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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98) (198/310)



〈 19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 저벅저벅.

“단장님은 그날, 유적 아래에서 오늘 제가 받은 제안을 들은 건가요?”

나와 자넷.
그리고 나를 감시할 기사와 함께 복귀하고 있었다.

기사는 나름 위장을 한다고 플레이트 메일 대신에 평상복을 입었지만…
솔직히 평범한 왕국민이 허리춤에 칼을 차고 수도를 거닐  없으니 되려 눈에 띄었다.
차라리 가죽 갑옷을 입고 용병인 척을 하지.

“으음… 맞긴 한데…”

- 스윽.


자넷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앞섶을 슬쩍 열었다.
그렇게 일부분 드러난 선명한 골짜기.
왕족을 대면하느라 긴장을 했던 것일까?
옷 속에 습기가 찬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보게 된 계곡이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자넷이 보라고 한 건 자신의 가슴골이 아니다.


그녀의 가슴에는 작은 초승달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내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과 동일한 크기, 동일한 형태, 동일한 색.
즉, 자넷 역시 발언 금지 서약서를 썼다는 것이리라.


“오… 감사합니다.”


“…야! 미,미친 어딜 보는 거야! 가슴 말고 새겨진 문양을 보라고!”


퍼억!

“큭큭큭.”

자넷이 붉어진 얼굴로 내게 화를 내었다.
그도 모자라서 발로  허벅지를 차기까지.
평소 털털하던 그녀답지 않은 숫처녀 같은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무튼 자넷이 미리 내게 2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못 해준 이유를 알 것 같다.
제약 때문이란 것이겠지.
어쩐지 언질 하나 줄 법한데 조금도 주지 않더라.

“…애인도 있는 놈이. 이거 크리스에게  말할 거야. 너 없을 동안 우리 꽤 친해졌다?”

“그럼 저는 모든 단원의 앞에서 변명해야겠네요. 단장이 직접 자신의 가슴을 보여줬다고.”

“아. 개자식. 저리 치워.”


뒤쪽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척 보기에도 과묵해 보이는 기사는 나와 자넬이 즐겁게 떠들든 말든 조용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자넷도 기사를 의식한 건지 말수를 줄였다.

“…그럼 나는 가볼게. 어차피 내일 보게 되겠지만.”


자넷은 하얀 고래가 머무는 숙소로 돌아갔다.
나와 기사는 연금 공방으로 향했고.


주어진 고민의 시간은 약 하루.
늘리려면 더 늘릴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굳이 시간을 달라  이유는 확인할 것이 있어서다.
필요한 시간은 하루면 차고 넘친다.
내 예상이 맞으면…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반 제국파를 부술  있을  같다.


- 스윽.

하늘을 보니 아직 해가 저물려면 한참 남았다.
다행히 출발하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데이지를 많이 기다리게 하지는 않은  같다.


슬슬 눈에 연금 공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전.
내 뒤를 따르는 기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기사님. 혹시 잠깐 밖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째서지?”

“타인에게 들려주고 싶지는 않은 사적인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라. 잠깐이면 됩니다.”


“으음…”

보기엔 고지식해 보이는 기사다.
그래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도망친 즉시 나를 추격할 자신이 있을 것이다.
연금 공방의 입구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물론 실제로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 전혀 상관없지만.’

혹여 기사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연금 공방에 따라 들어온다면…
확인 작업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자네는… 연인이 있다 들었다.”


“……”

기사의 말에 눈썹이 살짝 씰룩거렸다.
지금 설마 도망치면 연인을 인질로 잡겠다고 말한 건가?

물론 그의 표정과 말투는 위협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해석해 본다면 이리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이 순간에 크리스를 언급할 이유가 없다.


“방금의 발언 때문에 주군이 주신 제안에 영향이 간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그만큼 일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게. 자네가 도망치면 잘리는  자네의 목뿐만이 아니야. 나의 목까지 걸려 있네.”


실제로 위협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살짝 기분이 상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를 배려해 공방 밖에서 기다려 주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생긴 것처럼 고지식하지는 않네.

나는 기사를 뒤로하고 공방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있을 대화 때문에 살짝 표정이 굳는다.
부디 내 예상이 틀리고, 단순히 넘겨짚은 오지랖이기를.

- 끼익.




*




데이지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박혀 있었다.
단서를, 단서를 찾아야 한다.
분명 해답은 이 책에 담겨 있으리라.
그녀의 스승… 아니, 그녀에게 연금술을 알려 준 왕실 연금술사가 직접 작성한 책이었으니.

“후우…”

허나 한 달을 훌쩍 넘게 반복해 읽던 내용에서 기발한 무언가가 발견될 일은 없었다.
이 앞 문단은 이미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외우고 있었고,
이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매달리듯이 읽고 또 읽어봤으나…
기적은 데이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복적이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버렸으니,
저절로 신경이 쏠리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놈은.”

그녀는 작게 투덜거렸다.
실제로 불만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떠나간 지 세시간도 지나지 않았기에.

‘그놈’ 하면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뿐이다.
순수한 눈망울로,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곤 하는…


“박찬영… 이라고 했나? 참, 부르기도 어려워라.”


그러한 이유로 박찬영의 호칭은 ‘그놈’ 혹은 ‘너’가 되었다.
절대 이름을 부르기 간지럽거나, 쑥스러움을 탄 것은 아니었다.

데이지는 아직도 그와 제대로 된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독을 먹였다고 했을 때 들었던 그 감사 인사.
세상에 어떻게 그런 호구가 있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가 호의를 보이는 이유가 소아 성애자라서 그런 줄 알았다.
여태 그녀에게 다가왔던 ‘모든’ 남자들이 그러했듯이.

‘…헨리랑도 슬슬 거리를 벌려야 하려나…’

예전에는 잘 숨기고 있었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한  동안 둘이서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헨리는 종종 그녀를 향한 연심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 연심은 추악한 종류의 것이 아닌,
힘들 때 자신을 챙겨주던 연상의 이성에 대한 애정이 발전한 것임을 알고는 있으나…
데이지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이성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동생처럼 여기던 아이라고 한들.

스스로도 남자를 사랑하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연심을 품기에는…
낙인처럼 새겨진 상처는 시간이 치유해 주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놈은 용병이니, 곧 떠나려나?”


그런 생각을 하니 살짝 안타까워졌다.
박찬영은 친구로 삼기 가장 이상적인 남자였다.


연인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정상적인 성 관념을 지니고 있었단 뜻이며, 이미 사랑하는 이가 이미 있으니 데이지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선한 마음씨가 마음에 들었다.
솔직해지지 못하고 말이 험하게 나가 버리는 그녀의 말도 오해하지 않고 받아줄 것 같아서.

그녀의 암청색 머리카락보다 훨씬 짙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었다.
왕국엔 희귀하기 그지없는 어두운 계열의 머리카락이, 가족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거리낌 없이 장난을 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 혼자 일방적인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한 부정을 재차 새겨주어서.

말끔한 얼굴은 뭐…
솔직히 구경하는 맛이 나니까 나쁘진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데이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다리를 치료해 준 것을.

솔직히, 그에게 최상급 포션을 준 이유 중 계산적인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다.
박찬영은 입은 은혜를 잊을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 데이지가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금전적인 대가를 바라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데이지가 기대하는 것은 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 착한 친구는 기억해  것이 아닌가?
시간이 흘러 데이지가 스러지더라도, 그녀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에 대해.

“…아니지. 이상한 생각 말고, 책이나 읽자. 전부 ‘해답’을 찾으면 해결되는 문제…”

“데이지! 많이 기다렸어?”

- 터억!

“으갸아으악!!”

갑자기 어깨 올려진 손에 데이지의 상념을 깼다.
누군지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어깨에 올려진 손은 대놓고 그녀를 놀래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인기척은 전혀 듣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미각과 후각의 다음 차례는 청각이었으니까.


“너,너 놀라게 하기 말라고!!”

“……”

평소처럼 화를 내는 척을 하며 돌아보았으나,
박찬영은 데이지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눈 속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뭔데. 왜 그런 눈?”


- 드르륵.


박찬영은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새까만 동공이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데이지. 넌… 귀족이 싫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편하게 대답해줘.”


말 그대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데이지는 의문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박찬영은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답을 듣고 싶다는  같다.

“……정말 싫어. 아니, 혐오… 스러워.”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모른다.
허나 도저히 좋다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런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을 택하리라.
데이지의 귀족을 향한 증오는 하늘에 닿았다.

“그렇구나.”


후우.

박찬영이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거움이 느껴지는 한숨이다.


“…난 이제부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거야. 혹시 듣기 싫으면… 중간에 말을 끊어도 전혀 상관 안 할게.”

“뭔데?…”

“지금 왕국의  제국파들 사이에선 소아 성애가 유행한다더라. 전국의 크고 작은 마을에선 어린 소녀들이 종종 실종된다 하고.”


- 움찔!


데이지는 숨을 굳혔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다.


“왕실 연금술사는…  제국파야?”


“……”


대화의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 이상한 말이지만,
데이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소아 성애와 반 제국파.
 제국파와 왕실 연금술사.
둘 모두 데이지와 깊이 관련 있는 이야기였다.


“넌… 뭐,를… 알아낸 거야?…”


“이 화제가 싫으면 그만할게. 방금의 네 반응으로… 미뤄 두었던 선택이 결정되었으니까.”


박찬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감정을 띠고 있었다.


분노였다.
데이지가 말실수로 멜을 모욕했을 때 잠깐 보였으나,
그보다 비교가 안  정도로 뜨거운.

데이지가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뻐금거리고 있을 때.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까지 그리 뜨거운 분노를 보였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상냥한 목소리로.


“데이지.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서 미안해.”


“……”

“그리고… 어쩌면 너에게 진 빚을 좀 줄일  있을 것 같네. 내 방식대로.”


“자,잠깐.”

- 턱.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떠나려는 그를 붙잡은 건 데이지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알게 되는  상관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더러운 년이라 욕하는 건 무덤덤하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친구를 잃기는 싫었다.
이대로 그를 떠나보내면 데이지에게 환멸한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데이지를 유일하게 두렵게 만들었다.


‘아니, 침착해. 그럴 리 없어.  과한 걱정이야.’


고개를 털며 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데이지가 아는 그는 언제나 상냥했다.
전말을 알게 되면 그녀를 향한 경멸의 눈을  리 없다.

다시 떠올리기 힘겨운 이야기다.
허나 그가 심각한 오해를 하는 건 더욱더 싫었다.

데이지가 아는 박찬영은 그리 똑똑하지는 않았다.
상냥함이 지나쳐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다리를 잃을 정도의 부상을 입고, 독을 먹인 상대에게도 순수한 호의를 보일 정도이니까.
그러니 어쩌면 이상한 오해를 했을 수도 있다.

이걸 알고서도 해명하지 않으면, 과거에서 도망치는 꼴 아닌가?
데이지는 그것이 싫었다.
그러니 직접 말하자.
모든 사정을 들은 그가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서.


“후우… 다시 물어볼게. 넌 뭘 알았어?”


“네가 왜 호의를 보이는 남자를 소아 성애자인지부터 의심하는지. 네가 왜 순결…에 대한 여부를 말해줬을 때, 그리 아파하는 눈을 했는지.”

이미 말해  생각이었음에도, 그가 얼추 안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하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꽤 괴로운 시간이 되리라 예상되었다.
제정신으로 고백할 용기가 완전히 증발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잠깐 이야기해. 혹시 오해가 섞여 있을 수도 있잖아.”

“…괜찮겠어? 힘들면 이야기  해도…”

“안 괜찮아. 하지만…”

다행히도 데이지에겐 술이 있었다.
그녀가 직접 만든 도수가 너무나 높은 증류주가.
취하고 싶은 그녀에겐 딱 선택하기 좋은 놈이다.

당장 술병이 담긴 바구니로 가 한 개를 꺼내왔다.
망설임 없이 입구를 연 뒤에,
한 병을 전부 비우기 위해 병을 들고 마셨다.

왈칵!

“데,데이지?”


“콜록! 콜록! 으엑!…”


술이 접객실의 바닥을 적신다.
데이지는 절반도 비우지 못하고 마시는 걸 포기했다.


학자는 항상 머리가 맑아야 한다며 술을 멀리해온 그녀다.
도수가 40도를 넘겨 목을 태우는 술을, 처음 음주를 하는 데이지가 전부 마실 수 있을  없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너무나 속이 뜨거웠다.

실질적으로 데이지의 위로 넘어간  고작 세 모금.
하지만, 작은 체구를 가진 소녀의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것에는 차고 넘칠 분량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어.”


데이지는 혀가 꼬이지 않게 의식적으로 조절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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