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아직 단언하기는 이르다.
나는 2 왕자와 제국 사이에서 이루어진 거래에 대한 상세 내용을 모르기에.
혹시 아나?
2 왕자가 협상의 귀재라서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제국을 끌어들인 것일지.
혹여 속국이라 칭해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전락해버린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그리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후 왕실이 꼭두각시가 되든 말든 당장 내가 받아낼 수 있는 이득만 취하면 되니까.
왕자가 내게 지불할 보상, 하드모드 퀘스트, 소설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다.
죄 없이 고통받을 왕국민?
그들을 위해주는 건 왕족이 해야 할 일이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절대 아니다.
“…등등을 원조받았네. 지금 당장에라도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 나머지 한 퍼즐만 주어지면 마냥 허황 된 계획은 아니야.”
당연하지만 타국의 군사를 성벽 내부로 들일 수는 없으니 모든 원조는 물질적인 것으로 제한되었다.
돈은 물론, 왕국보다 수십 배는 발전한 마도 공학에서 비롯된 전쟁 무기, 마법이 인챈트 된 검과 갑옷까지.
게다가 마법 스크롤까지 지원해준다고 하니…
너무나 방대한 지원임은 틀림없다.
원조를 대가로 제국이 취할 이득.
왕국이 쥔 패는 많지 않으니, 대충 예상이 간다.
아마 권력을 잡은 반(反) 제국파를 몰아내고, 왕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준다는 조건이 아닐까?
기존 왕국은 귀족들의 반발로 제국을 배척했으니까.
이것 외에도 너무나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머지 퍼즐 한 조각이라… 그건 사람이겠네요.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걸 사용할 사람이 없으면 전부 무용지물이 되니.”
“허,허허. 그래.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군. 3할과 7할, 셈으로만 치면 적의 머릿수는 우리의 2배 이상이지. 질로 따지면… 그 이상이고.”
2 왕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서야 이런 중요한 이야기에 한낱 용병이 불려온 것이 이해되었다.
절삭력을 올려주는 마법이 인챈트 된 검.
어지간한 칼날은 막아주는 갑옷.
그것들을 대여받았지만, 정작 사용할 사람이 없다.
기사들은 이미 저런 무기와 방어구를 가지고 있으니까.
“…용병들이 저런 무기를 쥔다고 해도 기사를 맞상대하진 못할 겁니다.”
“그럼 두 명이 한 명을 상대하면 될 일 아닌가?”
“용병이 상대해야 할 기사는 그리 적습니까?”
“아니, 많지. 무척이나. 그러니 최대한 많은 이들을 고용해야 하네.”
그러니까 어떻게?
나는 얼굴로 물어보았다.
왕자에게는 제국에서 빌린 수많은 금전이 있는 건 안다.
허나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반절 이상의 용병은 ‘반역’이라는 단어에 지레 겁먹고 도망칠 것이다.
연좌제가 있는 이 세상에서는 가담한 것만으로 온 핏줄이 몰살 당할 테니까.
한둘이라면 고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력의 공백을 메꿔줄 정도의 용병이 고용될 리 없다.
“어떤 의문이 드는지 알 것 같군. 드디어 본론을 말할 때가 왔어.”
- 스윽.
왕자가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잡아 고친다.
피부를 한 톨도 드러내지 않게 꽁꽁 싸인 그의 옷이 작게 펄럭였다.
데이지가 주었던 최상급 포션에서 맡아 본 향기가 작게 코를 간질였다.
청자의 주의를 끌기 위한 뜸 들임이었다.
나 역시 아까부터 본론이 궁금했기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철 가면 아래에서부터 굵직하면서도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자네가. 용병들을 설득해주었으면 하네.”
- 띠링!
=
*HARD MODE*
[퀘스트]
내용: 다시 떠오르는 태양
상세:
그리다니아 왕국의 반(反) 제국파.
그들은 수탈은 물론 소아 성애까지 즐기는 반인륜적인 죄를 저질렀습니다!
2 왕자를 도와 부패한 왕실을 청소하세요!
* Tip
해당 세계를 대표하는 대규모 퀘스트입니다.
여러 개의 분기로 나뉘며, 하나의 분기에 다다를 때마다 퀘스트를 더 진행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분기 목표를 달성했을 때, 해당 분기의 보상과 함께 패널티를 받지 않고 *HARD MODE* 퀘스트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도 실패 시 성공했던 분기의 보상도 받지 못합니다.
ㄱ. 선동
용병들을 설득하여 반역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300명 이상의 용병을 포섭하세요!
ㄴ. 점령
왕실 호위대를 뚫고 왕성을 점령하세요!
왕성에 있는 적대 왕족을 사살·회유·제압하세요!
ㄷ. 계승
반 제국파의 핵심축을 모조리 사살·회유·제압한 뒤,
‘보드엠 드 그리다니아[왕자]’를 그리다니아의 왕으로 만드세요!
보상: ㄱ. 소모품,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타래 (3개)
ㄴ. [완결 세계관 시간 축 조정]의 보조 기능 [배속] 해금
ㄷ. 기타, 마공학 모터사이클 ‘Gran Turismo’
올 클리어 시. 스킬, 선택과 집중 Lv - [Passive] [기타]
제한 시간: 720시간 00분 00초
실패 조건: 2 왕자의 사망 혹은 반란의 제압, 분기 목표 달성 실패.
실패 패널티: 10일 동안 모든 숙련도를 획득하지 못함.
포기 패널티: 5일 동안 모든 숙련도를 획득하지 못함.
=
기다란 창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하드모드 퀘스트 창이다.
나는 그 기다란 글귀를 천천히 읽어보는 대신,
잠깐 귀를 의심했다.
그만큼 왕자가 한 말은 놀라웠다.
용병들을 설득하라고?
왕족인 2 왕자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닌,
내가?
“설명이 부족했나? 으음… 자네에게 과인을 대리하여 용병들을 고용하는 일을 맡기고 싶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용병들을 선동해주게. 과인을 지지하도록.”
“…어째서 접니까? 왕자님이나, 그 휘하의 인재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은 과인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지. 과연 용병들이 왕족이나 귀족의 말을 의심 하나 없이 믿을까?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의 고충을 공유하고 있는, 자네 같은 용병이 선동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아.”
언뜻 들어보면 왕자의 말은 맞는 것처럼 들렸다.
피 지배계층은 결코 지배계층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그들과 같은 용병인 난, 2 왕자가 손에 넣지 못하는 동질감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왕족보다는 용병이 선동하는 것이 더 쉽게 먹히리라.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2 왕자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왕자님은 다른 왕족과 달리 왕국민을 위하는, 가면 쓴 천사라고 불리시지 않습니까. 그 명성이라면 무리는 아니라 생각 됩니다.”
“아니. 과인에게 직접 도움을 받은 왕국민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용병은 정계에 관심이 없지.”
“하지만 왕자님의 미덕은 듣지 못한 자가 거의 없으니… 소문에 민감한 용병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리 좋게 봐주니 고맙군. 허나 대다수의 용병들 눈에는… 과인과, 나라를 좀먹고 있는 저들은 큰 차이가 없어. 그래. ‘아직까진 부패하지 않은 왕자. 곧 부패할 예정.’ 정도의 인식이 적당하겠군.”
- …끄덕.
옆에서 자넷이 눈을 감은 채 작게 끄덕였다.
왕자의 말이 맞나보다.
생각해 보면 왕족에게 호의적인 용병이 더 우습기도 했다.
오히려 겁이라곤 없는 것처럼 나라를 욕하고 다니면 다녔지.
“원래라면 자네가 아닌, 철사자 혹은 하얀 고래 용병단의 단장에게 맡길 생각이었네.”
“철사자 용병단이라…”
“자네 역시 철사자는 익히 들어 보았겠지. 믿을 수 있는 우군이야.”
철사자 용병단은 이미 왕자에게 의탁한 모양이다.
도대체 어떤 보상을 내걸었기에 왕국에서 둘째가는 용병단이 전부 합류했을까.
살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영지전에 참여했을 때.
우리와 싸…운?… 철사자 용병단은 친(親) 제국파 귀족에게 진 빚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왕자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강력히 추천하더군. 자신보다 훨씬 적합한 인재가 있다면서.”
자넷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능력을 굳게 믿고 있기에 이런 모양이지만…
이걸… 좋아해야 하나?
일단 하드모드 퀘스트 창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래야 왕자의 제안을 수락할지 거절할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깊게 봐야 할 것은 그 난이도와 보상이다.
‘효과가 짐작이 안 가는 소모품이랑…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과 같은 보조 기능, 모터사이클은 뭐야. 말 그대로 오토바이?’
마지막으로 3개의 분기를 모두 클리어하면 주는 추가 보상, ‘선택과 집중’이란 스킬까지.
퀘스트 난이도를 고려한 것일까?
보상이 너무나 다양했다.
하지만 그만큼 난이도는 높았다.
용병을 포섭하라는 첫 번째 분기 퀘스트조차.
빠르게 왕성을 장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선동을 하되, 반 제국파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갈 때까지 질질 끌어서는 절대 안 된다.
몰아치듯이 왕성까지 진격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기회는 한번 내지 두 번.
하지만…
과연 한두 번의 선동질로 300명이나 되는 용병을 설득할 수 있을까?
용병들은 한곳에 뭉쳐있지 않는다.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그래야 밥을 굶지 않으니까.
‘지금 수도에 있는 용병은 총 몇 명이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300명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젠장, 전국에 소문을 내 용병을 수도로 모을 수만 있었… 아!!’
이런 멍청한 자식!
생각할 것이 많아 잠깐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수도에는 연금술사의 유적 때문에 용병이 어마어마하게 몰렸지?
그때 본 용병만 해도 300은 가뿐히 뛰어넘는다.
이거…
어쩌면 진짜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재화는 마음껏 사용해도 되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무엇이든 지원해 주지.”
“이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면, 제가 받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빙빙 돌리기보다는, 대놓고 요구하기로 했다.
내가 받을 보상은 확실하게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중간히 말했다가, 나중에 어물쩍 넘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절대로 막아둬야 한다.
2 왕자는 내 당당한 요구에 짧게 고민했다.
곧,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철 가면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적당히. 자네 양심껏 해 먹게.”
용병을 설득하기 위한 재화 중 일부분을 빼돌려도 묵과해 주겠다?
이건 너무나 끌리는 제안이다.
아무래도 2 왕자는 내가 ‘수도승’이란 것을 믿고 양심에 맡긴 모양인데,
난 왕국 전체의 금고를 털 깜냥도 있는 사람이다.
‘절반. 딱 절반만 해 먹을까?’
만일 2 왕자가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말이 절반을 빼돌린다는 것이지,
300명에 달하는 용병의 몫을 나 혼자 처먹겠다는 뜻이니까.
“…거절하는 순간 목이 달아날 것 같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 역시 왕자님의 깊은 뜻에 크게 마음이 기울었으니…”
나는 고개를 돌려 평상복 차림을 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인 칼 역시.
- 띠링!
그가 가진 스텟은 지금까지 본 어떤 기사보다 강했다.
2 왕자를 바로 옆에서 호위하는 인물이니 당연하다.
저 기사로부터 도망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리가 회복되지만 않았다면.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수락 쪽으로 기울었다.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대답을 미루거나 거절할 수는 없으니.
“수락하죠.”
“하하하! 좋군! 그래도, 자네는 과인을 너무 폭군으로 보는 것 아닌가? 당연히 생각할 시간을 줄 예정이었지. 서약서를 써서.”
- 팔랑.
서약서?
나는 왕자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저 종이로부터 마나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이름: 마나 서약서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기재 된 내용의 발설 금지.
상세:
서약서에 기재 된 조건에 따라 정해진 내용에 대한 발설을 금지합니다.
유지 시간 동안 가슴에 작은 문양이 남습니다.
유지 시간이 끝나면 문양이 지워지며 발설 금지가 해제됩니다.
서약서 유지 시간 - 48:00:00
* 추가 정보
단순히 언어로 발설하는 것을 막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문자, 몸짓, 수면 공유, 마나 발현 등등…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행위를 전부 포함합니다.
[경고!]
대상의 발설 자체를 막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즉, 서약서를 준 당사자에게도 발설할 수 없습니다.
* 가슴에 새겨진 문양에 스텟 기준 1,000 이상의 마나를 단번에 쏟아부으면 서약이 해제됩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아! 서약서가 있으셨습니까? 그럼 대답을 철회하죠. 하루만 고민하겠습니다.”
나는 상태창을 보자마자 대답했다.
저런 물건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고?
굳이 시간을 준다는데 안 써먹을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저 서약서를 만질 기회다.
저런 좋아 보이는 물건은…
가능한 빨리 상점창에 해금을 해놔야지.
“…그래. 자네가 그리하고 싶다면… 뭐, 그러지.”
“감사합니다.”
자넷과 기사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나는 뻔뻔하게 서약서에 조건을 적어달라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