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로저는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흩었다.
한동안 칼질을 하지 않아 무뎌진 감각이지만, 검명음이 귓가를 간질이고 비릿한 혈향이 폐 깊숙이 닿자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몸이 저절로 최고의 컨디션을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전장의 감각을 잊기에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고 주장하듯.
애초에 죽어도 상관없는 목숨이다.
딱히 삶을 연명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날. 제 어미를 쏙 닮은 딸을 잃었을 때,
하루하루의 평온함을 음미하던 로저는 죽었다.
지금 숨이 붙어있는 건 단순한 덤.
그러니 오늘 죽는다고 한들 여한은 없었다.
‘아니… 이젠 그렇다고 말 못 하지. 내겐 유일한 미련이 생겨버렸으니까.’
전선에서 물러나길 선택했다.
목숨을 태우더라도 이루리라 다짐했던 복수를 손에서 놓아주었다.
오직 하나의 미련 때문에.
자넷.
그녀와의 첫 만남은 고작 허리께까지 오는 어린아이였을 때다.
특이한 점은 외견에 비해 어색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는 것 정도.
허나 갈색 눈에 서린 독기와 달리, 은근히 정이 많은 아이였다.
로저는 딸을 잃은 아픔을 겪고 있었고, 자넷은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없었다.
순식간에 서로가 가까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마음속 공백이 너무나 맞아떨어졌으니.
하물며 둘이 함께한 시간은 10년가량.
꽤 나이를 먹은 로저에게도 길게 느껴지는 세월이다.
자아가 완벽히 형성되지 않았던 소녀에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허, 그 녀석이 우는 건 상상도 안 가는데.’
솔직하지 않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둘이었지만, 내심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죽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저가 살고 싶어서가 아닌, 자넷이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참전에 대한 은퇴 선언은 그녀가 불안한 얼굴로 찾아와 반란 계획을 털어놓기 전까지 지켜졌었다.
챙! 채챙!!
-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마법사가 공격을 멈췄다!!
- 다시 놈들을 둘러싸!!
- 신께서 보드엠님의 손을 들어주셨다!!
- 와아아아악!!
로저는 십수 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흥분이란 감정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쯤 포기했던 복수가 이러한 형태로 이루어지다니?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죽을 자리’에 이 이상으로 걸맞은 전장을 찾기 힘들 것이다.
만약 귀족을 죽이는데 직접 손을 보태고, 설령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한들…
로저는 그 어떠한 죽음보다 더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임을 자신했다.
하지만 억눌렀다.
지난밤, 자넷이 참전을 제안하며 보였던 그 불안한 눈빛을 기억한다.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눈이 로저의 발을 막아섰다.
- 저벅저벅.
그렇게 전장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 로저의 곁에 누군가가 걸어왔다.
판금 갑옷과 투구를 껴서 그 체격이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로저는 그 걸음걸이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역시나, 그 투구 안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재는… 직접 안 싸워? 복수, 하고 싶지 않았어?”
“쯥… 이미 복수하고 있잖아. 하늘 산맥이 곧 내 손과 발이지 뭐. 칼날 다 녹슨 늙은이가 직접 껴서 뭐 해?”
기사 놈들이 싫다.
귀족 새끼가 증오스럽다.
마음 같아선 살가죽을 한 치씩 저며가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만끽하고 싶다.
그의 손으로 직접.
하지만… 자넷에겐 속마음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해야 했다.
로저는 전장에 껴들고 싶은 욕망을 가슴 깊숙한 곳에 쑤셔 박았다.
그 감정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끔.
‘…딸을 앗아간 반 제국파에 대한 복수는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다. 애초에 이루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복수야. 그저… 지켜보는 걸로도 충분히 만족 할 수 있어…’
비록 남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들, 로저는 나름 만족할 수 있었다.
조금 강한 용병 하나가 끼어들더라도 이 전쟁에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참을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래? 으음, 의외네?”
“남 걱정은 됐고 네 용병단이나 잘 이끌어. 전에 말 맞춰 놓은 대로 너넨 좌익. 우린 우익. 곧 갈라질 거다.”
“걱정은 개소리. 어떤 돌대가리가 명줄 질기기로 유명한 아재의 목숨을 걱정해? 큭큭.”
자넷이 한결 시름을 던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앞으로 향했다.
고작 대화가 두세 번 오간 것으로 끝난 것이다.
방금의 대화로, 그녀가 구태여 전장에서 벗어나 로저의 곁으로 온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다.
너무나 그 목적이 숨김없이 읽혀서,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막아야 했다.
- 콰앙! 쾅!!
“끄윽! 뭔 놈의 힘이!!…”
“주,주먹이 어떻게 칼날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마법이 사라진 전장.
그 속에서 유일하게 폭발음이 발생하는 곳이 있었다.
소음의 원인이 주먹이라는 게 보면서도 살짝 믿기지 않지만.
가진 무력의 수준 때문에 놀란 것뿐만이 아니다.
저 어린 나이에 용병으로 있기에 아까운 수준의 무력을 지닌 것도 매우 놀라웠으나,
인간의 주먹으로 저런 소리를 내는 것이 더 큰 신비로움을 자아내었다.
마치 불을 삼키는 재주꾼을 보는 것처럼.
“저 팔 철로 만든 의수 아니야? 그런데… 거 새끼, 펄떡펄떡 뛰어다니네. 최근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더니 엄살이었어?”
로저는 혀를 쯧쯧 차며 작게 욕했다.
저 사내가 아닌 자넷을.
몇 주 전, 자넷이 어두운 얼굴을 하며 동료의 부상이 가볍지 않다고 슬퍼했었다.
로저 역시 그녀의 슬픈 얼굴을 보고, 어쩌면 그날 봤던 꽤 호감이 어리던 사내가 두 번 다시 두 다리로 서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기에 안부 인사를 굳이 전해달라 했던 것이고.
그런데 저 다리를 봐라.
상처를 입은 지 길어야 한 달밖에 지나지 못했을 텐데,
아픈 곳이라곤 전혀 없다는 듯 전장을 휘젓지 않는가?
포션을 썼다 가정하더라도, 끽해야 다리에 금 좀 간 정도이리라.
금이 간 횟수를 헤아리면 두 자리를 훌쩍 넘긴 로저에게는…
봄철 감기마냥 때 되면 오는 수준의 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넷이 과장해서 슬퍼한 이유는 하나다.
“아주 단단히 반했구먼. 어? 고작 금이 간 것 정도로 그리 죽상을 만들 정도로. 퉷!”
다시 봐도 계집애 잘 꼬이게 생기기는 했네, 로저는 마법이 인챈트 된 판금 갑옷을 주먹으로 우그러뜨리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저 정도 얼굴이면…
예리한 감각을 가린단 핑계로 투구를 안 쓰고 다닐 만도 했다.
오만과 자신감은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생각하는 로저지만, 저놈은 투구를 벗음으로써 적의 사기를 팍팍 깎으니 괜찮다.
맞서는 상대를 동화 속 멋들어진 영웅에게 희생되는 악당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자넷이 저 놈팡이에 빠진 것도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무릇 첫사랑일수록 외모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말도 있었으며, 로저가 알기론 그녀의 연애 경험은 없었으니.
딸내미 뭐 빠지게 키워도 사위보다 취급이 덜하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것 치곤 악착같이 덤벼드네? 사내구실은 하는군. 성직자라고 했으니 술, 여자, 도박은 안 할 테고… 능력도 저 정도면 합격인가?’
물론 불평하는 것과 반대로 로저는 박찬영을 고깝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좋게 봤으면 봤지.
강한 무력과 인성 때문만은 아니다.
로저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란 평을 듣던 용병 신인들을 몇 번이고 보아왔다.
그리고 대부분이 한 5년 뒤 찾아보면 시체가 됐거나, 그와 비슷한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색다른 신성이 등장한다고 한들, 닳고 닳은 로저에게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로저의 눈길을 끈 건 사내의 내적인 부분 따위가 아닌…
외적인 부분,
정확히는 머리카락 색이 로저의 부인과 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왕국에서 흑색 계열의 머리카락 색은 극히 드물기에, 그를 처음 봤을 때 정말로 놀라 버렸다.
로저가 유독 저 신입에게 호감이 들었던 이유다.
‘아내는 동양인이 아니었으니 전혀 별개의 사람이겠지. …그래도.’
- 콰앙! 휙!
마침 그가 상대하던 기사에게 강격을 날리며 후열로 몸을 뺐다.
우연히도 딱 로저의 곁으로 후퇴했다.
잃어버린 가족보다 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로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포션병을 꺼내 마셨다.
순식간에 병 하나가 비워진다.
로저는 너무 거침없이 내용물을 마시길래 저 병이 포션이란 걸 깨닫기까지 살짝 시간이 걸려버렸다.
“…허, 이봐. 부상 입었으면 쉬는 게 어때?”
“로저님?”
“그거 포션 맞지?”
“아. 맞습니다.”
포션을 마실 정도면 분명 저 판금 갑옷 아래에는 숨겨진 부상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저리 망설이지 않고 털어 넣을 정도면…
분명 꽤 아픈 수준의 내상이리라.
물론 박찬영이 포션을 마신 이유는 혈귀화의 부작용을 억누르기 위함이었지만,
로저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이들과 마음껏 싸우며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라 여기는 것도.
무엇보다 데이지가 겪은 일에 대한 복수심이 가장 큰 원동력이기에, 카르마까지 써가며 아낌없이 포션을 먹고 있었다.
“이미 넌 제 몫을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쉰다고 한들 뭐라 하는 사람 없을 거다.”
“배려는 감사하나, 정말 괜찮습니다. 부상이 위태롭지는 않은 수준이거든요. 제 동료 중 연금술사가 있어 포션도 꽤 싸게 구할 수 있고요.”
“그래도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거 이 악물고 달려드… …아. 혹시 너도, 복수냐?”
“으음… ‘너도’라면… 로저님도 이번 전투의 참전 이유가 복수라는 뜻이군요.”
사내는 그 순박한 얼굴과 맞지 않는 섬뜩한 눈빛을 하며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로저는 저 눈빛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아직 복수를 반쯤 포기하기 전인 십여 년 전,
용병의 정상에 서면 귀족에게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 믿은 젊었을 때 자신의 눈빛과 유사했다.
목표는 복수라는 뜻이다.
십수년간 느껴본 적 없던 향수를 부르는 머리카락 색과, 귀족을 향한 복수라는 목적.
게다가 딸처럼 여기는 자넷과의 관계까지.
사내를 향한 로저의 흥미가 커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가족에 대한 원수. 너는? 말하기 힘들면 말해줄 필요는 없고.”
“…친한 친구의 복수입니다. 저랑 비슷한 나이의.”
목소리에 진한 증오가 담겨있다.
사내가 지금까지 휘두른 폭력으로는 아직 성에 덜 차다는 듯이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그 눈이 기사만을 보는 것이 아닌, 저들의 뒤에 있는 귀족들을 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친구라… 으음…”
“하하. 괜찮습니다. 아직 멀쩡히 살아 있어요. 다친 곳도… 없고요.”
“그럼 다행이군. 뭐, 알아서 하겠지만 잘 챙겨줘. 이색적인 특징을 가진 사람에게 격 없이 대해주는 사람은, 별로 흔치 않으니까.”
로저는 자신을 만나기 전의 아내가 꽤 지독한 차별을 받았다는 걸 떠올리며 말했다.
이 동양인은 남자이기도 하고, 그 신장도 무척이나 커서 괴롭힘당할 걱정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것도 인연인데 조언 한 개쯤은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잃고 나서 후회하면 늦고.
자넷이 듣게 된다면 늙은이의 오지랖이라고 혼냈을 테지만 이 자리에 자넷은 없었다.
“역시 검은 머리카락은 흔하지 않나 보네요? 저도 저 말곤 딱 한 번밖에 못 봤고…”
“오히려 한 번이라도 봤다는 게 신기한데. 그 사람도 동양인?”
“아까 말했던 복수를 대리 받은 친구가 저랑 비슷한 머리카락 색을 가졌습니다. 조금 다른 색, 그러니까 암청색이라고 해야 할까요?”
- 휙!
암청색이란 말에 로저의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가듯 사내가 뱉은 말이 로저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자신과 비슷하던 크기의 복수심.
귀족. 기사. 그가 증오를 품은 이유.
나이대가 거의 차이 나지 않는 친구.
그리고…
암청색의 머리카락.
이 모든 것은 우연일까?
너무나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그러니 얼떨떨한 얼굴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사내를 향해 질문했다.
“…너와 친하다는 그 친구는… 여성인…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잠깐. 잠깐만. 그, 혹시 자네의 친구는… 반(反) 제국파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는 ‘취미’와 관련이 있나?”
“……”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저 날카로운 냉기가 느껴지는 시선에 소름 끼칠 새도 없이,
로저는 절박함을 담아 그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불쾌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내겐 필사적인 이유가 있어서… 아니, 아니야. 방금 대답을 하지 않은 게 대답이 됐군.”
“…로저님은, 무척, 무례하시네요.”
사내가 로저에게 돌려서 경고했다.
지금까지 부드럽게 웃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리고 사내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당사자를 떨어뜨려 놓고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니까.
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이가 화내지 않기는 힘든 화제였다.
“이름이, 친구의 이름은 어떻…”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이 이상은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네요. 제 친구가 눈에 띄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남자가 등을 돌려 전장으로 향했다.
대화를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하지만 로저로써는 그 등에다 마지막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것만, 이것까지만 대답해 줄 수 있나? 베르테스! 자네의 친구 이름이, ‘베르테스’가… 맞나?”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 탁탁탁!
그 대답에 절망하면서도,
로저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친구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딸일 수도 있다.
이름은 바꿀 수 있지만, 머리카락 색은 바꾸기 쉽지 않으니까.
어쩌면 저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방금 로저의 말실수 때문에 그의 반감을 사버렸으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의 친구에게 딸에 관련 된 단서가 있을 수도 있다.
귀족의 유흥, 자넷과 비슷한 나이대, 암청색의 머리카락.
이 세 가지가 겹칠 확률은 너무나도 낮으니까.
‘확인해야 해. 어떻게든, 반드시 확인해야 해! 그러기 위해선, 일단 오늘의 전투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살에 가까운 공방 속에서도 생명을 몇백 번이나 로저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사기적인 특성 『필사즉생』.
하지만 ‘살기 위한 의지가 강해지면 특성이 영구적으로 사라지는’ 패널티를 지닌 그 특성이…
십 년간 잊혔던 생존 의지가 살아나며,
로저의 상태창에서 완벽히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