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 챙! 채앵!
이성을 잃은 연격이 반복되었다.
전성기의 그가 항상 써왔던,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
뼈를 주고 뼈를 취한다.
아니, 뼈를 주더라도 살을 취한다.
그런 광기가 담긴 공격이 발리에르를 압박했다.
“이런! 미,미치광이인가…!!”
내뻗는 칼끝을 피하지 않고 이마로 들이받으려는 로저의 행동에 기겁한 발리에르가 칼을 회수했다.
머리를 꿰뚫은 뒤, 그의 칼날에 자신의 배가 갈라질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우선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회수한 칼로 급하게 자신의 배를 가르려 오는 칼날을 쳐내었다.
- 채앵!!
발리에르의 자세가 크게 틀어지며 호흡을 잃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저가 달려든다.
별로 강하지 않은 일격.
그닥 빠르지 않은 칼날.
깊은 뜻이 담기지 않은 검술.
로저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은 없으리라.
- 챙! 채앵!! 챙!!
“발리에르으으!!”
“놈!!”
방금의 자살에 가까운 공격은 우연이 아니었다.
발리에르에게 날아드는 공격 하나하나가 죽기 전의 최후의 공격인 것 마냥 절박했으니까.
로저는 발리에르와 동귀어진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오른팔이 떨어지면 왼손으로 칼을 들 것이다.
왼팔마저 떨어지면 입으로 칼을 물것이다.
그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목을 끊는 것이 유일했다.
‘이놈은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건가?’
호기롭게 참전을 외쳤지만, 상대해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난적에 발리에르의 등이 땀으로 젖었다.
그가 평생을 배운 검술이 의미가 없었다.
공간을 점하고, 공격이 불가능하도록 압박하는 기술.
그 모든 것이 이 남자에겐 무의미했다.
그야말로 아귀(餓鬼)와도 같은 모습.
그에 반해 자신의 사지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 하는 발리에르로써는 족족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극단적으로 치우친 공격성.
발리에르도 왕국민이기에, 익히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기사가 아니었군!! 용병 길드장이었나!!”
“로저다. 니새끼의 목을 가져갈 평민이니, 똑똑히 머리에 박아 넣도로옥!!”
- 채애앵!!!
다시 짓이 겨드는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았다.
힘도 기술도 발리에르의 한참 하수였다.
이런 살의만이 담긴 공격에 대한 방어는 너무나 손쉬웠다.
허나, 발리에르가 저 수많은 빈틈을 찔러 반격을 하려는 순간…
정말로 ‘위험한’ 공격이 날라 드려라.
차라리 이대로 무한히 방어하는 것이 옳았다.
전성기가 훌쩍 지나 나이를 먹은 그의 체력이 다할 때까지.
사실 발리에르 역시 꽤 나이를 먹었지만, 기사 가문의 직계 마나 호흡법을 익히고 있으므로 노화가 더뎠다.
40에 가까운 실제 나이에 비해 외견은 고작 20대 후반.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 겪은 로저보다 월등한 체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이 공격당한다!!”
“홀로 돌진해온 저 불나방을 죽여라!”
“어리석은 놈!”
“잠깐… 다,단장?”
“쌈박질에 끼어들지 않기는 개뿔! 내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지!”
“젠장! 뭐해! 어서 가서 도와!”
여럿이 뭉쳐서 천천히 기사를 몰아붙이던 용병들은 기겁했다.
그들보다 훨씬 선두에서 포위당하기 직전의 로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 둘의 결투에는 손을 보태주지는 못하나, 적어도 둘 사이에 끼어들려는 기사단을 막아야 한다.
허겁지겁 로저의 곁으로 용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창 맞붙던 발리에르와 로저의 주위에 들불이 번지듯 전투가 일었다.
그러나 어느 집단도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였다.
용병 쪽은 압도적인 수가 주는 이점을 잃었기에 신중히 공방을 나누었고,
기사 쪽은 판금 갑옷을 입은 저들이 용병이란 걸 아직 알아채지 못했기에 견제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이유지만,
결판이 나지 않는 건 대장끼리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발리에르에게는 좋지 않은 이야기였다.
분노에 눈이 돌아간 로저의 입에서 그의 치부가 하나씩 들춰졌기 때문이다.
“개자식!! 여아를 팔아 가면서까지 가문의 크기를 키우니 좋더냐!!”
“무,무슨 소리를…”
“뻔뻔한 새… 아하! 주변에 네 기사단이 있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큭큭큭.”
로저가 증오 어린 시선으로 주변의 기사들을 흩었다.
그의 말대로 발리에르는 자신의 치부를 기사단에게 꼭꼭 숨기고 있었다.
가문에 종속된 수많은 가신.
특히나 기사들의 시선에서만큼은 언제까지나 제 실력을 갈고닦는 것에만 집중하는 ‘진짜 기사’로 남기를 원했기에.
로저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원수를 앞에 두고 웃음을 지은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발리에르는 무엇을 가장 싫어할까?
당연히 로저가 아는 사실을 다들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읊는 것이다.
“기사의 모범 발리에르! 여타 귀족답지 않게 역겨운 ‘취미’도 가지지 않고, 기사 가문의 가주답게 검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뛰어난 정치 능력으로 고위 귀족의 지원을 받아낸 인재! 그것이… 네 기사단이 아는 발리에르란 귀족이겠지. 안 그런가?”
“하! 네놈 따위한테 그런 말을 들은들 전혀…”
“네가 기사의 모범이라고? 무력과 정치, 문무를 겸비한 천재? 하하하!!! 개소리! 그 실체는 고위 귀족에게 납치한 어린아이를 제공하는 노예 상인 주제에…! 가면을 벗어라 이 추악한 새끼야!!”
“노옴!! 그 입 닫아라!!”
- 채앵!!
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발리에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 노예 상인이라니 그게 무슨…
- 영주님이… 어린아이를?
- 말도 안 되는 소리! 주군이 하나 가지신 취미는 검술을 갈고 닦는 것뿐이었다!
- …그건 알지만…
로저의 말에 용병을 견제하던 기사단 전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항상 청렴하고 올곧은 주군을 모신다며 자부하던 이들이었다.
당연히 이름 모를 기사보다 자신의 주군을 신뢰하는 이들이었지만…
거짓으로 가득 찬 것이 분명한 도발에, 과민 반응하는 발리에르를 보고 의심의 씨앗이 싹튼 건 어찌할 수 없었다.
“큭큭… 네 상황이 골치 아팠던 건 알고 있어.”
“고작 용병 따위가 무얼 안다고!”
“기사 가문을 유지하는 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한 일이지만 매달이 적자지, 바로 옆에 붙은 적대 영지도 하필 기사 가문이라 네 영지를 위협하지…”
“뭣…”
“눈 딱 감고 어린애 납치해서 접대 좀 하면 싹 다 해결되는데, 안 그래?”
“네… 놈…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실제로 발리에르는 소아 성애를 즐기지 않았다.
그저, 제공만을 했을 뿐.
너무나 추악하고 더러운 일이라 그 어느 귀족도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무려 백작가가 손을 뻗고 나서자,
‘공급’이 무척이나 수월해졌다.
발리에르 백작령은 암암리에 즐기던 그 유행이 들불처럼 번지게 된 거대한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시발아. 안 할 수 있었잖아. 어린애 납치, 안 해도 됐잖아.”
“…평민은 절대 알지 못한다! 네가 감히 군주의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평가하는가?”
“개소리 하지 마. 내가 모를 것 같아? 사실 네 영지 그렇게까지 위태로운 수준 아니었잖아… 옆 영지랑도 적당히 타협할 수 있었고, 코딱지만 한 적자는 백 년도 감당 가능했어… 그런데… 왜 그랬냐? 어째서? 고작 10살 내외 꼬맹이들을… 너 시발 기사의 명예 같은 것도 없어?”
“………너는…”
누구도 모르고 있어야 할 사실이 로저의 입에서 나오자, 발리에르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사실 그는 이미 훨씬 전부터 당황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기사가 듣는 앞에서 로저의 말이 사실이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냉정한 상태였다면 하지 않을 실수였다.
‘벌써 10년이 넘게 지난 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집착이었다.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원수의 정보를 수집한 결과, 로저는 숨겨진 비밀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필사적으로 알아낸 사실은 무기로 쓸만한 것이 못되었다.
왕국의 권력을 잡은 이들 대부분이 발리에르의 고객이었으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터지지 않을 폭탄이었다.
그의 뒤에 있는 반 제국파 전원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에야.
“최근에는 그렇게 어린아이를 팔아 재낀 보상으로… 영지전에서 코 풀듯 승리를 받아냈다지?”
“……”
“이야! 주기적으로 애새끼 좀 상납한 것으로 옆 영지를 완전히 삼킨다고? 이거 안 하면 병신인, 존나게 수지맞는 장사네! 안 그러냐 이 개새끼야!!”
- 채앵!!
로저가 이를 갈며 칼날을 내리찍었다.
발리에르는 무척이나 절망적인 얼굴로 그 칼을 받아내었다.
칼날을 받아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이성을 찾으며 주변의 상황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의 기사들은…
방금까지 로저와 나눈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
- 서,설마… 지난 영지전 때 고위 마법사가 지원 온 이유가…
-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이었지…
- 돈까지 엄청 많이 지원받았잖아. 그, 용병을 고용하라고.
- 그 돈으로 하얀 고래 용병단을… 고용했지…?
- …젠장. 난 그래도 가주님을 믿을 거야…! 기사 중 기사로 불리던 가주님이 그러실 리 없어!
발리에르의 가면이 벗겨지며 기사들이 혼란에 잠겼다.
그 분위기를 읽은 로저는 거대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목을 자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로저는 발리에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가문. 신뢰. 명성. 생명 등등 그가 아끼는 것들을 전부.
“그 터무니없는 지원 덕분에 상대 영지 쪽에다 철사자를 붙여 준 수고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갑자기 솟아난 철사자 용병단은 네놈의 수작이었나…!”
“그저 정보를 흘린 수준이긴 하지만, 널 엿먹일 유일한 방법이었잖아?”
“반드시… 그 목을 잘라주마.”
증오에 차오른 목소리.
하지만 함부로 칼날을 내뻗지는 못했다.
로저의 눈 속 광기가 전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공격을 마음먹은 순간 망설임 없이 동귀어진하려들 것이다.
즉, 발리에르는 로저의 입을 막지 못한 채 계속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새까맣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자초한 원인으로 인해서.
- 챙! 채앵!
“네놈이 가장 역겨운 게 뭔지 아냐? 그리 어린 여자애를 납치해대면서 정작 자신의 영주민은 건들지도 않은 그 행태! 그 좆같은 자기 위로가 제일 토악질 나와! 꼴에 영주민을 아끼는 군주 행세라도 하고 싶었나?”
“크…윽…!!”
“대답해!!”
- 채앵!!
끊임없이 행해지는 정신 공격에 발리에르의 칼끝이 흔들렸다.
둘 사이에는 지닌 무력의 차이가 커다랬지만, 발리에르의 손발을 옭아매는 족쇄가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 분째 이어지는 일방적인 공격.
누가 보아도 발리에르가 밀리고 있었다.
“나는… 너의 원수인가?”
“굳이 대답을 해줘야 알 정도로 머저리냐?”
“그렇군.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것이로군…”
발리에르가 고통스럽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저 악의에 찬 남자는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악행으로 인해 찾아온 결과다.
죄가 그를 벌하고자 찾아온 것이다.
밝혀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치부는 전부 밝혀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를 굳게 믿어주었던 기사들은, 차마 발리에르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다.
군주와 기사라는 입장은 변하지 않았으나…
둘 사이의 신뢰는 다시 찾을 수 없으리라.
그 점을 깨달은 발리에르는 허탈함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절망하는 발리에르를 본 로저가 더욱더 증오를 태웠다.
한번 포기했던 복수가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다가오자,
로저는 눈앞의 귀족이 자신에게 지은 죄를 알리고자 했다.
서서히 죽어가면서까지 본인이 죽어야 할 이유를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할 이유는! 나의 딸을! 하나 남은 내 가족의… 아…!”
분노로 사라졌던 로저의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딸의 목숨값을 받겠다는 말을 뱉으려다,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라버렸다.
방금까지 박찬영이란 사내와 나누었던 그 대화를.
이룬들 무언가가 남지 않는 복수.
기적을 안길 수도 있는 암청색 머리칼의 여자아이.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로저는 다시 상기해 내었다.
자신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되었다.
- …챙.
“…뭐지.”
지금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던 로저가 갑작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 점이 발리에르의 의문을 불러왔다.
복수의 귀신이 된 그가 물러설 것이라 전혀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도 칼날을 내뻗으리라 예상했다.
‘드디어 지친 건가?’
시험 삼아 조심스럽게 공격을 내뻗어 봤다.
동귀어진의 수가 가해지면 언제든 방어로 돌릴 수 있게끔.
하지만…
- 챙!
“…흡!”
지친 것이 아니었다.
로저의 칼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깃들었던 그 독기라곤 전혀 남지 않았다.
동귀어진은커녕, 방어에 전념한 듯한 칼질이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몰라도… 놈의 생각이 변했다!’
저 깊은 혼란에 빠진 눈빛은 연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발리에르는 로저의 변화를 어렴풋 눈치챘다.
그건 수많은 수련과 대련을 반복하며 쌓아온 마나 사용자의 육감이었다.
- 채앵! 챙!
“로저! 네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무기를 잃었군!”
“큭! 이 새끼가…”
망설이지 않고 공세로 전환했다.
수십분간 한쪽에서 쥐고 있던 승기.
허나 발리에르의 검격 몇 수 만에 그 승기의 주인이 뒤바뀌었다.
그만큼 둘 사이의 격차는 커다랬다.
심지어 로저가 십수 년 동안 정립해 온 검술은 모두 사용자의 안위가 배제된 기이한 검술이었다.
‘올바른 검술’이라곤 익힌 적이 없는 로저.
당연히 검술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챙! 챙!! 채앵!
기본적인 근력과 속도도 너무나 뒤처진다.
쓸 수 있는 건 기초적인 공방뿐.
심정이 변화한 이후 발리에르가 한 검격은 고작 10번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그 10번 안에 로저의 배에 칼을 박아 넣은 건,
날뛰는 어린애를 제압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 푸욱.
“커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