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아직 연회가 시작되지 않은 이른 시간.
땅에서 솟은 수백의 용병들이 수도의 이곳저곳을 거닐며 한층 활기를 불어넣고 있을 때,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구조물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높고 두터운 내벽과 그보다 더 높게 솟은 석조 건축물은, 지금까지 봐온 이 세계의 건축 수준보다 반세기 정도 앞서 보일 정도였다.
한때 이 그리다니아 왕국이 얼마나 위대한 번영을 이뤘는지 어렴풋 알 것만 같다.
하지만 볼수록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저 고풍스러운 겉면과 달리, 그 속은 시꺼멓게 썩어있다.
어렴풋이 코끝에 구역질 나는 악취가 감도는 것만 같다.
나의 후각이 물리적인 것과는 궤가 다른, 사상과 이념이 부패하는 냄새까지 감지하게 된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
단순히 친구가 겪은 불행이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진 것이리라.
고개를 털어 잡생각을 떨치며, 구겨진 미간을 주무르며 표정을 폈다.
언제가 찾아왔던 황금기는 저문 지 오래였지만, 왕국은 새로운 태동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
그 변화의 첨병은 나다.
그러니 앞으로 있을 연기에 조금이라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스윽…
시간은 대낮.
어느 대로든 사람이 북적이는 수도임에도,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두 컴컴한 골목은 있었다.
그 골목에 내가 들어갔다 나온 순간…
검은 머리의 검은 동공을 가진 나, 박찬영은 사라졌다.
대신 왕국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갈색 머리칼에 갈색 동공을 가진 서양인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옷은… 평상복을 입는 것이 조금이라도 시선을 덜 받겠지.’
적당히 빠른 걸음으로,
‘고요한 발자국’을 활성화 시켜 혹시 모를 시선마저 방지한 채 왕성을 향해 다가갔다.
금세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내벽이 나를 마중했다.
수도 전체를 크게 둘러싼 외벽은 단순히 외벽로를 거닐며 순찰하는 병사들만 있었다.
왕성을 둘러싼 내벽 역시 순찰하는 자만이 보이긴 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거란 감이 든다.
마법이 있는 세계이니, 분명히 침입자에 대한 마법적 방비가 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마력 함정, 디텍트 인트루더(detect intruder)
종류: 마법
레벨: 3
효과: 침입자 감지
상세:
등록되지 않은 생명체가 내벽을 통해 진입할 경우, 시전자에게 알람이 갑니다.
침입자에게 위치를 알 수 있는 표식이 새겨집니다.
Lv 3의 식별 마법을 담고 있습니다.
Lv 2의 알람 마법을 담고 있습니다.
Lv 2의 표식 마법을 담고 있습니다.
* 지속 시간: 230:59:12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내벽 제어실에 있는 마나석을 교체해 마법의 지속 시간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석벽에 보이지 않게 새겨진 마법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부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고요한 발자국, 디시빙(Deceiving), 상태창까지.
내 능력은 어딘가에 잠입하는 것에 최적화되어있다.
내벽의 주변을 빠르게 돌아보며 빈틈을 찾는다.
아무리 성의 외각이라곤 해도 왕이 거주하는 곳인데 경계가 허술한 곳이 있을까 싶었지만…
성의 뒤편, 아직 나무와 잔디가 완전히 벌초 되지 않아 성벽을 타고 덩굴 식물이 자라나는 그곳에서.
나는 빈틈을 발견했다.
- 띠링!
‘뭐지?… 어째서 이곳만 마법진 활성화가 안 됐어?’
청각을 제외한 다른 오감을 천천히 닫는다.
그러자, 벽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
1분이 지나자 상황 파악이 완료되었다.
나는 어째서 이 벽의 경계만 허술한지 알아냈다.
이 내벽의 안쪽은…
왕국에서 가장 큰 무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역으로 경계가 떨어지는 그곳.
바로 왕실 기사 주둔지가 붙어 있다는 것을.
‘오히려 잘 됐어! 애초에 내 목적지가 이곳이었으니까.’
행운이 2 왕자의 손을 들어주는 느낌.
이로써 왕성의 내문(inner gate)을 통과하려는 사람을 죽이고, 그로 변장해 침입할 필요가 사라졌다.
개간이 끝나지 않아 건물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탓일까?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벽로를 살펴보아도 순찰을 도는 병사 역시 없었다.
- 터억!
금강수(金剛手)로 손을 강화한 뒤,
벽돌과 벽돌 사이 틈에 손가락을 박아 넣으며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성벽 곳곳에 솟은 망루?
지금도 그곳에 있는 병사들이 무얼 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그들은 경계하는 척조차 않고 있었다.
수백의 술통을 광장으로 나르고 있는 하얀 고래 용병단을 심심풀이 삼아 구경하고 있었지.
게다가 나는 ‘고요한 발자국’을 활성화 시키고 있다.
집중해서 인식하려 해도 잘 안 보일 텐데…
저렇게 먼 곳에서, 심지어 따분한 눈길을 해서는 절대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 터억! 터억! 턱!
물론 중요 인물들이 거주하는 심층의 경우는 이처럼 쉽사리 잠입하지 못한다.
분명 수많은 마법 함정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겠지.
그러나 상관없다.
목적지는 내궁이 아닌 이곳.
왕족의 거처와 이리 동떨어진 기사 주둔지니까.
‘…다행히 내벽로에 올라오니 주둔지 안쪽 상황이 다 보이네.’
야외 훈련장을 비롯한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석벽에 기대어 잡담을 나누는 기사, 신발을 휘적휘적 끌며 어디론가 향하는 기사, 후배에게 기합을 주는 듯 목소리를 높여 사납게 압박하는 기사…
전부 내가 가진 스텟 이상으로 강하겠지.
나는 그들의 상태창을 하나하나 열어보기 시작했다.
- 띠링! 띠링! 띠링!
찾는 사람은 간단하다.
저들 중 제일 약한 놈.
혹은 가장 최근에 들어온 막내.
내가 전력을 다해 기습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기사.
솔직히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들은 어차피 곧 적이 될 인물이다.
아니, 이미 적이다.
그러니 한 놈이라도 줄이면 더 좋겠지.
그런 내 눈에 띈 것은, 방금까지만 해도 선배에게 혼났던 그 후배 기사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풀이 죽은 얼굴로 혼자 구석으로 가고 있었다.
*
“젠장… 이걸 걸리네… 운도 없지.”
조반 돌턴은 욕설을 내뱉었다.
혹시 방금까지 자신을 갈궜던 선배가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조반은 자신만 징계를 받은 것이 억울했다.
군수 물자를 ‘소량’ 빼돌려 용돈 삼은 것은 그뿐만이 아닌, 그를 혼낸 선배조차 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그가 기사단에 막 들어온 신입이라곤 해도…
왕실 기사의 권리 정도는 당연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조반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랬다가는 오늘처럼 약식 징계 수준이 아닌, 며칠 전 기사 작위를 받으며 같이 받았던 성을 회수당할 정도로 일이 커지고 말 테니까.
다들 알음알음 제 몫을 챙기고 있으나, 이 일이 수면 위로 떠 올라선 안된다.
군수 물자를 빼돌리는 건 당연히 위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봐, 괜찮아? 아주 죽상이네.”
조반이 아직 익숙지 않은 자신의 성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눈에 익은 남자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동기이지만, 그렇게 막 친하지는 않은 적당한 녀석.
션 쿼시.
“션? 너 아까 다른 선배한테 불려가지 않았어?”
“별일 아니었어. 그나저나 표정 관리하라고 돌턴. 큭큭.”
저 실실 웃는 얼굴.
조반은 어째서 이 동기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평소처럼 조반으로 안 부르고, 돌턴? 놀리러 온 거면 꺼져.”
“…아. 너 성을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불러주면 좋아할 줄 알았지.”
“지랄은.”
방금 갈굼을 당했던 직후인 탓일까?
조반은 살짝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션의 표정이 꽤 진실성 있어 보였기에 조반의 말은 약간 누그러졌다.
“그나저나 조반. 난 네가 나빴다고 생각 안 해. 그냥 저… …저 자식이 예민한 거지.”
“퉷. 나도 그래. 군수 물자는 다들 빼돌리면서… 씹, 선배란 놈이 쩨쩨하게 나만 가지고 지랄이야.”
솔직히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기지만…
그의 편을 들어주자 호감이 올랐다.
그러나 션의 위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 스윽.
“어때. 기분도 안 좋은데… 한잔?”
“술? 너 미친놈! 그거 어떻게 숨겼어?”
“뭐야. 안마실 거야?”
“그럴 리가! 너 좋은 진짜 놈이었구나!”
“큭큭. 자세한 건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어디… 사람 없는 구석진 곳 알아?”
조반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었다.
안 그래도 술이 고프던 차였다.
하지만 술은 선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댄다.
짬이 안 차면 전부 빼앗기는 것이다.
하지만 션은 술을 숨기는 것에 성공했다.
능력이 좋은 건지 담이 큰 건지, 몸에 지니고 다니기까지 했다.
“딱 좋은 곳이 있지! 비품 창고가 내 담당이 됐잖아? 내게 심부름을 시키면 시켰지, 다들 그 먼지 나는 곳은 곧 죽어도 안 오더라!”
“…그래? 적당하네. 숨어서 술 마시기.”
“하하! 오늘 하루 너는 비품 창고에 물건 위치 외웠다고 커버 쳐 줄 테니 걱정 말고 따라와!”
“고마워. 이왕이면 사람을 덜 마주치는 길로 가자고. 괜히 붙잡히면 귀찮아지니.”
“이야, 너 머리 좀 돌아간다? 뺏기면 큰일 나지!”
“잡설 말고 가자고.”
조반은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앞장서 안내했다.
그 발걸음은 비품 창고의 문이 닫혔을 때 멈추었다.
“쩝, 안주는 없겠지만, 그래도 근무 중 술을 마시는 게 어디야?”
“자. 다가와서 술이나 받아. 네 몫이니까.”
“오! 고마워! 어라? 근데 너 눈이 왜 빨갛…읍?”
- 텁! 우드드득!!
션의 동공이 갑작스럽게 빨갛게 물든 것에 대한 의문을 전부 표하기 전.
조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션이 강력한 힘으로 그의 입을 막았으며, 턱과 정수리를 잡고 머리를 반 바퀴 돌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진다.
그런 조반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션의 모습이 검은 머리칼을 가진 동양인으로 바뀌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
시체는 인벤토리에 넣었다.
목을 꺾어 척추를 끊었기에, 출혈은 전혀 없어 뒤처리가 너무나 용이했다.
그가 나를 의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덕분에 소란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여긴 사람도 잘 안 찾고, 놈이 이곳 담당이라 했지? 다행이네. 이곳에서 시간을 좀 때우다 가야겠어.’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다.
그렇다고 모든 용병이 모였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느긋할 때 가기에는 아쉬웠다.
어느 정도 배가 찬 연회 도중보단, 연회 직전에 들어온 방해가 더 자극적이리라.
광장의 시계탑 기준으로 시간을 약속했으니…
적당히 한두 시간만 보내면 된다.
*
“헉헉! 선배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왕실 기사 번 그레이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몇 시간 전, 그가 갈궜던 조반 돌턴이었다.
“뭔데? 아직 덜 혼났어?”
“아,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지금 수도의 광장에서…”
그런 조반의 입에서 나온 말의 요약은 간단했다.
수백의 용병이 연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우리는 법률상 문제가 없으니 압류해도 상관없다고.
그러니 술과 고기를 압류한 뒤,
선배님의 이름으로 기사단에 회식을 벌이자고.
그렇게 한다면 왕실 기사단 내부에서 번 그레이의 영향도는 커질 것이라는 게 결론이었다.
“…괜찮은데?”
“그렇죠? 그럼, 출동할 사람을 불러 모을까요?”
“잠깐. 그 전에.”
“네?”
번 그레이는 한번 고심했다.
이렇게 행동했을 때의 문제점을.
그는 허투루 짬을 먹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번 그레이는 하나의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안도.
“전부 압류했다가는 분명 반발을 사. 심지어 왕실 기사단이 수백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음식을 모조리 압류해서 뭐해? 일부만 빼앗지 뭐.”
“…역시! 선배님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전부 빼앗는 척을 하다가, 일부 선심을 쓰듯 돌려주면 용병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다는 걸!”
“응? 뭐라고?”
“어라… 아니었나요? 그, 있잖습니까. 줬다 뺏으면 반감이 드는데, 뺏었다 주면 오히려 고마워한다는 말이요.”
조반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험악한 분위기로 다 뺏을 듯이 굴다가,
실망한 용병의 분위기를 읽은 척을 한 뒤,
일부만 가져가고 도로 돌려주자고.
그럼 그들이 느꼈던 반발은 기사단에 대한 감사로 덮어씌워 진다는 것이다.
“일거양득이죠! 저희는 저희대로 공짜로 회식을 하고. 대외적으론 아무리 천한 용병이라도 왕국민이기에, 무려 왕실 기사단이 법까지 흘려가며 배려해 준다는 명성을 얻으니!”
“…오?”
“최근, 왕실을 향한 부정적인 민심을 단박에 뒤집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번 그레이는 귀가 솔깃한 것을 느꼈다.
그만큼의 기가 막힌 묘수였다.
‘이놈,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 갔나?’
조반은 아무도 안 걸리는 물자 빼돌리기를 기어코 걸리고 마는 멍청한 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몇 시간 만에 사람이 뒤바뀌었지?
그 해답은 간단하게 찾을 수 있었다.
‘내 훈계 덕이네! 역시, 사람은 욕을 좀 먹어야 빠릿빠릿해진다더니!’
번 그레이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반이 이런 발상을 한 원인은 자신에게도 있으니, 이 공은 그의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둘은 당장 시간이 남는 기사단을 소집해 출동했다.
그는 단순한 기사단 내 고참일 뿐 명령 권한이라곤 없었지만, 세상은 선조치 후보고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윗선에 말했다가 공을 빼앗기면 어쩔 건가?
반 그레이는 은퇴 전에 한 번이라도 부단장을 달고 싶었다.
“처음에는 위협하는 척을 하라고! 알겠지? 그리고 선심 쓰듯 다시 돌려주는 거야!”
“넵!!”
하지만 조반과 번 그레이가 세운 계획은 순탄히 돌아가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고기를 굶은 용병의 흉악함과, 하루 종일 의도적으로 내리누른 허기를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두 명 중 한 명은 그 변수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계획에 넣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