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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09) (209/310)



〈 20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놈들이 밀린다!!
- 계속 밀고 들어가!  제국파 놈들이 도망갈 시간을 주지 마라!!
- 풀구리스 기사단과 인빅툼 기사단은 비밀 통로로 향해!!


2 왕자는 전황을 천천히 흩었다.
아직 왕성 수비대의 본대가 도착하지 않은 탓일까?
어린아이가 보아도 우세하다고 생각될 만큼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사실 유의미할 정도로 승리에 도움이 되는 전쟁 병기는  가지 대여받았다.
제국의 사절단이 말한 대로라면 열 명의 마법사 부럽지 않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리라.
하지만…

‘왕성의 손상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이미 특별한 의미가 깃든  왕성의 바닥을 핏자국으로 적시는 것만으로 중죄를 짓고 있는 중이다.
우습게도 아비를 비롯한 제 핏줄을 죽이는 것보다, 그것이 2 왕자의 죄책감을 건드렸다.
그리다니아라는 성을 가진 남자는 그만큼 자신의 가족에게 실망을 받아오며 살았다.

그렇기에 전쟁 병기는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둘 생각이었다.
지금 전황을 보건대, 생각 이상으로 보드엠 왕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에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해서 몇백 개나 빌려온 ‘마나 쉴드’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도.


“왜 왕실 마법사가… 나타나지 않지?”


첫 화염구가 아군에게 적중한 이후 마법이 나타나는 낌새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덕분에 언젠가 제국에게 갚아야 할 마법 스크롤 소모가 줄어든 건 호재지만…
그들의 등장이 늦은 것이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다.

2 왕자는 방심하지 말고 언제든 마나 쉴드를 사용할  있게끔 집중해야 하겠다며 다짐했다.
그가 기다리는 왕실 마법사는 전장으로 황급히 달려오다가 기습에 당해 바닥에 목이 나뒹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놈들의 본대가 도착했다!!
- 진형을 나눠 상대해라!!
- 이봐! 우측, 우측으로 튀어가!

수많은 은빛 물결이 왕성 쪽에서 등장했다.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아본 걸까?
그들이 지체없이 아군을 향해 칼날을 빼 들고 덤벼들며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다니아를 위하여!!””


적들은 자신이 그리다니아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음을 외쳤다.
2 왕자는  말뿐인 허울에 헛웃음을 치며 역겨워했을 뿐이다.





*


확인해야 할 것이 생겼다.
로저는 진심으로 전장에 끼어들려는 생각을 버렸다.
지금은 떨어지는 낙엽조차 조심해야  때다.

자넷과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내는 전선의 좌측을 밀어내기 위해 사라졌다.
그는 둘을 따라가 자신의 의혹을 최대한 빨리 풀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길드장 로저가 맡은 곳은 저들과 정 반대에 위치한 우측이다.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로저가 탈영할 수 없는 위치인, 군의 우익에 대한 지휘권을 받은 명령권자란 것이다.

“…하늘 산맥은 우측으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내 아래로 배정받은 용병은 오른쪽을 향해!!”

기사를 제외한 용병들이 좌우로 나뉘며 뭉쳤다.
미리 자리를 잡은 덕에 포위하는 형태가 될 수 있었다.
계획대로 전투가 한결 수월해지리라.


적들이 총력전을 받아준 것이 다행이었다.
만일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건물 내부에서 농성을 벌였다면…
이처럼 수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반 제국파든 왕족 놈들이든… 겁쟁이 새끼들뿐이군.”


그들은 2 왕자 쪽 군대의 정확한 수도, 기사 갑옷을 입은 이들이 사실은 용병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성문이 뚫릴 정도의 심각한 일인 것만을 인지했을 뿐.

그렇게 왕족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가 되었다.
놈들의 침입을 일부 허용해 ‘일부 피해’를 감수하고 병과 기사의 소모를 줄이던가,
그냥 성문 입구 주변에서 총력전을 펼쳐 그 ‘일부 피해’를 전혀 허락하지 않던가.

‘일부 피해’란 적군이 침입한 내부 건물과 별관에서 아직 대피하지 못한 고귀한 피를 가진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면  장소에 보관해 둔 수많은 재화가 될 수도 있었고.

그들의 선택은 보시다시피 후자였다.
왕족과 고위 귀족은 희생될 재화와 자신의 혈족이 아쉬웠다.
적군의 정보나 제대로 된 전투 준비가 한없이 부족하기에 크게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된 소모품들의 목숨은 그들의 알바가 아니었다.
이럴 때 쓰기 위해 훈련시켜 놓은 목숨들이 시간을 끌어주면,
최고의 전쟁 병기인 마법사가 금세 반군을 제압해 줄 것이라 자신했기 때문이다.

마법과 마공학의 발전이 뒤처져, 제대로 된 마탑이 없는 왕국이다.
왕국 내에 존재하는 실력 있는 마법사는 모조리 왕성에 물릴 수밖에 없었다.
타국의 침략이 아니라면 마법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곳은 왕성 수비대 쪽이었으니,
납득하지 못할 판단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2 왕자와 박찬영이 각각의 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덕분에 전투가 금방 끝날  같으니 좋군.”

당연히 이렇게 수면 아래에서 오간 전략 싸움을 길드장 로저가 알고 있을  없다.
왕족과 귀족에게 거대한 변수를 일으킬 힘을 가진 고위 마법사가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채,
그저 겁을 먹고 모든 걸 병사에게 맡긴 채 왕성 안에 틀어박힌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흔한 용병 중 한 명이었다.
가진 건 약간의 눈치와, 별로 특별하지 않은 검술 재능, 이제는 사라진 사기적인 특성,
그리고 삶을 거리낌 없이 버릴 정도로 뜨거웠던 복수심밖에 없다.


“단장님! 내리실 명령은 따로 없습니까? 이 많은 용병들이 단장님 지휘 아래에 있는데요. 멋들어지게 지휘하는 척이라도 해보면 좀 멋지지 않겠습니까?”


“저놈들이 애새끼도 아니고, 알아서 잘들 싸우는데 뭘. 응원이라도 해주랴?”


“우욱… 그건 좀… 아닌 것 같네요.”

로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부단장이 말없이  있던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나 고대하던 복수의 기회가 왔는데도 아무런 행동 없이 깊은 고민에 잠겨있는 로저를 보곤 걱정을 한 것이리라.
평소와 같은 심드렁을 연기하며 대꾸하자, 그제야 하늘 산맥 용병단 부단장의 얼굴이 편해졌다.

‘자넷도 이놈도 날 걱정만 하고… 여기서 유일하게 애새끼 같은 건 나인가.’

로저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큼 사랑했던 딸이다.
딸을 잃자 평생을 일군 모든 것을 버리고 단  번 잡아본  없는 칼자루를 쥐었다.
자신은 평민이지만, 용병 길드장쯤 되면 휘하의 수많은 용병을 이끌고 귀족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당연히 별 장점 없던 로저가 길드장이 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좀  높은 실적을 쌓기 위해 의뢰 하나하나를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병신 같았지. 길드장은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칼밥을 먹게 된   년 뒤.
용병 길드장이 되더라도 귀족에게 복수란 영원히 불가능하단 것을 깨달았다.
길드장이란 위치는 군대의 사령관이 절대 아니었다.
여러 이유로 용병을 고용하려는 귀족이 쓰는 부품  조금 커다란 부품에 불과했을 뿐.

애초에 보수도 지급하지 않고 수백 수천의 용병을 부려먹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설령 왕국의  년 운영금에 비견되는 보수를 전부 지급한다 하더라도…
고작 돈 때문에 귀족을 건드리려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로저가 동화  영웅처럼 수많은 인망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귀족을 향한 평민의 복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이를 깨닫자 모든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을 자리를 찾아 닥치는 대로 위험한 의뢰를 받았다.
이대로 죽게 된다면 로저는 ‘딸의 복수를 위해 노력하다 죽은 아비’가 될  있었으니.
하늘에서 딸과 아내가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시시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저승길 길동무를 한 놈이라도 더.
이왕이면 그 길동무는 강하고, 유명하며, 사악해야 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반드시 출세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이든, 죽기 위해 망설임 없이 사지를 걸어가든…
칼질 한 번에 목숨을 거는 미친 행위는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80도 뒤바뀌어 버린 로저의 내면과 달리.

그렇게 이곳저곳을 떠돌고,
직접 용병단도 만들어 보며,
딸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만나는  시간이 흘렀을 때.
로저는 그토록 바래오던 용병 길드장이 되어있었다.


“단장님? 오늘따라 멍 좀 때리시네. 하긴, 심란할 만 합니다.”


“너 그거 아냐? 의외로 용병 길드장이란 자리는 얻는 것도 있더라.”


“네?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길드장은 거 아무나 합니까?”

“병신아. 돈이나 권력 말고. 아, 따지고 보면 권력인가.”

“…그것 말고 있나요?”

부단장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질문했다.
로저는 그가 의문을 느끼는 이유를 이해했다.
스스로도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니까.

“정보. 온갖 위험한 정보가 귀로 흘러들어 오더라.”

“…아하! 그러고 보면… 아까 연회가 파토나고 2 왕자님이 등장하셨을 때, 딱 들어도 귀한 정보를 다 알고 계셨죠?”

“맞아. 그것도 일환이지.”


“이야, 좋네요. 돈 되는 정보 같은 건 알면 알수록 좋으니까요.”

“사람 생각은 다 똑같나 보네? 이전 길드장들은  네가 말한 식으로 썼으니까. 하지만… 난 다르게 사용했어. 가령, 내… 나의 딸…을 납치한 배후라던지.”

“…알아내셨나요?”

알아냈다.
 귀족의 얼굴은 물론…
해당 귀족의 영지, 딸을 납치한 이유, 그 배경, 떠도는 소문 같은 하찮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마음 같아선 알아낸 당일, 혼자서라도 암습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놈의 가문은 하필이면 기사 가문이었으니까.

하나의 영지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많은 수의 기사가 있었다.
어설프게 습격하면 한번 주어진 복수의 기회가 모조리 날아갈 것이다.
그러니, 생길  없는 빈틈이 나타나는 기적이 찾아오길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 놀고 앞으로 튀어가. 그리고  대신에 저 새끼들 목  썰어줘.”


이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앞으로 타인에게 말해 줄 생각도 없었다.

적은 수십의 기사를 보유한 귀족 가문.
정면 돌파는 생각지도 않고, 유일하게 주어진 방법은 암습 뿐이다.
복수를 이루든 그렇지 못하든 잡힐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자살에 가까운 복수를 할 인물은 본인만으로 충분했다.

“대신이라… 알겠습니다. 저한테 맡기시고, 제가 놈들을 써는 모습이나 구경 하십쇼.”


“그래.”

전선으로 향하는 부단장을 배웅했다.
여전히 로저의 발은 후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복수 대상은 반 제국파 전체지만, 더 명확한 대상이 있었다.
이것이 로저가 오늘 복수에 눈이 멀지 않은 이유다.
저들의 죄는 그 역겨운 ‘유행’을 일으켜 간접적으로 로저의 딸이 납치당한 원인을 제공한 것.
그러니 굳이 로저의 칼로 목을 베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었다.


‘진짜’는 로저가 알아낸 그 귀족.
어린 여아를 납치하는 그는 당연히  제국파이기 때문에, 언젠가 그의  손으로 목을 썰 기회가 찾아오리라.
딱 그때만 나서면 된다.
굳이 이 위험한 전장에 로저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복수심을 가라앉혔을 때.
들려온 말에 본능적으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들어라! 목숨을 걸고 왕성을 수호하는 명예로운 이들이여!  발리에르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참전했다!!”

“엇? 발리에르라면 그 유명한 기사 가문? 수도에서 멀지 않아?”
“아! 그러고 보면… 며칠 전부터 1 왕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왕성에 머물고 계셨잖아!”
“와아아!! 증원이다!!”


- 탁탁탁!!


로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몸이 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손에는 어느새 칼집에서 뽑혀 나온 칼이 들려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틈은 없었다.

 이곳에 있지?
우연?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일까?
로저는 목표를 바라보았다.


귀족답지 않게 근육질이 들어찬 건장한 몸.
기사 가문을 이끄는 자로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다는  피력하는  햇볕에 그을려 붉어진 피부.
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
무엇보다 ‘발리에르’라는 영지의 주인.
로저가 아는 놈과 정확히 들어맞았다.

주변에 수많은 기사들이 같이 있었지만,
로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까 봐 단 한 번도 실물의 그를 마주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점화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상황을 가리지 못할까 봐.


하지만…
이미 로저의 눈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티론 테오도르  발리에르!!! 평생 네놈을 찾았다!!”

“흠? 나의 이름을 아는 적군이… 큭!!”


채앵!!


전력을 다해 부딪혀 온 로저의 칼이 놈의 칼날과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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