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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201) (201/310)



〈 201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혹시 모를 미행을 위해 빙글빙글 돌아가며 2 왕자를 찾아간 것과 무색하게, 대화는 빠르게 끝났다.
이야기에 중점이  것은 지원받을  있는 자원의 한계와 그 종류.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건 고용된 용병 한 명에게 돌아가는 돈이다.


합의점은 순식간에 찾았다.
왕자는 첫 조율부터, 인당 넉넉한 금액의 고용비를 주기로 약속했다.
아무래도 제국에게서 꽤 많은 양의 금화를 받았나 보다.


‘다 갚아야 할 돈일 텐데, 어쩌려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협상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이후.
나와 자넷은 하얀 고래 용병단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서약서의 지속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해제할 방법도 딱히 없는 이 금제가 풀리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선동도 할 수 없다.


숙소에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크리스와 멜에게 마주 웃어주며,
뼈대만 세워 놓은 계획에 상세한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


“철사자, 하얀 고래는 합류가 확정되었습니다. 만약 하늘 산맥의 도움까지 더해지면, 왕국을 대표하는 용병단 3개 모두 2 왕자를 지지하는 것이 되죠.”

“…하늘 산맥이라…”

“사전에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단순히 그 덩치에 비롯한 무력뿐만이 아니라, 중소 용병  자잘한 용병들은 총대를 멘다는 부담이 거의 사라질 테니까요.”

서약서의 효과가 끝나길 기다리며 하루를 푹 쉬었다.
그리고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사라지자, 자넷을 독대해 설득을 시작했다.

자넷은 용병 길드장이랑 친하다.
나를 비롯한 타인에게 이야기해 주기 힘든 사적인 부분까지 알고 있는 듯하니,
로저를 설득하기에 가장 걸맞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녀다.

“아재는… 참, 후우…”

자넷이 미간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깊은 고민이 담긴 숨결이다.

“걸리는 것이 있으신가요? 아! 로저님은 이런 대규모 전투나, 큰 세력을 적대하는  위험한 일을 피하는 신중한 성격이라던가.”


무려 용병 길드의 수장을 맡은 남자다.
생기가 죽은 눈빛을 가진 것과 다르게,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는 타입일 수도 있다.
힘이 좌우하는 세계에서 리더라는 자리는…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있기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자넷은 고개를 저으며 나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반대야. 오히려 귀족을 썬다는 이야길 들으면 당장 칼 빼 들고 합류할걸. 그것도 가장 선두에서.”


“네? 그럼 좋은 것 아닙니까? 쉽게 아군을 얻을 기회인데요. 그것도 강력한 힘을 가진.”

“너는… 못 봐서 그래. 그 아재가 얼마나 위태롭고, 자기 몸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덤벼드는지.”

“…그 수많은 상흔은 역시…”


“마치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싸우려는 느낌마저 들더라니까? 눈앞의 적을 길동무 삼은 채. 쯧…”


그의 전투 스타일에 대한 묘사는 원작에도 스쳐 지나가듯 나왔다.


『필사즉생』, 위험 부담을 안을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기이하기 그지없는 특성.
과연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  일이나 있을까 싶은 특성이다.
다른 차원에서의 죽음이 죽음이 아닌 내게도, 죽음을 도외시하기란 내 의지대로 조율하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인 이상 생존 본능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길드장인 로저는 이 특성을 누구보다 더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아재가 전선에서 은퇴한 채 길드의 운영에 힘을 쏟는다는 선포를 듣곤 내심 기뻐했어. 이후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을 잃은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나으니까.”

딸을 잃은 로저는 자넷을 친딸처럼 여기고,
아비답지 않은 아비를 둔 자넷은 로저를 친부처럼 여겼다.
그러니 자넷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칼을 손에 놓은 로저가, 전선에 섰다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사즉생』의 효과를 읽은 나는 알 수 있었다.
불사신이란 별명을 가진 로저는, 그 위명에 걸맞게 절대 전투에서 죽지 않는다고.
적어도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천성을 잃기 전까지는 로저의 시체를 볼 일이 없다.


“파계승아. 그냥 아재한테 길드원들만 빌려달라고 하면  될까?”


“안됩니다.”


걱정 어린 눈으로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
자넷은 용병단 안에서 나의 상급자이지만, 2 왕자에게 의뢰받은 일에 대한 결정권은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판단하길, 이 부탁은 거절해야 한다.

목숨을 거는  로저 뿐만이 아니다.
나도, 크리스도, 멜도, 2 왕자마저 목숨을 건다.
그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는 하드모드 퀘스트의 클리어 확률을 높이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 해야 한다.


“…어째서.”


“그랬다간 미리 이야기해놓는 의미가 사라지잖습니까? 떠올리세요. 하늘 산맥은 모든 용병단 중 유일하게 결속이 강하지 않은 용병단이란 것을.”

“아… 젠장, 네 말이 맞네. 아재네 용병단은 들어오는 인간 말리지 않고, 나가는 인간 붙잡지 않으니까……”


“단장인 본인이 뒤로 빼서야… 다들 용병단을 탈퇴하고 도망칠 확률이 높습니다. 적어도 얼굴 정도는 반드시 비춰야 합니다.”


결속과 개인의 강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덩치를 불리는 것에만 집중한 특이하기 그지없는 용병단이다.
입단과 퇴출이 자유로웠기에 그 크기는 순식간에 불어났으나…
당연히 놓치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고려하였을 때.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결속력을 부여하려면 로저의 존재가 필수적이어야 한다.


“정 걱정되시면, 지휘만을 부탁하면 되지요. 굳이 길드장님 본인이 나설 필요 없이, 길드원만 싸우면 될 일입니다.”


로저가 죽지 않을 확률은 100%는 아니다.
하지만 이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자넷에게 제안할  있는 조건의 한계.
그것을 느낀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정도면 뭐… 아재도 수긍할 것 같고.”

“로저님을 설득할  있는 확률은 어느 정도 됩니까?”


“아재가 변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설득할 수 있어.”

살짝 놀랐다.
고민도 하지 않고 확답을 주다니?
아무래도 자넷을 믿고 맡겨도 될 것 같다.
신경  곳이 한군데 줄어서 다행이네.

“부탁한 일들은… 맡길게요.”


“그래. 아마 별문제 없을 거야.”


이렇게 우리 둘은 대화를 마치고 각자  일을 위해 헤어졌다.


자넷이 할 일은 두 가지다.
첫째가 로저를 설득해 하늘 산맥을 포섭하는 것이고,
둘째가 하얀 고래의 다른 단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녀는 두 부분 전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전자는 방금의 이야기를 통해 확답을 들었다.
후자는 자넷이 쌓아온 어마어마한 신뢰도의 덕에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크리스와 멜은 내가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망설이지 않고 자넷의 제안을 받을 테고… 단원들은 자넷의 능력을 맹신하고 있으니까.’

자넷의 특성인 『양자일택』.
그 특성을 이용해 자넷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해왔으며,
그걸 지켜봐 온 단원들은 자넷에게 설명하지 못할 특별한 감각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혹시 반역이 실패하면?
왕국 밖에서의 의뢰도 종종 받아 인맥도 넓은 그들인 만큼, 그냥 가족과 함께 타국으로 도망치면 된다.
하물며 자넷 못지않은 돈 귀신인 그들에게 수많은 금화라는 달콤한 보상까지 선지급하면…
넘어오지 않을 단원이 과연 있을까?

자넷은 내가 거들 필요도 없이 잘 해낼 것이다.

“아. 혹시 모르니까  옷 좀 받아 주세요.”

- 스윽.

“뭐야? …그냥 평범한 상의처럼 보이는데?”

“그 옷을 크리스에게 전해주면, 제가 단장과 함께한다는 이야기를 믿을 겁니다. 반드시, 꼭 전해줘야 해요? 잃어버리면 진심으로 화낼 겁니다?”

“…선물 받은 거야? 크리스한테?”

“큭큭. 크리스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에요.”


“흐응… 알겠어.”


자넷은 내가 건넨 옷을 조심스럽게 개어서 품에 넣었다.

저 옷은 그것이다.
훈련복의 찢어진 부분을 꽃 모양 자수로 가린 옷.
이젠 시간이 꽤 흘러버렸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풋풋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다.

혹시 입고 다니다 헐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요즘은 인벤토리 안에만 보관하고 있었다.
다른 차원을 여행할 때 입으면 흙먼지가 달라붙으니까.


“그럼 전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파계승, 네가 어떻게 판을 만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해준 계획대로 해볼게.”


“자세한 건 비밀이에요. 하지만 믿어도 좋습니다. 종종 보셨던 수도승의 비술 중 하나를 사용할 것이라.”


“…그 비술이란 것, 진짜 만능이네? 도대체 몇 개야?”


자넷이 터무니없는 것을 들었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씨익 웃어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 터벅터벅.

『양자택일』 특성을 지닌 자넷.
그녀는 이 반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왕자에게 나를 추천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지했지.

이는 암암리에 이번 반란이 성공할 것이라 말해주고 있었다.
최소한, 자넷에게 이득을 안겨 줄 것이라 암시했다.
그러니 내가  심적 부담은 크지 않았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계획대로 이루어지리라.

그녀는 수도에서 자잘한 의뢰를 수행 중인 단원들을  곳으로 모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2 왕자에게 향했다.
내가 짜놓을 판에서, 그 수확만을 거두어 가라고 말하기 위해서.




*




연금술사의 유적에 모인 수백의 용병들.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실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
동시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다.
탐사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모르는 이 없이 유명한 용병단 ‘하얀 고래’가  이름값에 걸맞은 실적을 올린 이후,
추가로 발견되는 곳이 전혀 없긴 했으나…
적어도 한 달은 횃불과 랜턴의 빛에 의지한  긴장을 놓지 못하는 일상이 계속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탐사는 조기 종료되었다.
원래 오기로 한 고위 귀족을 대신하여, 유적의 책임자가 된 2 왕자의 명령 아래.
심지어 의뢰를 ‘성공’으로 분류해줘, 보수가 깎이지 않은 전액을 지급받기까지.
상상치 못한 행운이 겹친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용병들은 자비로운 2 왕자에게 순수한 감사를 보낼 뿐, 의문을 표하는 자는 많지 않았다.

“햇빛이 보인다! 난 저 계단 끝에 보이는 햇빛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고!”
“후우… 드디어 끔찍하기 그지없는 그 괴물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겠어.”
“흐흐흐. 이 정도면 3~4개월 수입은 한 번에 들어 왔는데?”

수백의 인원이 밝은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지상에 오르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지 희희낙락 떠들면서.

그런 그들에게 찾아온 행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뭐? 연회? 술이랑 고기를 무료로 먹을  있다고?”


하얀 고래가 가진 힘을 과시한다는 명목으로,
이번 의뢰를 함께한 모든 용병에게 술과 밥을 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연회 시간은 오늘 저녁.
딱 수면으로 피로를 풀고 난 뒤에 나오면 알맞을 시간이다.

소문에 의하면 이미 음식과 술을 대량으로 준비해 놓았단다.
적어도 수백이 먹을 분량으로.


“하얀 고래? 헛소문이겠지. 하늘 산맥이면 몰라도.”
“하긴, 하얀 고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
용병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하얀 고래는 이럴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흩어져서 여관방을 잡으며,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님이 밝혀졌다.
어느 여관,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술이 동났으니까.
전부 하얀 고래 용병단이 매입한 것이다.


“아니, 분명 철사자랑 하늘 산맥은 종종 자기 구역 내 용병에게 술을 사기도 했지만…”

“그 돈 귀신들이 모인 하얀 고래가? 이렇게 많은 인원한테?”


“와… 순수 소득만 따지면 하얀 고래를 따라올 용병이 없다더니, 진짜인가 봐. 도대체 얼마나 벌어 재끼는 거야?”

“크! 역시 이름값을 하는구만! 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어! 역시 용병의 고충은 같은 용병이 알지! 안 그래?”

수도의 광장에 가니 아니나 다를까.
하얀 고래 단원들이 열심히 술통을 옮기고,
간이 화덕을 제작하고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니 아직 의심하던 이들도 활짝 웃기 시작했다.
수백의 용병은 연속적인 행운에 크게 들떴다.

그렇게 저녁의 만찬을 기대하며  시간 쌓인 피로를 각자 풀기 시작했다.
수면. 목욕.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
공통점이라면, 공짜 밥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공복을 유지했단 것이다.

- 시끌시끌!


금세 해가 지고, 저녁이 됐다.
넓은 광장에는 수많은 테이블과 수백의 용병들로 가득 찼다.


“자! 하얀 고래가 주최하는 연회에 다들…”

“우우!”
“잡설 말고 시작해라! 배고파 뒤지겠다고!!”
“왕국에서 제일가는 하얀 고래 용병단의 통을 보여달라고! 속 좁게 질질 끌거야?!”
“제일? 제일은 아니지 않…”
“병신아. 고기 사주잖아.”
“아! 왕국 제일 용병단, 하얀 고래 만세!!”


“하하! 좋아! 다들 고기를 들고 먹어! 마셔! 시발  내가 산다!”

“와아아악!!!”

자넷이 호탕하게 외쳤다.
거대한 호응과 함께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
안타깝게도 이들이 고기와 술을 즐기는 일은 없었다.

기사단에 잠입한 누군가가 선동이라도 한 듯,
아주 요상한 타이밍에 등장한 왕실에서 기사들이 행패를 부렸으니까.


“그마안!! 수도에서 일정  이상 무력 집단의 집합이 금지인 것을 모르나!”

“무식한 용병들이 법을 알 리가 없지. 감옥에서 평생 썩고 싶지 않으면 당장 떨어져!”


“해산해! 해산하라고!”


 주간 육포와 건빵만 먹다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다.
심지어 하루종일 굶어서 배가 등짝에 달라붙었다.
눈앞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를 풍기는 고기와,
황금빛의 술통이 겹겹이 쌓여져 있다.

그런 수백의 그들을 막아선 ‘고작’ 스물 남짓의 기사들.
용병들의 속에 불길이 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뭐라? 물러서지 못해! 어디 용병 따위가 준 귀족인 기사에게 어디 감히 반말…”

“그, 기사 양반. 후… 애미가 없으신가?”


“…허?”

“너 애미 없냐고.”

술통을 압류하고 자기네들끼리 즐기기 위해 신나게 달려 온 기사들은…
걸쭉하기 그지없는 용병의 욕설에 벙찐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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