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왕실 기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주먹과 칼날이 부딪혔는데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것이 기이하게 여겨졌나 보다.
심지어 이 칼을 그냥 칼이 아니다.
얇은 사슬 갑옷 정도는 날도 상하지 않고 쉽사리 끊어내는 마법이 인챈트 되어있는 것이다.
- 끼기긱…
“헛! 얕은수를!”
칼날을 손바닥으로 잡아 쥐어 기사의 무기를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이를 눈치챈 놈이 칼날을 거두며 실패로 돌아갔다.
오랜 시간 이어지지 않을 대치가 시작되었다.
크게 소란이 이는 뒤편 광장과 반대로, 왕성의 방향과 이어진 대로는 정적이 감돌았다.
우선 핏줄을 타고 날뛰는 혈류를 잠재웠다.
‘혈귀(血鬼)화’는 재사용 대기시간이 없는 스킬이다.
데이지에게 받은 포션이 있으니 어느 정도 무리할 수는 있으나,
과신하면 파멸밖에 남지 않는다.
“눈이… 너, 인간이 맞나? 동공의 색은 마법으로도 못 바꿀 텐데…?”
“왜 못 바꾼다 생각해? 네 견식이 짧은 거겠지.”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작게 혀를 찼다.
놈이 기습에 당해주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는데.
“검은 머리에 강철과 같은 강도의 주먹. 동공의 색도 바뀌며, 기사와 맞먹을 정도의 무력을 갖춘 용병?… 눈에 띄는 것투성이인데, 그중 단 하나조차 들어본 바 없어. 넌…”
“내가 좀 뜬금없이 솟아나긴 했지. 그보다 언제 덤빌 거냐?”
“……”
대치는 조금 더 이어졌다.
우리는 쉽사리 자세를 잡은 상대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한 수를 교환하며, 서로가 가진 무력의 척도를 어렴풋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와 놈의 수준은 엇비슷했다.
어설프게 달려들면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 버릴 정도로.
- 띠링!
=
[이름] 션 쿼시
[직업] 왕실 기사
[힘] 49 [민첩] 47
[체력] 50 [지능] 9
[기교] 46 [매력] 17
[마나] 217
[특성] -
=
‘…저번 영지전에서 봤던 중년 기사와 엇비슷한 정도네.’
상대의 기본 스텟, 힘·민·체의 평균은 대략 49.
내 기본 스텟의 평균은 대략 38.
무려 평균 스텟이 10 넘게 차이 난다.
하지만 충분히 맞설 수 있었다.
잠깐 쓸 수 있는 혈귀화와, 패시브 스텟 버프를 합치면 놈의 스텟을 뛰어넘으니까.
중요한 건 혈귀화 때문에 장기전으로 가면 힘겹다는 건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너 급한 거 아니였냐? 지금 실시간으로 네 선배들은 죽어가고 있다?”
“……젠장!”
급한 것은 내가 아닌 놈이다.
작게 도발하자, 녀석이 초조한 얼굴을 하며 내게 달려든다.
나의 빈틈을 찾을 시간따윈 없다는 걸 알아챘나 보다.
- 후욱…
아까부터 나를 유혹하던 혈귀화의 힘을 받아들인다.
결박되었던 사지가 풀려나며 뇌리를 태우는 자유의 쾌감이 나를 흥분시키려 든다.
하지만, 흥분하진 않았다.
“흐읍!”
- 까앙!!
날아오는 검면을 주먹으로 쳐냈다.
기사의 상반신이 뒤틀리며 자세를 잃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달라붙어 연격을 펴내려 했지만…
놈이 예상했다는 듯, 기이한 각도로 몸 전체를 돌리며 칼날을 내게로 틀어내었다.
- 쉬익!
평소에 이런 자세가 가능하게끔 훈련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특이한 공격이었다.
의미하는 것은 하나 아닌가?
‘젠장! 검술!’
균형을 잃은 척해 상대의 공격을 유도한 뒤, 예상치 못한 일격으로 목숨을 끊는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쓰고 나를 끝장내기 위한…
놈이 익히고 있는 검술의 고급 반격기이자 비장의 수쯤 되는 놈이리라.
위에서 아래로.
척 보기만 해도 심상치 않은 위력이 깃든 칼날이 나를 짓이겨 든다.
주도권이 좀 넘어가겠지만, 사념각으로 한번 피할까?
아니.
싫다.
“하하! 어리석기는!”
칼날을 향해 주먹을 뻗는 나를 본 기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놈의 그리는 미래에는 오른팔이 박살이 난 내가 있겠지.
기사가 승리에 대한 확신이 담긴 얼굴을 했다.
동시에 이 칼날을 정면으로 상대하기로 한 나에 대한 조소도.
대응하는 대신 묵묵히 주먹을 내질렀다.
전신에 고르게 분포한 근육을 끌어다 쓴다.
하체는 무엇보다 굳건하게.
등과 허리는 충격의 여파를 받아낼 준비를.
아무런 잡기술이 없기에 도리어 강한,
올바른 자세로 올바르게 팔을 내지른다.
곧.
인간의 주먹과 마법의 힘이 담긴 칼날이 마주쳤다.
- 콰드득!!
“이런 미친!”
칼날이 짓뭉개졌다.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것이 목표였던 나로서는 살짝 아쉬운 성과였다.
괜히 아티팩트가 아닌가 보네.
“어,어떻게 주먹이…!”
세기의 연금술사가 만든 골렘의 몸체도 부순 주먹이다.
고작 낮은 레벨의 마법 좀 걸린 칼날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왕실 기사가 경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칼에 생긴 변화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 후욱!
방금 내가 받아친 공격.
몸의 균형을 크게 뒤틀어 공격하는 회심의 수다.
그런 공격이 정면에서 박살 났으니, 빈틈이 훤히 드러날 수밖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나를 본 놈이 칼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크게 당황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방어할 자세를 찾는 것이다.
왕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에 입단한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네?
하지만 어떻게든 취한 반격 자세는 전혀 의미 없었다.
그래.
카운터 기술은 회피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공격할 때 써야지.
느려지는 시야 속에 놈의 움직임이 확실하게 읽힌다.
내 다리와 의지가 합일화 되어 놈의 빈틈을 향해 움직인다.
사념각(邪念脚).
“뭣?”
- 콰아앙—!!
제대로 들어간 주먹이 판금 갑옷을 울린다.
놈이 바닥을 튕겨저 구르며 자신의 토사물을 뿜어내었다.
마법이 인챈트 된 갑옷 때문에 손맛은 없었지만, 적어도 늑골 몇 대는 부러졌겠지.
날이 뭉개진 칼은 놓쳐 저 멀리 날아갔다.
검을 잃은 기사?
승기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 탁탁탁!
고통을 수습할 틈 같은 건 주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엎어진 놈을 향해 달려갔다.
“끄으… 끅…”
‘허, 독한새끼.’
놈이 눈을 뒤집으면서까지 몸을 일으키려 노력한다.
이대로 편히 누워있으면 영원히 편해진다는 걸 알아챘나 보다.
정신력 하나는 봐줄 만 하네.
터져 나오는 헛기침을 눌러 삼키며 놈에게 향하는 발을 옮겼다.
잠깐, …기침?
내가 기침을 하려 했다고?
재빨리 입천장을 혀로 맛보았다.
날카로운 미각과 후각이 급한 와중에도 확실한 정보를 전달했다.
알싸한 쇠의 향기, 톡 쏘는 피 맛이 감돌았다.
인체 내벽의 점막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분명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는데.
- 후욱…
즉시 혈귀화를 종료했다.
빠르게 돌던 피가 제 온도를 되찾는다.
동시에 엄청난 상실감이 나를 덮쳤다.
물론 테라포밍 세계에서 몇 번이나 연습하며 익숙해졌기에 신경을 건드릴 정도까진 못되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혈귀화를 너무 많이 사용했다.
잠깐잠깐 끊었다 사용했다고 한들…
잠입할 때도, 조반 돌턴을 죽일 때도, 심지어 저놈을 기습할 때도 썼다.
‘젠장… 쌓인 부담이 터질 때가 되긴 했네.’
혈귀화는 몸에 부담이 쌓일수록 붕괴 속도가 가속화된다.
지금 몸 상태를 점검해 보니…
1분이라도 더 유지했다간 1만 카르마를 써서 최상급 포션을 마셔야 할 뻔했다.
“쿨럭! 거, 주먹이, 콜록! 좀 맵군.”
혈귀화가 풀리며 달리기 속도가 느려진 사이.
결국 놈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 자세를 잡았다.
두 주먹이 나를 향한다.
칼을 잃었으니 근접 격투를 사용하며 반항하겠다는 뜻이다.
“주먹으로 나랑 싸우겠다고? 그냥 포기하지 그래? 항복하면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해둘 건데.”
“……”
“나라고 준 귀족을 죽이고 싶겠어? 난 머리카락이 눈에 띄어서, 수배서에 오르면 감당이 힘들다고.”
혈귀화를 쓰지 않으면 놈과 나의 스텟 차이는 너무 많이 난다.
싸워도 이길 자신은 있지만…
정면으로 싸우는 걸 피할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은근슬쩍 생존 본능을 자극하며 항복을 권유했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해 연기하며.
그러나 놈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후우… 쉽,지는 않을… 쿨…럭…! 거다. 내가 한때는 도그파이트 좀 했거든…!! 콜록! 콜록!”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놈이 제정신을 찾지 못했을 때 처리해야 한다.
마법 갑옷도 내 주먹의 위력을 크게 줄여주지 못했는지, 놈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후욱!
내 안면을 부수려 드는 강철 건틀릿을 고개를 틀어 피했다.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속도.
스텟의 차이를 생각하면 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어야 한다.
그만큼 기사는 약해져 있었다.
- 후욱! 훅!
하지만 방심할 거리는 못 되었다.
개싸움을 좀 했다는 말이 허풍은 아닌지, 꽤나 주먹이 날카롭게 사각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몸을 키우기 위한 헬스 경력은 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전투 경험을 쌓기 시작한 건 고작 1년 남짓.
하지만 녀석은 한 자릿수 나이 때부터 수련에 매진해 온 왕실 기사다.
그 대부분이 검술 수련이라고 한들, 몸을 전투에 쓰는 것은 익숙하리라.
수련에 소모한 시간만 놓고 본다면 내 쪽이 부족할 수밖에.
허나…
나라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건 아니다.
- 스륵…
“큭!”
벌어진 놈의 다리 틈에 오른 다리를 집어넣고 거세게 당긴다.
다리를 걸어, 하체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여러 무술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안다리 걸기다.
내 주먹만을 주시하고 있던 놈은 당황한 얼굴로 허리에 힘을 준다.
하지만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주자, 저항력을 상실한 채 기술에 걸렸다.
- 쿠당탕!!
“이건 뭔…!!”
“난 여러 무술도 익히고 있거든. 대부분이 초보에 불과하지만… 그 개수가 수십 개면 이야기가 다르잖아?”
뒤통수를 돌바닥에 박은 놈이 고통스럽게 나를 올려다본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지구의 기술은 교본처럼 깔끔하게 들어갔다.
매번 크리스와 근접 전투를 지겹도록 훈련한 효과가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다른 것이면 몰라도, 무기 없이 맨몸으로 싸우는 초 근접전에선 나보다 한 수 앞선 상대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미 상대도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있다.
굳이 마나를 때려 박아 가며 무식하게 갑옷을 부술 필요는 없다.
자넷의 말대로라면 이 갑옷은 비싼 거라고 했고…
칼은 못 쓸 정도로 망가졌으니 갑옷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 팍! 파악!!
나는 누운 채 손을 들어 조금이라도 반격하려는 놈의 팔을 다리로 강하게 걷어차며 제압했다.
다리는 금강수(金剛手)로는 강화가 되지 않았기에 좀 아팠지만, 그래 봐야 멍이 드는 정도다.
“살려줘?”
“나,나를 죽이면 네 말대로 수배서에 올라갈 것이다.”
“…기회를 줬을 때 잡았어야지.”
- 푸욱!
“커헉…!!”
드러난 놈의 목덜미에 아공간에서 꺼낸 단검을 박아넣었다.
갑자기 날붙이 공격이 들어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왕실 기사는 칼날을 막지 못했다.
식어가는 눈빛에는 경악이 깃들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주먹으로 턱을 쳐서 기절시킬 줄 알았나보다.
“끄륽…!! 끏…”
“…넌 최후의 최후까지 놀라기만 하네.”
- …우득.
왕실 기사는 목에 단검이 꼽힌 채 작게 경련했다.
놈을 조금 편하게 해주고자, 단검을 더 깊이 박아넣어 목뼈를 강한 힘으로 끊었다.
그제서야 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조반 돌턴과 션 쿼시…
이걸로 오늘 두 번째인가?
미세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까마득한 세월 전에는 사람이었던 실험체를 죽일 땐 별 감정 들지도 않았는데.
“쯧.”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재능을 지닌 사람만 될 수 있는 왕실 기사라서 그런 걸까?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나이임에도 높은 스텟과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지닌 재능이 뛰어나단 것이겠지.
그가 가진 재능은 단순히 무형적인 영역에 그치지 않았다.
저 우월한 키와 덩치를 보라.
마치 나와 엇비슷할 정도로 컸다.
사실 션 쿼시만 특출나게 이런 것이 아니라, 왕실 기사 대부분이 체격이 커다랬다.
당장 난전의 선두에서 로저와 칼을 맞댄 번 그레이가 그러했고,
내가 죽인 조반 돌턴이 그러했다.
‘덕분에 키를 변경할 수 없는 디시빙(Deceiving)으로도 쉽게 잠입이 가능했지만.’
몸에 쌓인 혈귀화의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데이지가 준 힐링 포션 한 개를 마셨다.
물론 빈 병도 잊지 않고 챙겼다.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니까.
- 후우…
나는 작게 눈을 감고 차오르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굳이 크리스에게 혼자 이놈과 싸우겠다고 말한 보람이 있다.
“마나로 찍어누르지 않고 이겼네. 8레벨 이상의 검술 스킬을 가진 놈을.”
이번 싸움에선 지구에서 마나를 회복하고 오지 않았다.
순수한 전투 능력만으로 왕실 기사를 상대한 것이다.
지금까지 크리스와 함께 죽어라 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 사실이 나를 고취시켜, 상당한 의욕이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