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감시자라고 해도 내가 할 일은 별것 없었다.
그냥 편안히 앉아 헨리와 데이지의 위치를 파악하기만 하면 끝.
게다가 나에겐 감정 능력까지 있기에 감시자로서 더 없을 인재였다.
감정 능력이 연금술사를 감시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냐고?
꽤 많지만, 지금 당장 예를 들자면…
- 띠링!
앞에 놓인 찻잔에 독약이 섞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 후룩.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맛없네.
그냥 쓰고 떫은 맛 수준이 아니라, 풀잎을 태운 것 같은 탄내가 진하게 남아있다.
원래의 차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건 당연하고.
이건 ‘차’라기 보다는, ‘잿물’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데이지가 찻잎을 직접 덖거나 볶나보다.
어제 자넷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미묘한 표정을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고 헨리가 차에 손을 한 번도 안 댄 이유 역시.
“…데이지. 너 차는 진짜 못 탄다.”
자신의 팔뚝보다 훨씬 두꺼운 책을 몰두하며 읽던 데이지.
그녀가 내 말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요? 뭐라고 하셨나요?”
책에 집중해서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일까, 돌아본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의문이 남아있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니. 그냥… 차가 맛이 좀 이상해서.”
“…아. 죄,죄송합니다.”
데이지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목소리 역시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다.
하지만 저 표정을 봐라.
눈썹 윗부분이 씰룩이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하긴, 공짜로 눌러앉아 차까지 얻어먹는 주제에 맛까지 품평해 대면 화가 안 날 리 없나?
내가 생각해도 좀 미안한 짓을 하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차 맛이 좋아 지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참고 먹겠는데… 이건 좀… 차라리 맹물이 나을 정도니.’
그냥 다음부터는 차 말고 물이나 달라고 말해야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지는 다시 커다란 책에 고개를 박고 읽기 시작했다.
고개를 박았다는 건 과장이 아니라, 진짜 시력이 걱정될 정도까지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세에 대해 주의를 주기도 뭐 했다.
나와 데이지는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친분이라곤 전혀 없는 타인이니까.
그러니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고.
“데이지?”
“…네? 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얼굴에 미약하게 짜증이 서려 있었다.
반복해서 독서 중 집중을 깨는 것이 불만인가보다.
저런 얼굴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니, 확 뒤바꿔 보기로 하자.
“너는 왜 일 안 해? 우리가 맡긴 물약 분석하는 거.”
“그야… 저는 헨리님의 조수니까요? 분석은 헨리님이 하고 계세요.”
“너는 실력이 부족하니 도움이 안 된다?”
“그렇죠. 의문이 풀리셨으면, 저 책 좀 읽고 싶은데 좀 읽어도 될…”
“아닌 것 같은데. 이 연금 공방의 주인은 너잖아?”
- 덜컥.
책을 다시 펴던 데이지의 손이 딱 하고 굳는다.
그런 그녀를 실실 웃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데이지가 나를 돌아봤다.
느리고, 살짝 겁먹은 눈길로.
“…네?”
“연금실의 문을 저리 얇은 천으로 가렸으면 안 됐지. 접객실에서도 내부가 보이는 각도잖아.”
눈 옆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눈이 좋은 사람은 안쪽이 훤히 보인다고.”
“……”
데이지의 목울대가 한번 움직였다.
눈빛은 혼란을 수습하고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아직 희망을 놓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런.
“그게 왜…”
“자료가 적힌 서류, 재료의 수납장, 책상과 의자, 하다못해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연금 도구까지.”
“…평범하잖아요?”
“아니지. 눈높이가 전부 신장이 작은 어린아이에게 맞춰져 있잖아. 세상에 어느 연금술사가 자신의 공방을 조수에게 맞춰 꾸며?”
내가 한마디씩 뱉을 때마다 데이지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그녀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얇은 천으로 가려진 연금실을 보았지만,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울일 뿐이다.
그녀의 눈에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나 보다.
‘아까부터 책을 저리 가까이서 보던 이유가 눈이 나빴기 때문인가?’
하지만 내 눈에는 너무나 잘 보였다.
시력이 초인에 가까운 나였기 때문이 아니라, 시력이 정말 좋은 평범한 사람도 이곳에 선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저런 단서들은 단순히 시력만 좋다고 잡아낼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지만.
사실,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아챘다 말하기로 정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데이지가 대놓고 힌트를 주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숨길 생각은 있었어? 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의 제목부터가 ‘유기 인자에 대응하는 물질 반응학’인데, 아무리 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술서잖아. 평범한 조수가 읽기에는 벅차 보이는데?”
“다,당신 글을 읽을 줄 알았어?!”
“…아. 보통 용병들은 글을 못 읽지?”
데이지가 경악에 찼다.
내가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어쩐지 너무 대놓고 읽고 있다 했다.
내가 용병이란 말에 크게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자넷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용병질을 할 이유가 없다고 했나?’
데이지의 얼굴에 체념이 떠올랐다.
어린아이의 겁먹은 표정을 구경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슬슬 안심 시켜 주기로 했다.
“알아낸 건… 데이지 네가 이 공방의 주인이고, 오히려 헨리씨가 네 조수에 가까우며, 저 진열창에 놓인 포션들이 전부 네가 만든 거라는 것 정도야.”
“그건 또 어떻게…”
“다 방법이 있어. 그냥 그런가 보다 해.”
“하아아아……”
손가락 한 개로 가리면 전부 가려질 듯한 작은 입술에서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어린아이치고는 너무나 피곤에 절어져 있는 목소리다.
마치 밤새워서 크리티컬한 버그를 고쳤더니,
퇴근하기도 전에 새로운 버그가 연달아 터진 개발자의 한숨이 연상 되네.
“당연하지만 비밀로 해줄게. 사정이 있으니까 숨기고 있는 거지?”
“……”
“내게도 소중한 사람에게 말 못 할 비밀 몇 개쯤은 있는걸.”
예를 들어 크리스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다든지.
까맣게 죽은 데이지의 표정을 보니 나와 달리 심각한 이유 같았지만,
그녀로선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냥 계속 마음에만 담아주시지, 왜 제게 말해주신 건가요? 아니, 생각해보면 차라리 말해준 게 더 나으려나…”
“그냥 한동안은 볼 사이인데, 터놓고 지내자는 신호지. 너도 내가 이곳에 지내는 며칠간 계속 ‘수줍음을 타는 소녀’를 연기하긴 귀찮잖아?”
“여,연기는 무슨…”
“티 났어. 동료들을 눈치 못 챘지만, 나는 알아챘다?”
“……”
과연 데이지의 본래 성격은 어떨까?
나는 흥미진진하게 데이지의 모습을 관찰했다.
겁도 자주 먹고, 은근 연기에 빈틈이 많은 걸 보아 지금까지 보인 성격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꽤 많이 빗나갔다.
“아아악!!”
- 휘적휘적!
데이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잡고 헤집었다.
맑은 밤하늘의 푸른 은하수를 떠오르게 하는, 암청색 머리카락이 마구 날뛴다.
쯧쯧…
허리까지 오는 장발을 저리 헤집으면 나중에 정리하기 엄청 힘들 텐데.
마치 업무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안쓰러운 개발자처럼 보인다.
데이지는 한참을 헉헉대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내게 물어왔다.
“너. 용병. 이름이 뭐야.”
“…어… 반말이라, 이건 좀 당황스럽네. 이게 네 원래 성격?”
“난 데이지. 그리고 너는?”
“…박찬영.”
나를 향해 뻗어진 손가락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녀에게 반말을 듣는 감성은…
기분이 나쁜 건 전혀 아닌데, 약간 어색했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니까.
“나 같은 어린애한테 반말 듣기 싫어?”
“싫기보다는…”
“너 몇 살인데? 얼굴 보니 많아야 20대 초반 아니야?”
동양인은 겉으로 보기에 훨씬 나이가 적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큰 키와 넓은 등 덕에 앳된 티는 나지 않았다.
어리다면 어리고, 다 큰 성인이라면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양쪽의 장점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밖에 안 되지만.
“맞아. 20대 초반.”
“…그럼 내가 반말 해도 돼.”
데이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20대 초반이면 반말을 해도 된다니, 도대체 무슨 기준일까?…
아무리 봐도 데이지의 외견은 10대 초중반에 가까웠는데.
“내가 혹시 비밀을 남들에게 말할까 불안해?”
“…말 할 거야?”
“아니. 말 안 해. 그런데 이 비밀을 예상보다 민감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나는 여태까지 금전적인 요인 때문에 비밀을 만든 줄 알았다.
가령 귀족이나 황실을 상대로 거래를 할 때 어린아이가 나서면 의뢰를 받지 못하다던가,
어린 소녀가 혼자서 수도의 공방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의 혹시 모를 위협 방지 등등.
즉, 얼굴마담을 삼기 위해 헨리를 고용한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고 좀 다른 것이라 깨달았다.
단순히 거래처에 신뢰도를 조금 읽고 마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비밀이 밝혀지면 데이지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후… 남들에게 말하지 말아줘…”
“난 입이 꽤 무거운 타입이야. 네가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1년. 1년만 지나면 괜찮아. 그러니 그전까지만 비밀로 해줘야 해.”
1년이 지나면 안전해진다라.
딱 정해진 기간 동안 실력을 숨겨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저 앳된 얼굴은 1년이 흐른다고 눈에 띌 정도로 역변하는 것도 아닐 텐데.
“알겠다니까. 음… 우린 사실상 초면이니 신뢰가 쌓이지 않은 건 당연하려나.”
“…이건 경고야. 방금 내가 네게 타준 차. 거기에 독약이 섞여 있거든? 내가 주는 해약을 주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넌 죽을 거야.”
“푸훗.”
데이지의 귀여운 위협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 차에 독약이 타 있다?
저건 순수한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위험한 정보가 있을 경우엔 시스템 창이 미리 경고해 주거든.
지금은 가려져 있지만,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을 사용해서 밝혀낼 수 있는 정보가 있다고.
- 띠링!
하지만 과신은 금물이다.
나는 혹시 몰라 차를 향해 상세 확인을 써 보았다.
당연히 아무런 추가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저 차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가 맞다.
“…뭐야. 왜 웃어. 설마 급조한 거짓말 같아? 난 연금술사야! 그것도 꽤 실력 있는! 그런 독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크흡. 아니, 어쩐지 차가 독약만큼 맛이 없다 했어서.”
“진,진짜라고! 넌 네 목숨을 도박판 위에 올릴 생각이야? 혹시 내 말이 진실이고, 감정 상해서 해독약을 안 주면 어쩌려고?”
차의 상태창을 보지 않았더라도 반박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데이지가 미래를 알아 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미리 독약을 넣었는지.
저 수십 수백 개의 포션 중 독약은 하나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독약에 대해 그리 잘 아는지.
그럼 찻잔에 남은 차를 토끼에게 먹여서 증명을 해봐도 되는지 등등.
하지만 속아 넘어간 척해줄까?
굳이 데이지를 더이상 몰아넣지 않기로 했다.
사람을 약 올리는 건 꽤 좋아하지만, 절망에 빠뜨리는 건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호하지 않을 뿐이지, 못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내게 명백한 이득이 있고, 그 이득을 손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지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손댈 각오가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전혀 아니었다.
똥통에 빠진 것이 다이아몬드 반지라면 누구라도 손을 넣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손을 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내리깔며 분위기에 진지함을 더했다.
“…뭐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야?”
“미,믿지 말던가? 나중에 고통스럽게, 아주 사지가 뒤틀려서, 칠공에 피를 뿜으며 후회해도 나는 모르니까!”
“으음… …네 말이 진짜라면… 난 절대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겠네?”
“그렇지! 이제야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어디 가서 비밀을 말하기만 해봐, 절대 해독약 안 줄 거야!”
내 얼굴에 드리운 수심과는 반대로 그녀의 얼굴엔 화색이 깃든다.
성공적으로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나의 표정 연기는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모양이다.
“좋아. 그럼 서로 목숨줄을 잡고 있게 됐네? 잘 부탁해.”
“…넌 어떻게 독약을 먹인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할 수 있어? 적어도 엄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나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비밀을 지키고 싶었나 보다.
그런 각오가 데이지의 말에는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나중에 진짜로 그런 독약을 먹이려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데이지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능력 있는 연금술사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으면 했지.
게다가 의도치 않게 목줄까지 손에 들어왔는데 굳이 싸워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뭐 어때? 나도 해독약을 안 주면 사방팔방에 비밀을 뿌리고 다닐 건데. 이 비밀 위험한 놈이지?”
“으윽…”
“봐봐. 너만이 내 목숨줄을 쥔 건 아니잖아? 좋게좋게 가면 서로 피해 없이 끝나는데, 굳이 날 세울 필요는 없지.”
“너… 성격 이상해.”
데이지의 눈이 환상 속의 동물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를 천천히 탐색하는 것만 같다.
그런 데이지를 향해 뻔뻔하게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