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번 그레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감히 용병 따위가 귀족인 자신에게 욕설했다며 대노하기 보다는,
현재 지천에 깔린 분위기를 읽는 것을 선택했다.
애초에 성씨 없이 자라다가 왕실 기사가 되며 준 귀족이 된 그다.
여타 순수혈통 귀족보다 훨씬 적은 번 그레이의 선민사상은, 이성을 흐릴 정도까진 못되었다.
그의 이성은…
그를 비롯한 왕실 기사들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젠장, 이거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말을 신중히 골라 해야겠어.’
그가 기사단에서 생활할 때 겪었던 하극상이 일어나기 직전인 상황.
상황은 그때와 유사했다.
그러니 번 그레이가 할 대응도 비슷했다.
후배들이 단체로 반발을 보일 때.
더 강한 억제가 필요한 경우와, 조인 억압을 약간 풀어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저 칼을 빼 들기 직전인 용병의 날 선 눈빛을 보라.
지금 상황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러니 번 그레이는 자신 쪽이 먼저 부드러움을 보이기로 결정했다.
“잠깐. 진정하게. 무언가 오해가…”
“이 개보다 못한 자식이! 감히 선배님께!”
- 퍼억!! 콰장창!!
“크헉…!!”
번 그레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조반 돌턴이 욕설을 한 용병을 거세게 걷어찼기 때문이다.
‘저런 미친 자식이! 이럴 때마저 눈치가 없으면!!…’
용병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날아가, 고기와 술이 쌓여있던 테이블을 박살 내며 쓰러졌다.
잘 구워진 고기가 더러운 땅바닥에 나뒹군다.
술통이 깨져 광장의 바닥을 질척하게 적신다.
고작 이 광장에 있는 음식의 1%도 안 되는 적은 양이지만, 절반쯤 흥분한 용병들 눈에는 다르게 인식되었다.
슬슬 본격적인 흉흉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괜찮다.
곧바로 달려들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까지 용병들의 이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한 뒤 조용히 물러선다면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 한 번 그레이는, 자신의 멍청한 후배의 돌발적인 행동을 제지했다.
“멈춰!! 조반 돌턴!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하지만 이 더러운 놈들은 주제도 모르고 왕실 기사단을 모욕했습니다! 이는 저희가 수호하는 왕실을 모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중죄입니다!!”
- 콰직! 콱!
주먹 말고 입으로만 주의를 준 것이 실수였을까?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한 조반 돌턴은, 흙먼지를 머금고 바닥을 뒹구는 고기를 발로 짓밟았다.
몇 번이나.
“조반!! 젠장!”
- 저 씨발 새끼가…
- 후우… 후…
- 하… 시발… 큭큭…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 목적임이 명백한 그 행동에 용병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반 돌턴이 칼을 빼 들고 부서진 테이블에 파묻힌 용병에게 다가갔을 때.
번 그레이는 참지 못하고 그의 행동을 폭력으로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조반의 몸에 닿지 못했다.
용병 사이에 숨어있던 용병이 갑작스럽게 조반 돌턴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려,
광장의 끝에 있는 과일 가판을 향해 휙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용병에게 한 행동을 똑같이 돌려주려는 것처럼.
- 후욱!!
“으악?”
- 콰장창!!
왕실 기사단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을 갖춘 조반의 몸이 하나의 저항도 없이 들렸고,
또 던져질 때 역시 오히려 몸을 맡기는 모양새였지만…
번 그레이는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일이 터져버렸고, 당장은 상황의 악화를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선 조반을 들어 던진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저 남자가 여기 왜 있어? 연회는 유적 발굴에 참여한 용병들만 온다면서!’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수십 개 새겨진 상흔의 덕에, 그런 눈을 해도 위험한 분위기를 감돌게 해주는 얼굴.
수도에 산다면 모를 리가 없는 인물이다.
“용병 길드장 로저?”
“방금 댁네 기사가 테이블에 처박은 게 내가 아꼈던 놈인데, 이리 죽는 걸 지켜만 보면 면이 안 산단 말이지?”
- 휘익! 잘했다!
- 귀족이든 기사든 다 꺼지라 그래!
- 그래! 길드장 아니면 누가 용병을 챙겨!!
용병들이 큰 소리로 환호했다.
왕실 기사단의 편을 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쪽도 한번, 나도 한번. 서로 쌤쌤. 어때?”
“…왕실 기사를 건드린 죄는 추후 묻도록 하지.”
“큭큭. 처맞은 걸 이를 어미가 없으니 주인님한테 징징댄다? 뭐 좋지.”
“개… 자식이…! 넌 귀족 모욕죄 추가다. 후우… 조반!! 이 멍청한 자식아! 당장 튀어나와!!”
발길질에 이어, 아까 고기를 짓밟은 도발도 돌려주는 걸까?
로저가 신경을 대차게 긁어대었다.
하지만 치솟는 분노를 삭였다.
당장은 물러서는 것이 옳았다.
이대로 가면 꼬리를 마는 행색이 되었으나,
무마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방금 로저가 저지른 죄를 빌미로 압박을 가한다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왕실 기사단이 되리라.
“조바안!!”
- …
복귀하기로 결정한 번 그레이는 조반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부서진 가판과 과일 사이에 파묻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조반은 나오지 않았다.
부름에도 앓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음에, 번 그레이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션 쿼시! 가서 조반을 데리고 와. 어서!”
“넵!”
- 탁탁탁.
션이 재빠르게 부서진 가판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새파래진 얼굴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을 때.
번 그레이는 일이 돌이킬 수 있는 선을 넘어섰음을 직감했다.
“목이… 꺾여?…”
가판대를 부수고 나뒹굴며 쓰러져 있던 조반 돌턴.
운이 없었는지, 목이 꺾여서 죽어있다고 했다.
번 그레이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어이쿠. 죽었어? 거 안됐네. 쯧쯧.”
“로저…! 이 개자식이…!!”
능글맞게 웃는 로저의 얼굴과 반대로, 좌중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정체 모를 긴장이 광장에 모인 수백의 인원을 흩었다.
사상자가 나왔다니?
그것도 무려 왕실 기사가?
돌아온 션이 당황한 얼굴로 번 그레이를 쳐다보았다.
“서,선배님. 이거 어떻게 해야…”
“……전원 발검!!”
- 스릉!
번 그레이의 허리춤에 메인 칼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그의 명령을 들은 후배들 역시 마찬가지로 얼떨결에 검을 빼 들었다.
“로저어!! 네 목만큼은 받아 가야겠다!”
번 그레이가 분노에 담긴 목소리로 일갈했다.
폐급인 놈이지만, 그래도 후배다.
동료가 죽었음에서 오는 분노는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모두의 얼굴에는 미약한 분노가 떠올랐다.
하지만…
분위기는 번 그레이의 희망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용병들은 얌전히 수그리는 대신에,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하암… 곱게 뒤져줄 생각은 없수. 한 놈은 같이 갈 줄 알아.”
제일 먼저 왕국 기사를 적대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나른한 목소리를 한 로저가.
“저 병신, 단장을 죽인다는데?”
“그게 되면 저 양반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 없지.”
“개자식들이 선빵을 치고 칼을 뽑아?”
그다음은 하늘 산맥 내부에서 가장 강한 1군이자,
로저의 십수 측근들이.
“이거… 연회를 연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구만. 얘들아, 안 그래? 큭큭.”
“거 본심을 말씀하십쇼. 단장.”
“저 칼이랑 갑옷 존나 비싸 보여. 아티팩트 맞지? 제국에 가져다 팔면 꽤 쏠쏠할 것 같은데?”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제국?”
“앞으로 하얀 고래의 주요 활동국은 제국이다! 좆같은 왕국에선 발을 빼자고!”
““예엡!””
연회의 주최자인 하얀 고래에 이어,
“이 개자식들이! 여기 모인 용병만 수백인데, 하나하나 잡을 수 있을 것 같냐?”
“너네 시발 내 이름 알아? 모르지? 잘 됐다 시발년들.”
“어차피 유적 탐사 의뢰 이후로 수도 근처에 얼씬도 안 할 생각이었다고! 왕국은 니기미. 조금만 외각으로 가도 영향력 좆도 없으면서. 퉷!”
용병들 사이사이에 몰래 녹아들어 숨어있다 선동을 시작한 철사자 용병단까지.
- 스릉! 스르릉!!
싸늘한 긴장을 품었던 분위기가 스위치를 누르듯 순식간에 뜨겁게 뒤바뀌었다.
분노와 허기에 머리가 뜨거워진 다른 용병들도 분위기에 편승했다.
자신들은 절대 단수가 아닌, 이 수백의 분노한 용병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일이 터지더라도 자신을 특정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용기를 주었다.
게다가 총대는 저 든든한 하늘 산맥과 하얀 고래가 메어주기도 했고.
“선배님… 이거… 일이…”
“……”
점점 사기가 끓어오르는 용병과 반대로 번 그레이의 머리는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
원래는 로저의 목만 취한 채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기사들도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싸우면 수에 밀려 패배할 것이 명백한 상황.
죽기는 당연히 싫었고, 제압당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꼬리를 만 채 물러서는 것도 안된다.
용병들이 왕실 기사를 죽였음에도 찍소리 못하고 돌아왔다?
그것도 용병들은 아무런 피해도 없고?
이 소식이 위쪽에 전해지게 되면 단순히 옷 벗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왕실 기사단의 위상에 오물을 끼얹었다며 수감된 채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리라.
‘시발… 이거 재판 들어가면, 기사 단장 그 새끼가 물자 빼돌린 것도 나한테 덮어씌울 것 같은데? 그럼 무조건 목이 잘린다…!’
윗선에 줄이 없기에 평기사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 그다.
손쓸 방법도 없이 재판이 진행될 것이다.
변명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그가 살길은 하나였다.
로저의 목만을 내놓으면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공표하는 것.
용병들의 이성을 되찾게 만들어 싸움을 피해야 한다.
반드시.
“잠깐! 왕실 기사단의 목적은…”
- 채앵!!
“거 시펄. 게이 새끼 마냥 칼 놔두고 입으로 대화하지 말자고. 어?”
“이런 미친!!”
번 그레이는 말을 삼키고 쏘아지는 칼날을 막아내야 했다.
놀랍게도 로저가 먼저 빼든 칼로 그를 공격했다.
예상과 다르게.
용병의 입장에서 기사단에게 선공을 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이다.
그러니 저들이 먼저 덤비기엔 심리적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 작은 틈을 타 다른 용병들을 설득할 생각이었는데…
‘로저 이 개자식! 눈치 빠른 새끼 같으니라고!’
생기가 죽은 눈에 어울리지 않은 재빠른 상황 판단 능력으로 그의 머리를 꿰뚫어 본 것이리라.
- 채앵!!
“참전하겠습니다!”
뒤에 선 후배들이 칼날을 뻗어 로저를 공격해 갔다.
그리고 로저의 측근들 역시 전투에 끼어들었다.
“선배님을 도와라!”
“교본대로, 뭉쳐서 대응해!!”
- 챙! 채앵!!
“죽여! 저 씹새들!”
“일 터진 거, 최대한 빠르게 죽이고 내빼야 해!!”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짧은 도화선에.
곧 광장에 모인 전원이 전투에 휩쓸리리라.
번 그레이는 날아드는 칼날을 막아서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수는…
“션 쿼시!! 당장 기사단으로 뛰어가서 증원을 불러!!”
“네? 넵! 알겠습니다!!”
- 탁탁탁!!
광장과 왕성은 꽤 멀었지만, 기사의 달리기 속도에 비하면 가까운 축이었다.
금방 지원군이 도착하리라.
하지만 그런 번 그레이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 채앵!!
“큭! 뭐야!”
연회장에서 뚝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용병 한 명이 튀어나와 션 쿼시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의 검은 눈.
왕국에 흔치 않은 동양인 사내였다.
“주먹?… 맨손으로 칼날을 어떻게…”
“역시, 방심을 안 하면 쉽게 안 죽어주나 보네.”
기척이 너무나 희미했던 살벌한 기습이었지만, 전투를 눈앞에 두고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션 쿼시로선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들어온 공격은 주먹.
놀랍게도 반사적으로 날을 세워 막은 션 쿼시의 칼날에 베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맨살이 아닌 철로 만든 정교한 의수라도 되는 것처럼.
“크리스! 옷 좀 갈아입고 오느라 늦었어!”
“찬영! 그, 머리! 머리!”
“엇, 고마워! 그리고 이 기사는 내가 맡아 볼게!”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붙은 과일의 파편을 바닥에 버렸다.
하지만 번 그레이는 거기까지는 보지 못했다.
기사들을 둘러싼 용병들의 몸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시발… 이미 포위당해서 사람을 더 빼돌릴 수는 없는데…’
그래도 성벽의 망루에선 광장이 일부 보인다.
지금 이 사태를 본 병사들이 윗선에 보고해, 이미 출동을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버텨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물론 그건 번 그레이의 희망적인 관측밖에 못되었다.
시야가 별로 좋지 않은 일반 병사들은, 이 먼 거리까지 떨어진 연회의 분위기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우연히 얻게 된 술을 즐기느라 바쁘기도 했고.
설령 출동을 지시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끝나있을 테니까.
- 으아아!!
- 세 명이 한 놈을 상대해! 아무리 저 새끼들이 잘 싸워 봐야 손은 두 개야!!
- 활이나 석궁 있는 사람 없어?!
- 시발 칼이면 몰라도 그걸 누가 연회에 가져와!
“젠장! 크윽…”
뜨거운 열기가 담긴 함성과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