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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광장이 침묵으로 잠겼다.
그만큼 용병들은 왕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죄가 없다니?

준 귀족이 평민에게 살해당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십수 명의 왕실 기사 전부를.
직접 가담한 이들은 당연히 효수되고,
방관한 이들은 운이 좋아야 옥에 몇 년간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리라 예상했다.

그저 챙길 수 있길 바란 것은 목숨 하나.
숨만 붙어있을  있다면 2 왕자의 자비에 감복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죄가 없다는 선언을 들어버렸다.
너무나도 그들에게 편한 이야기기에, 도리어 의구심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이럴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상식을 넘는 상황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네들의 죄는 크게 보아 세 가지야. 첫째, 왕국에 충성한 이들을 살해했다. 둘째, 그들의 수호를 받는 왕실을 욕보였다. 셋째, 그들에게 작위를 내려준 귀족을 능멸했다.”


- 저벅. 저벅.


2 왕자가 무릎 꿇은 수백의 용병 앞을 차분히 걸었다.
방금 귀족을 죽인 반역자들의 코앞을…
호위 기사조차 대동하지 않고서.


그 담대함을 지켜보는 수천의 눈동자는, 왕자가 진심으로 자신들을 범죄자라 여기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선 첫 번째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과인은 납득할 수 없더군. 현재 왕국 기사들이 과연 그리다니아에 충성하는지에 대해.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광장을 거닐던 왕자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무릎을 꿇은 용병들 중 하나에게 질문하기 위해.
호명을 받은 용병이 고개를 한층 더 숙이며 대답했다.


“충성은 개뿔, 나라를 팔아넘기는 씹새들입니다. 저 같은 못 배운 용병 놈조차 얼마나 지들 배를 불리는지 알 정도인데, 드러나지 않은  없겠습니까?”


순간 모든 용병들의 머릿속에 욕설이 떠올랐다.
왕자의 앞에서 기사를 욕하다니?
왕실과 귀족에 대해 없는 말 지어내면서 찬양해주면 되었을 텐데!
그러면 왕자의 기분이 좋아질 테고, 본인들이 살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갔을 것이다.


용병들은 이어질 왕자의 분노를 예상하곤 공포에 떨었다.
혹시 왕자가 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을 주워 담을까 봐.
하지만…

“음! 계속하거라.”

2 왕자는 기사를 시켜 말을 꺼낸 용병의 목을 거두어가지 않았다.
하던 말 역시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촉했지.

“…거 재밌게도, 그짝들의 개짓거리는 저희 용병들 배가 부르는 것에 도움이 됐죠. 사욕을 채우기 위해 빼돌린 군수 물자들이 흐르고 흘러 저희가 사용하고 있으니…”


왕국은 그 규모에 비해서 용병 사업이 비대하다.
당연히 무기와 방어구에 대한 수요가 너무나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불균형적인 공급이 차질 없이 이루어진 원인은…
원래라면 가공되어 일반 병사에게 보급되어야 했을 가죽 원단과 강철 주괴 덕분이다.
사실상 나라에서 주도하여 한 사업이기에 공급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시장 속에서 차익을 보는 건 국고가 아닌, 기사와 그 뒤에 있는 귀족이란 차이점이 있지만.


“뭐, 거기까진 저도 수혜를 입었으니 아가리를  닫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제국을 비롯한 타국에까지 물자를 팔아 재끼더군요?”

“오호. 상당히 귀가 넓군.”

“어라? 알고 있으셨… 아, 제가 알고 있다면 왕자님도 아시는 게 당연하겠네요. 쩝…”

처음 듣는 소식에 대부분의 용병이 크게 놀랐다.
군수 물자를 타국에 빼돌린다니?


이건 선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다.
어쩌면 자신들이  반역과 별 다를 바 없는 짓이다.
국경을 맞댄 국가는…
평생 아군이란 보장이 절대 없으니까.


이쯤 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낮 용병이 알기에는 너무나 고급진 정보다.
그렇게 용병들의 눈이 질문에 대답하는 남자에게로 향했을 때,
어떻게 왕자의 질문에 답하는 남자가 그런 정보를 꿰고 있는지 납득했다.
또한 감히 용병 따위가 왕족, 그것도 2 왕자의 앞에서 저리 비속어를 쓸 담량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도.


“하하하! 그래! 역시 자네라면 과인 앞에서도 이리 당당하게 대답을 할  알았지.”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 말대로 용병업이 가장 발전한 이 왕국에서, 국정을 책임지는 과인이, 용병 길드장의 얼굴을 외우지 않았을 리 없지 않은가?”

2 왕자가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장 로저의 대답이 상당히 마음에 들은 눈치였다.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인 연기라는 것을 모르는 대다수의 용병들은,
그 사실에 작게 안도했다.


“그의 말이 맞다!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어야 할 이들이 타국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 이것을… 옳은 의미의 ‘충(忠)’을 지키고 있다 보아도 되는가?”

“……”

“아니! 그들의 충(忠)은 역변했다. 과인의 머리로는, 그들이 도저히 왕국에 충성을 하고 있다 인정할 수 없어. 그러니 자네들은 충성을 맹세한 이들을 살해하지 않았네. 역적의 목을 쳤을 뿐!”

단호한 말투가 고요한 광장에 울렸다.
처음 입을 열었던 2 왕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점점 커져 모두의 귀에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수백의 용병은 입안에 차오른 침을 삼키는 것조차 잊은 채 몰입하고, 공감하며, 동조하고 있었다.

“이리되면 두 번째 죄는 말할 필요가 있나! 그들은 왕국을 수호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어!”


왕자의 말에 서서히 격정이 끓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거닐었던 발걸음은 언제였다는 듯 당당한 힘이 실렸고,
목소리에는 솟구치는 힘이 담겨있었다.

온 감각을 다 하여 경청하던 용병들은 내면의 무언가가 변하는 걸 어렴풋 느꼈다.
가슴  무언가가 침식되듯.
천천히, 확실하게, 마음이 마음을 타고 감정이 번진다.

“마지막 세 번째! 자네들이 왕족을 모욕하고, 천명을 뒤틀었다고? 아니! 과인을 비롯한 모든 왕국민의 부모, 그리다니아를 욕보이는 건 나라를 좀먹는 저놈들이야!”

- 척!


왕자의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언젠가 있었을 번영을 상징하는 높다란 왕성을.
그곳에 자리를 차지한 채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기생충을.

“맹세했던 의무를 벗어던지고, 지켜야 할 모국에 칼을 겨눈 기사! 그들을 억제하기는커녕, 누가 더 나라의 피를 빠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혐오스러운 악취를 뿜는 귀족!”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목소리에 서려 있었다.
그 선명한 감정이 수백의 뇌리에 박히며, 용병들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성질 급한 용병 몇몇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어깨를 들썩였으며,
스스로를 나름 이성적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깊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2 왕자의 통렬한 비판에 동의했다.

“그들에게 작위를 내려준, 태양의 피가 흐르는 과인이 선언하겠다! 그들의 직책을 거두겠다고!”


“!!…”


“이로써 자네는 귀족을 죽인 것도, 왕실의 권위를 짓밟은 것도, 왕족을 모욕한 것도 아니게 되었군. 고로 자네들은 죄인이 아니다! 과인의 말이 틀렸는가?”

- 척! 척척!


““아닙니다!!””


용병들을 둘러싼 백을 넘는 기사가 짜 맞춘 듯 발을 구르며 크게 대답했다.
순간 무릎을 꿇은 수백의 용병은 전율이 등골을 흩는 걸 경험했다.


수많은 용병들에게 경외를 받으며, 수많은 기사들이 충의를 보내는 왕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범접할  없는 압도적인 인물로 와닿았다.

“죄를 물어야 마땅한 곳은 저곳이다! 저들이 원죄를 지었기에 오늘의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고, 저들이 멈추지 않고 죄를 쌓고 있기에… 왕국이 망해가고 있으니!”

- 바…방금…
- 망한다고?…
- 왕국이?


충격적인 발언에 광장이 작은 속삭임으로 웅성거렸다.
사실 그들도 내심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늘상사 술을 마실 때면 나오는 이야기가 왕국이 망해간다는 말이었으니.

하지만…
 말이 왕족 중의 왕족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어느 자식이 부모를 보고 죽기 직전이라 당당히 말할까?

“과인은 눈 돌릴 생각이 없다! 그리다니아는 쓰러져 가고 있다! 다름 아닌 저 기생충들 때문에!”

나라의 망조.
원인은 명백했다.

모두의 마음속에 다 사라졌다 생각한 애국(愛國)의 혼이 고개를 들었다.
자라온 고향이 그리다니아다.
언어 역시 그리다니아의 언어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사귄 인연들도 모두…
그리다니아의 것이다.


기울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미워 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모국.
그런 어머니가 병들어 죽어간다.
무려  왕자가 인정할 정도로.

솔직히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간절함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신원은 한낮 용병.
뭉친다 한들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 분함에, 용병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얌전히 저물어야 하는가? 시한부를 선고받은 노인처럼, 그날이 조금이라도 늦게 찾아오기를 빌며, 100년 뒤에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은 채 ‘그리다니아’라는 이름은 잊혀야 하는가!”


- 스르릉!! 척!!

““아닙니다!!””

모든 기사가 동시에 칼을  들어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검신에 새겨진 국기가 저물어 가는 노을의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하나의 군대가 가장 먼저 훈련하는 제식.
 위력은,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하나로 이어진 듯한 일체감을 선사해주었다.
설령 그 제식에 참여하지 않은 용병들이라고 할지라도.

- 스윽!

“허나 왕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과인은 왕국을 청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치적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닌, 힘과 무력으로!”

- 바,방금 설마…
- 허… 허허…
- 세상에…!!

왕자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치켜들었다.
그 시퍼런 칼날은 명백한 장소를 향해 있었다.
왕성.
2 왕자는 왕좌를 찬탈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과인이 지닌 힘은 저 돼지들의 목을 치기엔 부족해. 냉정히 미래를 점쳐보면, 아마 아슬아슬한 차이로 실패할 것이다.”


몹시나 원통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 진심 담긴 절절함과 구슬픔이 만인의 마음을 울렸다.


어떻게든 구하고 싶다.
하지만 힘이 닿지 않는다.
용병들도 너무나 잘 아는 감정이었다.


병의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가족을 잃었을 때.
가진 힘이 부족하여 동료를 잃었을 때.
포션을 구하지 못해, 결국 완치의 때를 놓쳐 불편한 몸으로 은퇴하는 전우의 등을 바라볼 때.
이를 겪어보지 않은 자가 드물었으니까.

“그래도 하늘이 과인을 저버리지는 않았군. 대계의 날,  미세한 차이를 메꾸어 줄 이들이 이 자리에 붙잡아 달란 듯 모여 있었으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의미가 담긴 말.
용병들이 흠칫 놀라 일제히 왕자를 쳐다보았다.
왕자는 수백 명의 용병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추어 주었다.


“지금까지는 기생충들을 잡고 왕국을 뒤바꾸지 못했다! 여태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봤을 따름이지만, 자네들이 도와준다면 분명 왕국은 광명을 찾을 수 있어!”

- 스걱!!

갑자기 왕자가 팔을 걷더니, 손에 든 단검으로 자신의 팔뚝을 베어버렸다.
나병에 걸려 절반쯤 문드러진 피부가 칼에 베여 피를 뿜었다.
얕게 베인 건 전혀 아님을 출혈량이 증명했다.
적어도 근육이 상했을 정도.


그 갑작스러운 자해에 모든 용병들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왕자가 피를 뿜는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수백의 용병 모두가 왕자의 피를 눈에 담을 수 있게끔.

“왕국의 왕자가 아닌! 푸른 피가 흐르는 왕족이 아닌! 자네와 같은 붉은 피를 가진 ‘그리다니아’의 자식으로써 부탁하겠다! 병든 왕국을 치료하는 것에 손을 보태다오! 자네들이 가진  힘으로!”

- 스윽!

한 나라의 왕자가 고개를 숙였다.
용혈까지 내보이며  진실성을 호소했다.
고작 용병에게, 자신이 아끼는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을 보태 달라며.


망해가는 왕국.
자신들이 힘을 모아 돕는다면 막을 수 있다 했다.
모두가 벅차올라 고개를 끄덕이기 직전.
가장 선두에 나선 이가 있었다.


“저희 하얀 고래는, 왕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수백의 용병 사이 홀로 일어선 여성 용병이 굳건한 말투로 그리 말했다.
그녀의 말에 하얀 고래 전원이 일어나며 함께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늘 산맥도 참전하겠습니다. 으음… 저희 용병 단은 좀 자유분방한 주의라서, 단장인 제 말에 동의  하는 놈들도 있겠지만요.”


그런 로저의 말과 반대로 하늘 산맥에 속한 대부분의 용병이 일어섰다.
 눈은 왕자가 지핀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철사자는 2 왕자님이 그리다니아의 아버지에 가장 걸맞은 인물임을 동의합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보태고 싶습니다.”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철사자의 단장이 일어섰다.
그렇게 일부이되 아군으로 두면 든든한 이들이 단체로 일어서자, 들불처럼 수많은 용병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각오를 나지막이 입에 뱉으면서.

- 벌떡. 벌떡.

큰 함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거세게 타오르는 투지가 그들의 가슴속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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