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광장.
그런 넓은 공간을 격정에 찬 욕설과 흥분 섞인 고함이 가득 메웠다.
철과 철이 부딪히며 귀를 찢는 금속음 역시.
그런 혼란 중에서 자넷은 뒷목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뒤에 선 용병이 함성을 지르며 침을 튀겼기 때문이다.
조용히 옆으로 눈길을 돌리니,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멘 부단장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마주친 부단장이 자넷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이 폭동에서 그녀가 맡은 일은 간단했다.
저 기사들을 제압하는 것이 아닌 사살 하게끔 유도하는 것.
“이봐!! 석궁 쓸 줄 아는 놈 있어? 받아 가! 우리한테 좀 있으니까!”
“오오! 석궁을 챙겨온 놈이 있다고?”
“나! 나 빌려줘! 저 씹새끼들 다 쏴 죽여버릴 거니까!!”
“야! 앞에 선 놈들 고개 숙여! 맞아도 씨발 내 알빠 아니다!!”
“화살은 아껴 쓰라고! 비상용이라 얼마 없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다 줘!”
애초에 연회를 목적으로 모인 이들이다.
수백의 용병 중 무장을 한 인원은 절반이 채 안 되었다.
원래라면 10분이 넘게 흘렀어야 할 전투.
하지만 이들에게 기사들의 견고한 방진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석궁이 주어지자,
십수 명의 기사를 전부 사살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다들 흥분에 차 이성이 마비되었지만… 조금만 시간이 흐른다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후열 놈들은 이성을 찾을 거야.’
그리되기 전에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거세게 몰아치듯 끌어가야 한다.
다행히 세워놓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준비해둔 50정의 석궁이 전부 동났으니까.
용병들은 어렵지 않게 시위를 매겼다.
거리는 고작 10M 안팎.
하물며 뭉쳐있기에 움직이지도 못한다.
못 맞추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살이 빠르게 쏘아져 나가 기사의 온갖 신체 부위를 노린다.
그들은 석궁을 쳐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지만…
한 명이 동시에 쏘아지는 5개의 화살을 쳐내지는 못했다.
- 커헉…!!
- 이 새끼들아!! 이건 반역… 끄악!
- 우릴 죽이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아,안돼!!
운이 없게도 판금 갑옷이 가려주지 못한 곳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본격적인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3분의 시간이 추가로 흐르자…
용병들은 자신의 손으로 귀족을 죽인 흥분에 벗어나지 못한 채 무기를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식지 않은 시체 여럿과 함께, 상황은 종료되었다.
아니, 종료가 아니었다.
이제 본격적인 계획의 시작이지.
자넷도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지 들었지만,
계획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그가 파악하고 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본 자넷은 찾는 이가 눈에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의 행동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을 인물이라면…
“크리스! 파계승은?”
“아, 찬영? 아까 왕성으로 뛰쳐나가던 기사를 혼자 막겠다고 하던데?”
기사의 앞을 막아?
물론 왕실 기사 중 한 명이 왕성을 향해 빠져나간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젯밤 그가 자넷에게 이르기를, 알려지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며 막을 수 없다면 그냥 보내라고 했었다.
그렇기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넷이 이 흥분한 용병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문제가 되는 건, 박찬영 혼자서 기사를 상대했다는 점이다.
물론 2 왕자에겐 기사와 비등한 정도의 무력을 갖추고 있다며 소개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기사.
전국에서 가장 재능이 빛나는 이들을 끌어모은 왕실 기사와 비교할 거리가 안 되었다.
그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자넷은 표정을 굳히고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도, 박찬영도 왕국의 물정에 어두웠다.
왕실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알 리가 없다.
그러니 혼자 상대한다는 무모한 판단을 내렸고, 저런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겠지.
“…빨리 안내해! 지금 당장 파계승이 있던 곳으로 가야…”
“단장님. 슬슬 준비하세요.”
다급하게 뱉은 자넷의 말을 끊은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곳곳에서 치솟는 열기 섞인 고함과 달리, 침착함이 감도는 중저음의 미성.
고개를 돌렸을 땐 익숙해지기 힘든 잘난 얼굴이 자넷을 마중했다.
“너…”
“곧 오실 겁니다. 저희가 차려놓은 판을 드실 분이요.”
고통을 견디는 표정은 아니었다.
꽤 힘겨운 싸움이 되었는지 이마에는 땀 한 방울이 맺혀 있지만,
부상을 입은 눈치는 아니었다.
유일하게 눈에 밟힌 것은 소맷자락에 묻은 피.
그의 손목은 불편함 하나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피의 주인은 명백하다.
“기사를… 홀로 이겼어? 어디 한 곳 다친 데 없이?…”
“아, 갑옷은 챙겼어요. 칼은… 좀 망가지긴 했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단언컨대, 그 혼자서 왕실 기사를 이겼다는 사실은 결코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니다.
기사가 괜히 준 귀족이란 지위를 하사받겠는가?
작위는 하나의 증표다.
평민과 귀족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벽을 넘어섰단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남자는 언제 어디서든 기사의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었다.
저 어린 나이에 왕실 기사를 단독으로 이겼다면…
왕국은 물론, 제국을 포함한 그 어느 강대국에서도.
사실상 이미 준 귀족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존대를 해야 할까?
자넷은 스치듯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말을 높이는 그녀를 본 남자가 얼마나 큰 웃음을 터뜨릴지 뻔하게 그려져서.
아마 몇 달은 놀림을 받으리라.
“아니, 그, 후우… …생각해보면, 널 처음 만났을 때 주먹 하나로 공터를 만들었지. 그 울창하던 숲을.”
“그러고 보면 그랬네요.”
아직도 그 충격적인 광경이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이 남자의 무력은…
자넷이 아는 것보다 훨씬 높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몇 년 뒤면 고개도 못 들 정도의 사람이 되어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좋은 인연으로 엮였는데, 미래에 무시하지는 않겠지?’
자넷은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시종일관 이 남자에게 대박의 향기가 풍기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호의를 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
아직 용병들은 취해있다.
평생 쳐다도 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인 준 귀족을 직접 응징했다는 쾌감에.
나는 눈과 귀로 사방을 흩었다.
역시, 몇몇 눈치 빠른 놈들은 이성이 돌아오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듯했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몸을 슬쩍 빼는 놈들이 보인다.
“야야… 슬슬 도망가야 하지 않겠냐?”
“…씁. 조용히 튀자고. 난 안 걸리겠지?”
“어차피 잡아 매달릴 애들은 널렸으니…”
한 명. 두 명.
그 분위기는 점점 번져나갔다.
다들 제 생명을 먼저 챙겨야 한단 걸 깨달은 것이다.
- 슬금슬금…
그렇게 외곽에 있는 몇몇 용병이 광장을 벗어나기 직전.
그들의 시도는 완벽히 가로막혔다.
- 저벅! 저벅! 저벅! 척!!
“…이런 씹…”
“니,니들 뭐야! 젠장!”
광장에 여러 갈래로 난 길목.
그 모든 곳에 갑자기 나타난 백을 넘는 수의 기사가 틀어막았으니까.
마치 광장에서 일이 터질 거란 걸 알고 매복이라도 시켜둔 모양새였다.
방금의 왕실 기사처럼 수가 적지도,
또 투구를 빼먹는 등 무장이 빈약하지도 않았다.
완벽히 전투를 상정에 둔 채 무장을 마친 기사였다.
“당장 움직임을 멈춰라!”
가장 선두에 선 기사가 패닉에 질린 용병들에게 일갈했다.
그 목소리에 거대한 침묵이 광장을 지배했다.
반항을 하고 싶어도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인 것처럼 그려졌다.
방금과 반대로 포위당한 것들은 용병.
용병 셋이 기사 하나를 상대해도 이길까 말까인데, 이래서야 용병 하나가 기사 둘을 상대하게 생겼다.
‘우리’ 하얀 고래가 챙겨온 쇠뇌의 화살은 정말 공교롭게도 다 떨어졌다.
애초에 비상용으로 챙긴 놈들이니 어쩔 수 없고말고.
게다가 흥분에 찬 용병이 화살을 아끼지 않고 난사했다고 한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용병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저 적이 될 확률이 아주 높은 기사들에게.
“귀를 열고 듣도록!”
가장 선두에 선 기사가 모든 용병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는 단호한 말투로 광장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를 울렸다.
“너희는 왕국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을 살해하는 반역을 저질렀다! 또한 그들의 수호를 받는 왕실의 권위를 짓밟았다! 그들에게 작위를 내려준, 태양의 피가 흐르는 왕족을 모욕하며 천명을 뒤틀었다!”
“하,하지만 전 무기도 없는…”
“나도! 나도 전투에는 안 껴 들었다고!…”
“억울합니다! 전 정말 억울해요…!!”
광장 전체가 절박함이 섞인 변명으로 가득 찼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은 죄가 없다 울었다.
석궁을 들었던 용병들은 남몰래 저 멀리 던져 모르는 척을 해대었다.
실제로 이들 중 80% 이상은 억울한 게 맞다.
무기 없는 이들이 절반이오, 나머지 인물들도 칼 한번 빼 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연좌제는 물론이고, 유죄 추정의 원칙이 당연하게 퍼져있다.
이대로 붙잡힌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목이 잘리리라.
‘아. 다들 욕설은 했으니 귀족 모욕죄가 성립되려나? 그럼 억울한 건 아니겠네.’
“닥치고 듣거라! 본래라면 재판조차 과분하여 즉결 처형을 해야 옳으나, 그런 너희를 가엾이 여겨 이 자리에서 재판을 열어주시겠단 분이 있으시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모든 신경을 기사에게 기울였다.
당연하다.
앞으로 나타날 이가 자신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으니.
“기우는 철탑 속에서 단 하나 현명하신 분. 가장 높은 곳에서 올라 가장 낮은 곳까지 빛을 비추는 태양. 2 왕자, 보드엠 드 그리다니아!”
- 척! 처억!
선두에 선 기사가 절도있게 발을 옮기며 수백의 시선이 몰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준다.
그렇게 비어버린 자리를 메우듯…
기사 뒤편에 가려져 있던 남성이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 저벅. 저벅.
기사에 비하면 초라한 신장.
용병보다 훨씬 못한 덩치.
훈련은커녕 선천적인 병을 앓고 있는 듯, 왜소하기까지 보인다.
하지만 서늘함이 느껴지는 철 가면 때문일까?
일렁이는 카리스마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도합 천개가 넘는 동공이 그를 향했지만, 그의 고개는 전혀 땅에 가 있지 않았다.
가면 속에 보이는 눈동자는 올곧고 선명했으며, 수백의 청자들을 말없이 흩었다.
그것만으로 천한 피를 가진 용병들은 저 남자에게 위압되었다.
이들 중 왕자보다 힘이 약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텐데도.
- 척!!
“왕자님을 뵙습니다!!”
“왕국의 태양을…”
“고귀한…”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에 모두가 굳어있던 때.
용병 중 20%가량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외의 뜻을 보내었다.
그중에서는 당연히 나도 있었다.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무릎을 꿇은 이들은 하얀 고래와 철사자, 하늘 산맥의 간부들이다.
2 왕자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를 주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짜 맞추지 않은 문안 인사는 우리가 한통속이 아님을 어필하기 위함이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아까 눈에 들어왔던 눈치 빠른 용병 몇몇이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우리를 따라 했으니까.
“나 보드엠 드 그리다니아는… 왕국민을 아낀다.”
잠깐 이어진 정적 후 열린 왕자의 입.
저절로 집중도가 올랐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든 이들이 왕자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이유다.
“왕국민 또한 과인을 아낀다. ‘가면 쓴 천사’라는 과분한 호칭을 붙여줄 정도이니.”
2 왕자가 서두를 꺼낸 것과 별개로, 용병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 일은 최대한 작게 넘어가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명이 길어질 확률이 커질 테니까.
하지만 범죄 현장에 무려 왕자가 나타나 버렸다.
푸른 피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혈통을 잇는 그가.
왕실 기사와 용병.
아무리 2 왕자가 왕국민을 아낀다고 한들,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보지 않아도 명백한 상황이다.
“비록 커다란 죄를 지었다고 한들, 그대들 역시 과인의 눈에는 어깨에 짊어진 왕국민! 하여, 과인은 같은 귀족인 왕실 기사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등 편파적인 재판을 하지 않으리라 약속한다.”
허나 이어진 왕자의 말에 용병들은 희망을 품었다.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동아줄은 단 하나였으니까.
잡지 않으면 무조건 죽는 상황에서, 괜한 기대를 버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현자는 용병 중에선 없었다.
“그런 과인이 판결 내리기를…”
- 꿀꺽.
수백의 용병이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철 가면 속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이미 결과를 알면서도, 나 역시 긴장이 차올라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렇게 왕자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그대들은… 죄가 없다.”
광장에서 기적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