내도록 유도하는 건 성공했다.
“…겉모습만 기사를 모방한 것이 아니었군… 제대로 마법이 인챈트 된 판금 갑옷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구했지?”
발리에르는 칼자루에서 느껴졌던 강력한 반발력에 미간을 찌푸렸다.
배를 뚫는 것을 넘어서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했어야 할 일격이다.
그러나 관통은커녕, 고작 배에 구멍을 뚫는 것에 그쳤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판금 갑옷은 제값을 톡톡히 해내었다.
바위는 물론 강철도 무리 없이 가르는 칼날의 전진을 억제했으니까.
하지만 구멍이 나서는 안 되는 부위에 구멍이 나버렸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흡… 거 정신이 번쩍 드네.’
로저가 복부 쪽 판갑을 무척이나 강하게 누르며 출혈을 억눌렀다.
고통스럽지만…
고통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수백의 상흔은 장식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창자가 끊기는 그 고통에 냉정을 찾은 것만 같았다.
“길드장님! 아직 안뒤졌수?”
“카아악. 퉷. 끄윽 시벌. 뒤지기 직전이다.”
폐는 다치지 않아 가래에 피는 섞이지 않았다.
아직 내출혈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 스릉.
“허…? 배를 뚫리고도 그리 자유롭게 움직여?”
로저는 칼자루에 힘을 주고 발리에를 향해 겨누었다.
이 정도의 부상으론 움직임에 제약을 주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면서 오는 통증에 겁먹고 움츠러들기에는 로저의 삶이 너무나 거칠었다.
‘뱃가죽에 구멍이라… 비싸게 치렀구먼. 정신을 차린 값.’
한줄기 기적과도 같은 희망과 성큼 다가온 목숨의 위기를 저울질하느라 흐려졌던 이성.
방금의 고통으로 순식간에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칼에 찔린 이후 되려 잃었던 기세가 살아났다고 할 정도.
“길드장 로저. 칼을 놓고 포기하게. 내 하나의 자비로 고통 없이 끝내주리라 약속하지.”
“이봐 개자식. 내 별명이 뭔 줄 알아?”
“…그래. 그랬지. 자네가 쉽게 죽어주지 않을 거란 건 알겠네.”
- 스릉.
발리에르가 빈틈없는 자세를 취하며 칼을 로저에게 겨누었다.
칼끝에는 선혈이 묻어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주는 걸 거부하지 않길 잘했군.’
로저는 품을 뒤져서 병 하나를 꺼냈다.
2 왕자가 중요 인물인 로저에게 챙겨준 포션이다.
왕좌 탈취에 대한 지원은, 단순히 무기와 갑옷으로 그치지 않고 수많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는 포션과 마법 스크롤 같은 소모품의 종류도 있었다.
- 꿀꺽.
“포션? 그것도 중급? 어떻게 용병 따위가…”
“끄흐… 이거 너네 기사단이 빼돌려서 나한테 팔아먹던데?”
“…추잡하기 그지없는 짓! 안 통한다!”
거짓이 분명한 도발임을 안다.
하지만 그의 기사단이 횡령을 일삼는다 모욕받자 화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굳이 참을 필요가 있을까?
발리에르는 칼날을 쏘아내며 선공을 취했다.
- 채앵. 챙!
“큭큭. 안 통하긴 개뿔.”
“허억?”
발리에르가 기겁하며 칼날을 회수해 자신의 목으로 쏘아지는 칼날을 쳐내었다.
또 그 공격이었다.
동귀어진의 수.
분명 이유가 있어 사용하지 못하리라 여겼는데…
어째선지 로저는 그가 가진 까다로운 검술을 되찾았다.
- 챙! 채앵! 챙!
“큭!…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군. 왜 그 검술을 쓰다 말 다 하는 것이지?”
“선택했거든.”
로저는 갑작스럽게 공격을 멈추었다.
자연스럽게 방어만 하던 발리에르의 칼 역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는 난전이 일어난 주변과 달리 잠깐의 정적이 발생했다.
“선택…?”
“건방지지 않냐? 내 주제에 모든 것을 챙겨 들려 했다니. 나 같은 놈은 주제에 맞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지. 그래야 하나라도 건질 테니까.”
발리에르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럽게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무언가를 비웃은 로저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전부 챙기려고 한 발리에르 백작.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내가 모든 것을 챙기려 했다?”
“가문의 부흥과 기사의 명예. 귄력, 돈, 인맥… 그 밖에 많이 있잖아? 네게 필요한 거나, 소중한 것.”
로저의 말대로 발리에르는 모든 것을 챙기려 노력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로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무엇이 잘못되었지? 비록 방식이 추악함을 인정하나, 능력이 되는 한 시도는 해야 옳다!”
“큭큭. 야 시발, 내가 하나만 물어보자. 노력했을 때 노력한 만큼 전부 보상받는 기분은 어떤 기분이냐?”
로저가 비꼬듯이 그리 물었다.
발리에르는 심성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스스로 평가하길, 자신의 노력은 누군가 폄하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발리에르는 격정을 내기보다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노력을 하지 않은 이가 자신을 비꼬는 것은 절대 참지 않으리라.
하지만 발리에르로서는 도저히 그가 노력하지 않았다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갑옷과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상흔이 몸에 새겨져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어렴풋 로저의 사정을 알게 된 발리에르는 그의 노력이 보답받았는지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심지어 저 망가진 삶의 원흉인 본인은 더더욱 그의 삶을 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포기한 것이 있어. 당장 본 가문의 명예는…”
“닥쳐! 이 개새끼야! 포기를 한다는 건, 가문에 명예처럼 시간이 흐르면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너…”
얼굴을 가린 투구 속 눈동자.
발리에르는 로저의 눈에 담긴 감정에 당황했다.
그건 익숙히 보아오던 분노나 증오가 아닌, 보는 이의 가슴마저 울리게 만드는 짙은 슬픔이었다.
“상실한 걸 다시 찾을 수 있는데 그게 왜 포기야… 그냥… 먼 미래로 미룬 거지…”
“……”
도저히 짧다고 말하지 못할 인생을 살아오며 가장 몸에 새겨진 것은 ‘포기하는 법’이었다.
딸의 행방을 찾아 헤맨 지 한 달이 지나 그 실마리를 잡았을 때, 그녀가 살아있으리란 희망을 포기해야 했다.
이날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으리란 걸 받아들였다.
쇠갈퀴를 쥐던 손으로 칼자루를 잡으며 복수를 다짐했을 때, 딸과의 모든 추억이 깃든 고향 집을 포기해야 했다.
이날 언젠가 머릿속에서 딸의 얼굴이 잊힐 거란 걸 받아들였다.
용병 단장이란 직책에 대한 진실을 깨달았을 때, 마침내 복수마저 포기해야 했다.
이날 로저는…
“푸흐흐… 아니, 이제 내겐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나… 그래. 없고 말고.”
“자격?”
“아무튼! 나는 너랑 달리 기사도, 영웅도, 대단한 무언도 아니었거든. 그냥 평민. 그것도 천한 용병이다.”
“알긴 하는군.”
“그러니까… 내가 너처럼 모든 것을 챙기려 든다면, 그건 주제도 모르는 오만한 짓. 오히려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놓친단 말이지?”
- 스윽.
로저가 발리에르에게 곧게 겨눈 칼날을 내렸다.
그리고 검면을 자신의 몸체 쪽으로 세워 가렸다.
아까 보았던 자세.
죽는 것에 겁을 먹은, 명백히 방어에 치중된 자세다.
“그래서 이번에도 둘 중 하나는 포기하려고. 지금까지 했던 대로.”
“항복하겠다는 뜻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공격을 기다리듯 조용히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
발리에르는 로저의 상태를 천천히 흩어보았다.
크고 작은 빈틈 몇 가지가 눈에 보이는 방어 자세.
의도적으로 보이는 빈틈은 절대 아니다.
‘딱 파악한 수준 안에서 보일 정도의 빈틈이군. 일단 함정은 아니다.’
배에 구멍을 내주기 직전에 봤던 자세와 같았다.
선명한 눈빛을 보면 그때의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 같기는 하나…
결과적으론 시간을 끌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자세다.
부상당한 몸으론 고작 열합도 못 견딜 텐데.
“…그 복부의 부상. 이젠 고통을 줄여주마. 나 역시 너를 안쓰럽게 여기니, 오늘 너희가 쌓은 죄는 그 목을 침으로써 전부 잊어주지.”
“……”
“오늘 반역에 관여하지 않은 하늘 산맥 용병의 선처를 부탁드려본다는 뜻이다. 그래 봐야 평생을 감옥에서 썩겠지만… 반역자의 친인, 그 죄인의 목숨을 붙여주는 나의 자비에 감사하도록!”
발리에르가 바닥을 크게 박차고 파고들었다.
로저가 겨우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 채앵!
첫 공격은 견제.
동귀어진 수가 나오면 언제든 회수가 가능할 정도로 힘을 푼 공격이다.
로저는 이를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막았다.
- 챙!
두 번째 공격은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해 전력을 담은 척을 하는 베기.
하지만 혹시 모를 극단적인 공격을 대비한 허초다.
로저는 칼날을 슬쩍 막아가며 ‘소극적인’ 반격을 보였다.
- 채앵!!
세 번째 검격은 애송이나 할법한 반격을 쳐내는 것에 사용되었다.
확실하게 검에 실린 속도와 힘이 강해졌다.
두꺼운 굳은살이 박힌 로저의 손바닥이 작게 찢어졌으니까.
- 후욱!
검이 쳐내져 열린 로저의 가슴을 향해 칼날이 찔러 들어온다.
이대로 있으면 단순히 구멍 수준이 아닌, 제대로 내장을 헤집는 꼬챙이 신세가 되리라.
다시 말해 동귀어진을 노리기 절호의 기회.
물론 로저는 칼날을 별 어려움 없이 피했다.
허점을 찔러 들어 오는 치명적인 공격치고는 칼에 실린 힘과 속도가 확연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귀어진에 대한 의심을 아직 풀지 않은 발리에르의 경계였다.
- 챙! 채앵!!
다섯, 여섯 번째부터가 진짜였다.
발리에르도 나름의 확신을 얻은 것이다.
방금 더 없을 기회에서 공격하지 않은 로저를 본 뒤.
- 챙!! 카각…!!
이전에 실린 힘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힘과 속도로 로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칼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빈틈으로 파고들었고,
칼끝이 판금 갑옷을 긁으며 지나갈 정도로 위험했다.
로저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아직 극단적으로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수 한수 소소한 이득을 보며 상대를 옭아매는 보편적인 검술을 사용하는 발리에르.
이런 패도적이지 않은 검술은 상대를 순식간에 끝장내기보다는,
선택지를 하나씩 제거하여 손해를 강요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 휙!!
그렇게 발리에르는 한 번 더 공세를 이어갔다.
마치 레시피에 적힌 순서대로 요리하듯 로저를 압박해 나가기 위한 검격을.
견제를 담은 칼날이 로저의 명치를 향한다.
애초에 막거나 피하라고 준 검격이다.
그리해도 이득을 보니까.
하지만…
- 푸욱!!
“헛?”
로저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칼날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배를 내주며 칼날에 몸을 맡겼다.
그 사실에 당혹감을 느낀 발리에르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온몸을 흩는 것을 느꼈다.
“잠깐 설…”
- 턱! 푸욱!
“끄억…?”
불안함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놓기 직전.
로저의 손이 그의 손등을 우겨 쥐었다.
그리고 발리에르의 심장은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원래라면 자신의 명치로 향하는 칼을 막았어야 할 칼날에 의해서.
“끅… 꺽…!”
“쿨럭… 큽. 푸흐흐…”
폐까지 칼날에 꿰뚫린 둘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허나 한쪽은 경악에 입 끝이 부들거리며 떨었고, 한쪽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주구운!!”
“백작님이, 영주님이 당했다!!”
“흐어억…!! 포,포션이! 하지만 저 위치는 심장… 인… 데…”
“…끝났군. 끝났어… 발리에르는… 마지막 핏줄이 끊겨버렸어…”
“일단 가져와! 가지고 있는 포션 전부 모아 와!!”
“대장!! 젠장, 젠장, 젠장!”
“단장님?…”
“시발 저거… 저거…”
“빨리 튀어가!!”
- 탁탁탁!!
두 무리가 각자의 우두머리를 챙겼다.
여태 이곳을 주시하며 싸움을 하고 있던 용병단과 기사들이 둘에게 벌어진 일에 크게 경악했다.
불사신 로저와 발리에르 백작.
모두 자신 쪽의 리더가 이길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의 싸움은 양측 모두 최악의 결과를 불러버렸다.
“쿨럭… 꺼흡… 콜록… 으, 시발, 숨 막히네… 콜록…”
“갑옷 벗겨서 포션부터! 그 전에 칼 뽑으면 안 돼!”
“눈 봐! 내 눈 봐 단장!”
“피곤해도 정신을 잃지 마! 호흡 유지하고, 졸리면 단장이 아끼던 자넷 생각해서 정신 똑바로 차려!”
“크하핫!! 콜록! 쿨럭! 자넷! 프흡! 야, 너 말 잘했… 쿨럭쿨럭…”
“시발. 입에서 피가 끓는… 이거 폐가 갔다는 뜻이지?”
“…포션부터 먹여.”
“집어치워. 쿨럭. 늦었으,니까. 콜록!… 근데 내가 사실, 안 죽으려고, 했거든? 시발 그래도 저 새끼… 쿨럭! 죽이는 것보다, 흡… 혹시 딸내미 보려고 했는데.”
“단장! 제발 말 좀 하지 말아봐!”
“개시발, 누가 이 꼴통 새끼 입 좀 틀어막아!”
“안됩니다. 뒤지면 죽여버릴 겁니다. 단장님…!”
주변의 동료들은 로저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심장은 다치지 않았지만, 상처 부위가 심장과 너무나 가까웠다.
칼을 뽑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출혈이 시작되리라.
아니, 이미 상하면 안 될 장기가 너무나 상해버렸다.
모두들 머릿속에 한가지의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죽음.
“큭큭. 야. 콜록콜록… 시발, 내 딸, 쿨럭! 살아 있을 수도, 있단다…”
“예? 그럼 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동귀어진을…”
“믿을게요. 믿을 테니까, 일단 이 포션부터 마시세요!”
“시발 그런데, 면목이 없더라. 쿨럭. 딸내미 볼, 큭큭. 면목이.”
“대장이 부족한 게 뭐가 있나요!”
“단장님이 노력한 건 저희 하늘 산맥 전원이 알고 있습니다. 제발, 그러니까…”
“그 누구보다 딸을 위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단장님입니다!”
“큭큭큭…”
피가래가 끓는 허탈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로저는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하늘 산맥 전원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턱!
“내가 처음 배를 뚫렸을 때, 주마등이 하나 스치더라. 그때 떠오른 사람이, 누군지, 예상이 가?”
로저의 손이 부단장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최대한 기침을 억누르고 힘을 담아 또박또박 말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 처절함에, 부단장은 애써 모를 불안함을 느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딸입니까?”
“푸하하!! 아니! 자넷이야! 내 딸이 아닌, 혼자 남겨질 자넷을 먼저 걱정했다고. 저 새끼에게 납치당해서 몹쓸 짓 당한 딸보다! 내가! 아비인 내가!! 자넷을, 더, 걱정해버렸다고…!!”
십수 년 동안 복수를 갈망해왔다.
하지만 주마등에 스친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고 복수를 울부짖던 딸이 아니었다.
자넷이었다.
로저를 잃고 슬퍼할 것이 분명한 자넷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로저의 머릿속을 채워버렸다.
10여 년 전 이후 메말라버린 로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지, 자신의 딸을 향한 죄책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면목이, 없더라. 푸흐… 난, 자격이 없어, 내 딸을 볼, 자격이…”
“……”
“그러니까, 내가, 딱 할 수 있는 거. 저 새끼, 복수라도 해줘야지. 나의 첫 번째가 딸이 아니라면, 적어도 나의 마지막은. 마지막만큼은 내 딸이 되게 해줘야지. 안 그러냐?”
“…단장…”
“내 선택이니 후회는… 콜록! 콜록콜록! 끅…”
- 울컥!
“단장!”
“젠장, 시발 기도에서 피 빼내!”
“흑… 시발… 흐윽…”
“쿨럭! 쿨럭쿨럭!”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을 직감한 로저는 재빠르게 가장 해야 할 말을 뱉기 시작했다.
“자넷. 큭큭… 그 얼빵이 잘 부탁 하고, 내 딸, 베르테스. 혹시 살아 있으면… 내 삶은 전부 비밀로… 해줘. 그냥, 복수했다고만. 그래. 그것만.”
“…알겠습니다.”
“잠깐! 그건 너무 심한…”
“입 닥치고 들어. 저게,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명령이니까.”
“아… 그러고 보면… 20년 만에 보겠네… 흐… 여전히, 암청색… 아름답소… 데이……”
말끝은 흐려졌다.
습기로 얼룩진 로저의 눈이 편안하게 감겼다.
그의 마지막을 함께한 단원들의 눈도 짧게 감겼다.
기울던 노을이 결국 완전히 졌다.
세상에 새까만 밤이 찾아오고,
로저의 위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시 밝아오지 않을 어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