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고작 한 모금에 불과한 보랏빛 액체가 목 뒤로 넘어간다.
향신료를 농축시킨 것만 같은 알싸함이 입천장을 찔렀다.
동시에 내 신경을 건드리던 욱신거림이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성능.
내가 병을 비운 것을 확인한 데이지가 물병을 한 개 가져오더니,
그 작은 포션 병 안에 물을 채워 넣었다.
아무래도 미세하게 남은 포션까지 먹일 모양이다.
“자.”
“방금 내게 준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길래 이렇게까지 할까?”
“……잔말 말고 빨리 먹기나 해.”
나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이 채워진 포션 병을 들이켰다.
확실히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포션이다.
시스템의 상점창을 확인해 보았더니…
- 띠링.
고작 소모품에 불과한 ‘최상급 포션’의 가격은 10,000 카르마였으니까.
진지하게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를 고민케 하는 값이다.
하지만 이 성능을 직접 체감해 보니 도저히 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적어도 퍼팩트 클리어가 깨지기 전까지는.
‘이 세계에선 100 카르마 가격의 하급 포션도 그리 비쌌지… 그럼 최상급 포션의 물가는 어느 정도 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천문학적인 수준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데이지가 내게 보인 호의의 원인과, 그 무게를.
“…뭐.”
너무 빤히 보고 있어서일까?
데이지가 퉁명스럽게 불평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미간은 좁혀져 있다.
한창 성장기에 저리 표정을 구기면 주름이 생길 텐데.
그렇지만 저리 인상을 쓰는 얼굴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데이지가 그 나이대의 소녀처럼 활짝 웃는 미소를 그리는 걸 상상하지 못할 만큼.
- 스윽.
나는 다리에 감은 붕대를 풀어보고자 했다.
이제는 줄여놓은 통각을 복구해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지는 말지.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는 부목 대고 있는 것이 좋을 텐데.”
“그래도 봐봐. 완전히 치료된 걸?”
최상급 포션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했다.
어찌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던 피부의 변색조차 새 살이 돋은 것처럼 깨끗해졌으니까.
부상을 입은 다리와, 그렇지 않은 다리의 차이점이 없어졌다.
내 다리는 완벽하게 치유되었다.
“칫… 별로 안 놀라네? 재미없어. 준 사람 생각도 좀 하라고. 어디 놀란 연기라도 내면 좀 덧나?”
“와! 데이지! 이것 봐봐! 내 다리가 말끔해졌어!!”
“…개자식. 저리 치워!”
- 퍽.
“하하핫!”
너무나 티 나게 한 내 연기에 데이지의 표정이 와락 구겨진다.
놀림 받은 것이 열 받았는지, 내 옆구리를 노리고 주먹이 날아 들어왔다.
물론 힘 스텟이 4밖에 안 되는 어린애의 주먹이니 그냥 피하지 않고 맞아주었다.
“그래도 고마워. 정말로.”
“……”
“방금 준 치료 약. 비싼 거지? 용병의 수입으론 평생 구경도 하지 못할 만큼.”
“잘 아네. 그런데, 내게는 별거 아니야. 난 언제든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니까.”
그럴 리가 없다.
당장 시스템의 설명에도 값비싼 재료가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감당이 가능할까 걱정이 될 정도의 지출이 틀림없다.
“으음… 이 빚은… 천천히라도 갚아 볼…”
“잠깐. 징그럽게 들지 마. 소름이 끼치는 건 둘째치고, 너 평생을 갚으려 들어도 못 갚을걸?”
데이지가 질색했다.
생색내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거절이었다.
나는 도리어 그 반응에 의문을 느꼈다.
“그럼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을 생각이야? 그건 아니잖아.”
“…그냥 네 다리가 너무 신경을 건드려서 독서에 방해가 됐고, 마침 그 방해물을 치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리했을 뿐이야. 알겠어?”
“그 말은…”
“네 푼돈을 뜯을 생각은 없거든?”
살짝 멍을 때렸다.
친해지고 싶은 상대에게 귀한 것을 베푸는 것까진 있을 수 있는 일이나,
그 대가를 하나도 받지 않겠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나한테 형편 좋은 이야기인데?…”
“너는 찾아온 행운에 구태여 부스럼을 만들어 기회를 놓치는 성격?”
“그건 절대 아니지.”
“그럼 입 다물어. 그리고 방금 먹은 회복약, 나한테는 별로 안 비싼 거니까.”
나를 위한 배려로 점칠 된 거짓말.
데이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결과,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건 그런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친한 친구에게 꽤 값나가는 명품을 선물해 주었는데,
친구가 없는 사정에 조금이라도 돈을 보태준다고 할 때.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였어도 돈을 받길 거절할 것이다.
얼마 안 되는 대가를 받아, 선물을 ‘거래’라고 이름 짓기보다는…
그냥 한 푼도 받지 않고 순수한 ‘호의’로 남기고 싶기에.
데이지의 감정도 그것과 같아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부담스러움을 억누르고 호의를 받기로 했다.
어떻게 내가 불만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조금 정도는 생색을 부려도 될 텐데.’
데이지는 그만큼 내게 큰 선물을 주었다.
오늘 상점창에 해금된 ‘최상급 포션’은…
테라포밍 속 엘프의 고대 유물이 그러하듯,
소설을 완결 짓더라도 해금을 장담 못 할 정도의 귀한 물건이니까.
“데이지. 그래도 포션의 값이 비싸지 않다 거짓말은 마. 기껏 준 선물의 가치를 깎을 필요는 없잖아?”
“가격을 말하자는 게 아니잖아! 멍청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 내게 빚진 것처럼 쫄아붙지 말란…!”
“충분히 알아들었어. 괜히 벽 세우지 말고, 평소 대하듯이 대해 달라는 의미잖아?”
“…뭐야.”
‘이미 알잖아…’,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높아졌던 목소리 역시 '확' 하고 줄어들었다.
그녀가 하고픈 말을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며칠 사이 내가 데이지를 귀찮게 굴던 것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는 뜻인가?
어쩐지 내 상상 이상으로 데이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기에,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진다.
“네가 부상을 입었을 땐 운이 나빴던 것처럼, 네 다리가 치료된 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냥 찾아온 행운에 감사한 채 넘기라고.”
- 휙.
학자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은 데이지는 그리 말하고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대화는 끝내겠다는 듯이.
데이지는 오늘 큰 손해를 입었지만,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오히려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빠진 것만 같은 후련한 표정까지 만들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하던 표정 연기가 떠오르네.
- 파락.
책을 편 데이지는 오랜만에 제대로 독서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 모습이 꽤 구경하는 맛이 있어,
지금은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
재생된 다리를 풀고자 이리저리 움직여봐도 불편함 한점 없었다.
한동안 근육을 쓰지 않았음에도 퇴화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 세계 말고 다른 곳에서는 계속 다리를 썼으니 당연한 건가?
데이지는 내 체조를 꽤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조차 고맙다는 의미로 손을 작게 흔들어주자, 금방 흥미가 없는 척을 하며 책으로 시선을 휙 소리 나게 돌렸지만.
바라본 것이 들킨 게 쪽팔렸을까?
나는 먼지가 난다는 이유로 공방 밖으로 내쫓겼다.
“으음… 이 정도면 바로 전투에 나서도 괜찮을 정도인데?”
그렇게 공방의 문 앞에서 다리의 감각을 되살리는 중.
멀리서 하얀 머리를 한 사람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품에 종이 가방 하나를 꼭 끌어안은 채.
나는 그쪽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멜!!”
“어라? 찬영님? 부목은?…”
“좋은 소식 알려줄까? 내 다리 전부 나았어.”
- 콱.
“으아악! 뭐,뭐하시는 거예요!!”
다쳤던 다리를 바닥에 한번 굴러 보이며 말했다.
나의 행동에 멜이 기겁을 하며 거리를 좁힌다.
멜은 크리스와 달리 그 부상을 직접 봤던 유일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럴만했다.
“직접 걷어서 보여줄게.”
백번 말하기보다는 한번 보여주는 것이 더 좋으리라.
나는 종아리를 올려 상처를 보여주었다.
깨끗이 씻어낸 종아리에는 피딱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라? 어? 상처…가?”
멜이 멈춰서 멍하니 내 다리를 살펴보았다.
대략 5초 동안이나.
- 스윽…
보는 것만으로는 잘 와닿지 않나 보다.
허리를 숙여 더 가까이 보려 했으니까.
심지어 손을 가져 대려다 흠칫 놀라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만져도 되냐고 허락을 받는 모양새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져보라고 발을 더 내밀었다.
그제서야 멜이 긴장에 찬 눈으로 내 다리를 미약한 힘으로 쓸었다.
당연히 멜의 손에선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만이 느껴졌을 뿐이다.
내 다리가 나은 것은 환영 마법 따위가 아니었으니.
“어,어떻게?…”
“도움을 받았거든. 최근 친해진 사람한테.”
“…정말요?”
“응. 봐봐. 흉터 하나 남지 않았지?”
“……”
멜이 넋을 놓은 채 내 종아리를 응시하다,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품에 안은 종이 가방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놓였다.
그녀의 얼굴은 하얀색의 풍성한 단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이 스스로의 얼굴을 가렸기에,
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멜도 참 마음고생 많이 했겠네.’
그녀에게 원인이 없다 말하기 힘든 부상.
게다가 높은 확률로 완치가 힘들어 보일 정도의 중상이다.
내가 이 공방에서 쉬는 동안 가장 열심히 찾아와 준 것도 멜이고,
가장 오래 머물다 간 것도 멜이다.
심지어 크리스보다 더.
“………훌쩍……”
내가 수도승으로서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 중이라 생각한 터일까?
멜은 요 며칠간 서툰 어휘로 수도의 광경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하여 눈과 귀가 되어줄 생각이었나보다.
당장 그녀가 가져온 종이 가방에는 전에 함께 먹었던 와플이 들어있었다.
아직 김이 나고 있는 것이, 식기 전에 내게 주고 싶었나 보다.
어째서 종이 가방을 꽉 끌어안은 채 달려왔는지 알게 되었다.
- 스윽.
허리를 숙여 멜의 머리를 쓸었다.
무언가로부터 상냥히 위로하듯이.
내 손이 머리카락에 닿자, 멜의 몸이 살짝 놀랐다.
안 그래도 작은 몸집인데 이렇게 쪼그려 앉으니 진짜 작아 보이네.
흐트러진 멜의 숨결이 고르게 변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울먹임을 어떻게든 억누르려던 그녀는 몇 번 실패하고는
결국 멜은 울음기가 완전히 가실 때까지 그렇게 쭈그려 앉아 있었다.
원인은 스스로에게 있고, 나는 피해자이니…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일 면목이 없나 보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요… 죄송해요…”
“멜. 기껏 가져온 와플, 다 식었잖아.”
“…그것도 죄송해요…”
농담을 농담으로 받지 못할 만큼 완전히 침울해졌다.
멜의 때 타지 않은 머릿속은 훤하게 읽혔다.
아무래도 내가 치료되는 것에 아무런 도움조차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나 보다.
“찬영님한테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군가요? 저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데이지. 너랑도 조금 친하지?”
“데,데이지가요? 하긴, 그 아이는 마음이 여리죠…”
당연하지만 데이지는 남들 앞에서는 낮을 타는 소녀를 연기했다.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연기에 동참해주었다.
분명 데이지는 멜의 앞에서 속내를 비친 적은 없었지만…
멜의 평가대로 마음이 여리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내게 이렇게까지 해주고.
데이지와 멜은 의외로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멜이 먼저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를 비롯한 하얀 고래 용병단에게는 비밀로 했던, 내 다리가 이렇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할 만큼이나.
어쩌면 멜은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비밀을 공유할 제삼자가 필요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항상 크리스를 볼 때마다 힘겨워하는 눈치였으니.
그러한 이유로 멜은 데이지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멜이 일방적으로 호의를 보내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사정을 모르는 데이지는 멜이 소아 성애자인지 약간 의심하는 눈치니까…’
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마다 소아 성애자인지 의심을 할까?
참…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흐를 수밖에 없는 주제다.
그만두자.
나는 머릿속에 피어나는 유추를 의도적으로 끊었다.
내게 커다란 선물을 준 데이지에게 더 없을 실례다.
“들어가자. 데이지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걸?”
- 끄덕!…
다행히 멜은 약간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우리는 공방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책에 몰두 중인 데이지였다.
대놓고 문을 열고 기척을 내었지만 데이지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되어 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대단한 집중력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를 닫을 수 있지?
- 탁탁탁!
“데이지! 찬영님한테 들었어! 네가 도움을 줬다면서!”
“으갸으아악!!”
멜이 데이지의 옆으로 달려가 큰 소리로 부르자, 데이지가 온몸을 비틀며 깜짝 놀란다.
놀래킨 범인이 나인 줄 예상했는지,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닌 눈가에 눈물이 맺힌 멜이었다.
“어,어라… 멜씨? …정말! 놀랐잖아요…”
“으아. 미,미안해! 너무 흥분해서!…”
잠깐 표면으로 드러난 분노는 금세 사라지고 겁먹은 소녀의 얼굴이 자리한다.
당연하지만 저건 전부 표정 연기다.
그런데 진짜로 분노는 사라진 것 같네?
왜 내가 놀라게 할 때만 화내고, 멜이 놀래키면 화를 내지 않을까.
데이지는 우리 둘 다 남자로 알고 있을 텐데.
‘아… 나는 일부러 놀래키는 거구나.’
정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데이지가 진심으로 화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두라는 말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많아 봐야 하루에 한두 번이다.
친한 사람끼리 24시간 동안 붙어 있으면 장난 정도야 오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녀도 내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데이지가 나보고 평소처럼 행동하라 했으니, 나는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