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어때, 파계승. 좀 살만해?”
- 터억.
자넷이 실실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데이지가 책을 읽다 말고 내 쪽을 잠깐 바라보았지만, 이내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유기 인자…’어쩌고 하는 어려운 책으로.
“심심하네요. 너무 할 것이 없습니다.”
“으핫! 몸이 좀 간지러워도, 참으라고. 지금 넌 쉬어야 할 때니까.”
- 끄덕.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데이지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 손을 찻잔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신다.
쟤는 저 맛 없는 차를 잘도 마시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병문안?”
“뭐 그런 것도 있고. 겸사겸사 전해 줄 말도 있어서.”
“전해줄 말?”
“응. 기억하지? 지난번에 나랑 같이 봤던 아재.”
“아재라면… 용병 길드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넷이 아재라고 부르는 인물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내 시간 감각 상 얼굴을 본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그 얼굴은 아직까지 잊히지 않았다.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얼굴의 절반을 뒤덮는 흉터.
그리고 윤기라곤 하나 없이 칙칙하게 죽은 그 붉은 머리털이란…
“맞아. 어제 아재랑 잡담하다 네 이야기가 나왔는데,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이란 말까지 나왔거든.”
그래서 안부 인사를 전달해 달란 부탁을 받았다는 건가?
로저라는 이름을 가진 그 용병 길드장.
생기를 거의 잃은 눈에, 관리라곤 전혀 하지 않아 삐죽거리는 수염을 한 반폐인의 몰골치고는 꽤 상냥하다.
“전부터 느낀 것인데, 단장님은 길드장님과 꽤 친하시네요?”
“…아. 응. 뭐, 좀 안쓰럽거든. 그 아재.”
“안쓰럽다?”
“쯧. 이거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상관없으려나?”
“길드장님의 비밀 같은 이야기면, 굳이 이야기 안 해주셔도 됩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네가 직접 물어봐도 이야기해 줄걸? 겉으로는 이미 극복한 척, 온갖 강한 척은 잔뜩 하면서 말이지.”
자넷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로서도 별로 길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닌가 보다.
그래서일까?
이어진 설명은 너무나 짧았다.
“별 이야기 아니야. 오래전 잃어버린 딸과 내가 비슷한 나이래.”
“길드장님은 결혼을 하셨군요.”
“용병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지만.”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궁금한 것은 조금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더 이상 캐묻는 건 로저에게도, 자넷에게도 실례였기 때문에.
짧은 대화였으나 길드장 로저가 자넷에게 딸을 투영해서 보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그럼 나는 가볼게. 마저 푹 쉬고.”
어쩐지 자넷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것만 같다.
분명 길드장의 말 상대나 되어주려고 가는 것이리라.
그렇게 공방의 접객실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나와 데이지.
“…오늘은 안 온대? 네 연인.”
“아마 오지 않을까? 노을이 늘어설 때 즈음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멍하니 읊조렸다.
시간은 아직 한 낮이다.
멜과 크리스가 오는 건 항상 일과가 끝난 이후였으니,
아직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뭐라고? 잘 안 들렸어. 좀 더 크게 말해.”
아무래도 고개를 돌린 채 말을 해서 잘 듣지 못했나 보다.
나는 작게 투덜거리는 데이지를 향해 한층 목소리를 키워 대답해 주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내 말을 들은 듯하다.
“그럼…”
- 힐끗.
데이지가 살짝 망설이며 동공을 아래로 내렸다.
언제나 느꼈던 시선이다.
내 부상당한 종아리를 향한.
“잠깐 봐도 돼? 그 다리.”
“…꽤 혐오스러울 텐데.”
“괜찮아.”
“진짜 징그럽다니까?”
“괜찮다고!”
데이지는 살짝 신경질까지 내며 다리를 보이길 재촉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내 다리에 신경이 계속 쏠리나 보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이나.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서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리를 보여주려면 데이지가 앉아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곧바로 제지당했다.
“잠깐.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러면 고맙고.”
- 저벅저벅. 끼익.
“됐어. 다리 이쪽 의자에 올려봐.”
“…”
나는 얌전히 데이지의 손길에 다리를 맡겼다.
적어도 부상을 내보일 정도의 신뢰 관계는 쌓았다고 생각한다.
데이지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이미 통각을 내려놓아서 확확 벗겨도 안 아픈데.
역시 숙련된 연금술사라는 걸까?
그녀의 손은 한 번의 흐트러짐이나 헛손질 없이 붕대를 온전하게 벗겨 내었다.
하지만…
완전히 붕대가 벗겨지자 데이지는 명백하게 동요했다.
그녀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아,안 아파?”
“조금?”
“조금은 무슨! 이렇게 퉁퉁 부어서는…”
데이지가 질색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확실히 종아리가 허벅지 두께만큼 부어있긴 했다.
“…상처에 아직도 핏기가 있어… 제대로 아문 것은 맞아?”
“조금씩 배어 나오더라고. 아직 부상을 입은 지 일주일 정도 되었잖아?”
실질적인 외상은 고인 피를 빼내기 위해 일부러 낸 구멍밖에 없다.
꿰매기에는 애매할 정도의 작은 구멍.
그렇기에 틀어막은 것으로 그쳤다.
구멍을 이용해 안쪽으로 계속 포션을 흘려 넣어주기 위함도 있고.
데이지가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눈꼬리라 파들파들 떨리고 있어, 그녀가 이런 상흔을 보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것 같네.
“뭐야. 봐도 괜찮다고 장담한 것 치고는 꽤 어색한 얼굴인데?”
“…실제로 부상을 본 건 처음이야.”
“그래?”
“생각해 봐. 연금술사가 이런 부상을 볼 일이 뭐가 있겠어? 그것도 이렇게… 심각한…”
그러고 보면 그렇다.
연금술사는 어디까지나 학자의 분류 안에 들어갔으니까.
게다가 살아온 나이도 많지 않은 데이지다.
이런 부상을 봤을 리 없지.
“어린애가 침울한 얼굴 하기는. 구경 다 했으면 다시 부목을 댄다?”
- …끄덕.
왜 잠깐 보고 말 것이면서 그토록 내 다리를 신경 썼을까?
그 정도로 궁금증이 도졌나?
연구자라는 사람들은 전부 남다른 호기심을 가진다곤 한다.
아무리 어린 데이지라고 한들 연구자의 특성은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너는… 글을 알지만, 그래도 용병이지?”
“맞아.”
“그럼 이렇게 다리를 다쳐도 되는 거야? 몸으로 먹고사는 직업인데.”
“무사히 회복하면 계속 용병질을 하는 거고, 혹시 운이 나빠서 후유증이 남으면 어쩔 수 없이 은퇴 하는 거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다리 정도야 움직여 주기만 하면 상관없다.
이 세상에 50년 60년을 보낼 것도 아닌데,
까마득히 먼 훗날에 올 뒤탈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소설을 완결할 수 있을 때까지 다리가 말을 들어주는 것.
그 정도는 포션을 때려 부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곧 원작이 연중 된 시점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데이지에게는 다르게 들렸나 보다.
포션을 펑펑 쓸 수 있다는 것도, 실제 내 몸은 멀쩡한 것도 모르는 그녀는…
내가 무식하게 몸을 혹사하고 있는 거로 알아들었다.
오해가 확실하지만, 해명할 수는 없었다.
내겐 시스템이 있단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며 겁먹은 척을 연기하긴 싫었다.
“나는 연금술사로서 인체의 구조에 대해서도 해박해. 어디까지나 이론이지만. 이 다리. 내 생각에는, 이대로 방치하면 완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
데이지의 경고에도 나는 쓴웃음을 풀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런 나의 반응이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진다.
데이지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내 종아리 부분을 살짝 눌렀다.
- 꾸욱.
“야! 잠깐! …어,어라?”
“별로 안 아프지? 왜 안 아픈 거라 생각해?”
“…이런.”
“네 다리. 반쯤 죽어 있다고!!”
데이지를 말리려던 나도 살짝 놀랐다.
다리 전체가 항상 욱신거리던 것과 반대로, 피부를 눌리니 생각보다 그리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통각을 억제하고 있다고 한들 꽤 통증이 느껴져야 정상인데…
포션을 물 쓰듯 사용했다고 한들 내 다리는 이미 위험한 상태였다.
데이지의 덕에 방금 실감했다.
그래도 상황이 마냥 비관적이지는 않다.
최근 며칠간, 이 공방에서 쉬며 다리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편해지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조금씩은 낫고 있다는 뜻이다.
악화가 진행되지 않으니, 이 이상으로 부상이 심각해지지 않으리라.
“너 지난번에 돈이 많다고 했지? 하급 포션을 살 수 있을 정도야? 그럼 그거라도 사서 발라. 다리를 잘라내기 싫으면.”
“이건 비밀인데, 쓰기는 했어. 운 좋게 구해서.”
어차피 데이지가 내 다리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포션을 쓴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말했다.
실제로 자넷에게 받았다는 변명 거리도 있었고.
“잠깐. 포션을… 쓴… 것이… 그 정도라고?…”
“처음에는 종아리뼈가 반 토막 났으니까. 부목을 대어서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된 거면 돈값은 했지.”
“…처음에 입은 부상이 도대체 얼마나 심각했어야… 그래서야 하급 포션을 아무리 먹어도 후유증을 피할 수 없잖아…”
데이지가 멍하니 읊조렸다.
내게 영구히 장애가 남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충격이었나보다.
하긴, 나와 데이지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꽤나 친해졌다.
이건 나만의 착각이 절대 아니다.
데이지도 아닌 척 내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비록 반말 일색에 욕설도 가끔 섞이긴 했지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이 모아둔 돈으로 살아야지 뭐.”
“너는 그걸 말이라고!! …어… 어어…? 잠깐.”
- 우뚝.
“데이지? 왜 그래? 괜찮아?”
“아니… 으… 아니야! 이건,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몸을 딱 굳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당연히 괜찮냐는 나의 질문은 무시당했다.
데이지는 심지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기행까지 벌였다.
나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이상 행각을 구경했다.
드디어 데이지에게도 사춘기가 온 걸까?…
아무리 나라도 10대 초중반 여자아이의 머릿속은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하물며 데이지가 보통 특이한 소녀여야지.
- 후우…
한참을 끙끙 앓던 데이지가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은 쓴웃음이 감돌았다.
“…진짜 터무니없어. 내게도 네 멍청함이 옮은 걸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입 닫고 있어. 네 목소리를 들으면 화가 치미니까.”
“음… 아까부터 말이 유독 험하네…”
- 벌떡.
데이지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쏘듯이 말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다리는… 다시 붕대를 감아도 되고.”
- 휙.
그녀가 얇은 천으로 가려진 연금실로 사라졌다.
‘일주일…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그럼 늦지 않았어.’라는 말을 흘리며.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내는 혼잣말을 들으리라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내 청력은 시력만큼이나 좋다.
그러니까…
지금 저 연금실에서 헨리와 데이지가 다투는 소리가 전부 들릴 만큼이나.
- 데이지님? 그건 왜? 지금 잡으신 건, 명일 왕실에 납품하기로…
- 하나 쓸 곳이 생겼어. 내일 같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실수로 한 개 깨 먹었다고.
- 그렇게 단순히 넘어가질 일이 아니잖아요!
- 나중에 사비 털어서 보충한다고 해. 고작 한 개인데 뭘.
- 고…고작…? 반박할 게 한둘이 아니지만, 일단 넘어가고… 저희 공방의 신뢰도는?
- 어차피 그런 것들은 1년 뒤엔 전부 상관없어지잖아?
- …후우……
부목을 다리에 대며 대화를 귀에 담았다.
주어가 빠져 있기에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기다리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저 다툼의 원인에는 내게 있을 테니까.
결국 이긴 것은 데이지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기준에서 헨리 역시 반말을 해도 되는 어른의 대상 안에 들어가나보다.
헨리는 조수라서 당연히 반말하는 건가?
도대체 기준이 감이 안 잡히네.
- 터벅터벅.
데이지가 내게 걸어온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병은 너무나 작아서, 손에 쥔다면 전부 가려질 정도의 크기였다.
들어 있는 것은 보랏빛 액체.
작은 크기의 유리병임에도 멋스러운 양각이 새겨져 있던 탓일까.
어쩐지 저 병이 무척이나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 척.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먹어.”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지금 이 순간도 아까워 죽겠거든? 네게 옮은 멍청함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받아줄래?”
데이지가 손에 든 병을 한번 까닥이면서 말했다.
그 표정은 여전히 망설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나를 향한 손은 회수되지 않았다.
그녀가 여태껏 이상한 행각을 벌이던 이유는…
넘겨받은 유리병의 상태창을 본 뒤 알 수 있었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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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최상급 포션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부상 제거
상세:
경구 섭취 또는 상처 부위에 뿌리는 것으로 상처를 빠르게 치료합니다.
그 효과가 너무나 뛰어나, 대부분의 부상을 제거해버리는 수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신체 결손까지는 복구하지 못합니다.
단, 잘린 신체 부위를 단면에 가져다 댄다면 완치가 가능합니다.
가능하다면 경구 섭취를 권장합니다.
중하급 포션과 달리, 한 방울이라도 체내에 넣는 것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포션의 제조법만으로 귀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연성에 비싼 재료들이 들어가지만, 그 값을 해내는 효과를 지녔습니다.
‘예비 목숨’이라 칭하기 더없이 알맞습니다.
* 기능의 레벨이 부족해 재료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 제작자의 주관이 들어가지 않은 합성 방법으로 제조되었습니다. ‘추가 효과’나 ‘패널티’가 없습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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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최상급 포션?…’
중급, 상급 포션을 건너뛰고 가장 뛰어나리라 예상되는 등급의 포션이 손에 들어왔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왕실에 납품하기로 되어 있는 최상급 포션.
연결되는 건 한 가지밖에 없다.
이놈은 나병으로 인한 피부 괴사의 재생에서 사용되어야 했을 포션이다.
즉, 원래의 주인은 2 왕자다.
“데이지? 이거…”
“하급 포션보다 약간, 아주 조금 더 좋은 치료약이야.”
“…조금?”
뻔뻔한 말에 나도 모르게 반문해버렸다.
최상급 포션이 하급 포션보다 ‘조금’ 좋은 거라니.
그럼 도대체 ‘많이’ 좋은 포션은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
“맞아. 그러니까 먹어. 내가 보는 앞에서.”
데이지는 눈에 불을 켜고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