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반갑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자넷과 닮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비쩍 마른 사내.
자신을 헨리라 소개한 남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연금 공방을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에 갔던 잡화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바로 알려주었으니까.
나와 크리스, 자넷은 남자의 인도대로 접객실에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우리를 대표하는 건 자넷이었다.
우리는 하얀 고래 용병단의 입장에서 연금 공방을 방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얀 고래라면… 들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데이지? 손님 오셨다!”
“네,넵!”
- 후다닥!
헨리의 말에 데이지라 불린 소녀가 화들짝 놀라 안쪽으로 향했다.
고작 12살 내지 13살로 보이는 것이, 소녀라 칭하기도 애매한…
그냥 아이였다.
‘어린아이라… 왕국에서는 성인도 안된 애가 술을 양조해도 되는 건가?’
데이지라는 연금술사가 여성이란 건 이름을 봤을 때 어렵지 않게 예측했지만,
저리 어린 소녀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실력이 있는’이란 수식어에 꽤 나이 든 여성을 생각했지.
우리의 시선이 사라진 데이지의 뒷모습에 향한 걸 알아챘을까?
헨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조수입니다. 전 혼자 공방을 운영하기에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거든요. 데이지는… 쑥스러움을 참 많이 타는 아이지요.”
“혼자 운영하신다니, 그렇다면 저쪽 수납장 가득히 들어찬 물약들은 전부 헨리씨가?”
“네. 부족한 실력이지만 좋게 봐주신 몇몇 분들이 계시는지, 황실에 납품하는 물건도 있답니다.”
자넷의 말대로 꽤 넓은 공방의 벽면에는 거대한 수납장이 눈길을 끌었다.
그 안에 빼곡히 보관되어 있는 각양각색의 물약들 역시.
한약을 연상시키는 약방 냄새가 물씬 풍기며, 저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연금술사의 공방이란 사실을 체감한다.
- 띠링.
‘…우연인가?’
수십 개의 물약 중 무작위로 고른 한 약병의 상태창을 띄웠다.
그리고, 이상한 점 한가지가 내 눈에 밟혔다.
단순히 우연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물약 역시 살펴보았다.
수많은 상태창이 열고 닫혔다.
- 띠링. 띠링. 띠링.
솔직히 말해서, 내게 쓸만해 보이는 놈은 거의 없었다.
어쩐지 물약들이 전부 상처나 병의 치료에 관련된 물약들이었기에.
이런 것이 가장 수요가 많으니 당연한가?
그래도 판타지 소설에 흔하게 나오는 투척용 화염 물약이라든지,
아니면 먹인 상대에게 수면이나 혼란 같은 상태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물약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 개쯤은 있을 법한데…
‘…생각해 보니 의사들도 전문 분야가 있는 것처럼, 연금술사도 전공이 있는 건 당연하려나?’
아무래도 이 공방은 치료 물약을 주로 생산 하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저 물약의 효과 따위가 아니기에 그냥 확인만 하고 넘겼다.
- 띠링. 띠링…
맨 처음 발견한 이상한 점.
그것은 다른 물약에게도 공통으로 발견되었다.
“아,안녕하세요…? 여러분?”
- 타악.
내 상념을 깬 것은 얇은 천으로 가려진 안쪽 방에서 나온 데이지였다.
그녀는 손에 든 쟁반에서 차 네 개를 가져와 우리의 앞에 하나씩 놓았다.
정작 그녀의 것은 들고 오지 않았지만.
- 힐끗.
쟁반으로 자신의 앞쪽을 가린 채 슬쩍 우리의 눈치를 보는 것이,
헨리의 설명대로 낯을 많이 가리는 듯 보였다.
“…그럼 어떠한 일로 찾으셨…”
“…오래전 발견한 물약이 하나…”
“…같은 경우는 시간과 비용이…”
자넷과 헨리가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둘의 대화에 집중하기보다는…
데이지라 불린 여자아이를 관찰하는 것에 신경을 기울였다.
날카로운 시력이 데이지의 생체 신호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소녀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넘어간다.
미약한 긴장에 침이 차오른 것이다.
또한 최대한 우리의 시선을 받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별로 넓지 않은 헨리의 등 뒤에.
몸은 정면을 향하지 않고, 천으로 가려진 방을 향해 돌아가 있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의미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말로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나오는 반응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말이나 연기를 할 때 나오는 반응과 무척 유사했다.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후자로 생각이 기울었다.
데이지는 지금 낯을 가리는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감으로만 찍은 건 아니다.
이리 생각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수납장에 있는 수십 개의 물약.
‘저 물약의 제작자는… 헨리가 아닌 데이지야. 한두 개가 아닌, 전부 다.’
헨리는 분명 자신이 저 물약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시스템이 보여준 사실은 그 발언과 모순되었다.
한 가지 사실을 숨겼다면 의심 가는 다른 사실 역시 숨기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데이지의 저 낯을 가리는 모습은 연기라고 판단했다.
- 띠링!
=
[이름] 데이지
[직업] 연금술사
[힘] 4 [민첩] 3
[체력] 3 [지능] 32
[기교] 41 [매력] 23
[마나] 71
[특성] -
* 특이사항
[’상태창 레벨3 이상’ 혹은 ‘캐릭터 정보 상세 확인’기능 필요.]
=
특성이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특이사항이 있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내겐 저 숨겨진 특이사항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기능을 해금한 건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이니까.
허나 저 사실을 보려고 상태창을 연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상태창을 본 이유는 따로 있다.
‘스킬 레벨이…’
데이지의 스킬 창에는 ‘연금술’이 존재했다.
그것도 무려 레벨이 5나 된다.
아무리 수도라고 해도, 이런 작은 공방에서 조수나 할 정도로 초급자는 아니란 뜻이겠지.
이런 추측보다 더 명확하게 사실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자넷과 대화 중인 헨리를 바라보았다.
- 띠링.
헨리의 연금술 스킬 레벨은…
고작 3으로, 데이지보다 훨씬 낮았다.
“이봐 크리스? 그 물약 좀 꺼내줘라.”
“여기.”
“…그런데 너 언제부터 나한테 말 놓았냐?”
“처음부터.”
“…어,어라?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헨리가 크리스에게 물약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위로 들어 올려 그 색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단순히 눈으로 본다고 알 수 있을 리가.
“물약을 개봉한 적은 있나요?”
“전에 한 번 열어봤습니다. 냄새만 맡아 본다고.”
“음! 일단 보관 상태는 우수합니다. 병도 꽤 좋은 놈을 쓴 것 같고? 처음 보는 모델이지만요.”
조수라고 소개한 소녀보다 연금술 실력이 낮은 헨리.
실제로는 공방에 있는 물약은 전부 그녀가 만들면서,
그 사실을 타인에게 숨기는 데이지.
솔직히 흥미가 일었다.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기에 이런 이상한 연기를 해야 했을까?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엮여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나를 향한 한줄기의 미약한 시선을 느꼈다.
어처구니없게도 지금까지 내가 관찰했던 데이지였다.
‘날 보고 있었어?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내 다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데이지의 시선이 바닥을 향해있기에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보는 것은 부목이 되어있는 내 다리.
어째선지 그녀는 아직 달라붙지 않은 나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스윽.
내가 다리를 움직이자 정신을 차린 듯 하다.
자연스럽게 데이지의 시선이 다리를 움직인 나를 향했고,
잠깐동안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조차 그녀가 시선을 슬며시 피하며 무마되었지만.
시선을 피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낯을 가리는 어린애라면 조금 더 화들짝 놀랄 만 한데.
점점 더 흥미로워졌다.
‘5레벨 이상의 스킬을 가진 사람은 기사밖에 못 봤는데… 그걸 저런 어린애가 가지고 있고, 저런 복잡해 보이는 사정에 얽혀있지, 또 연기까지 자연스러워?’
게다가 육감이 은근슬쩍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내게 무언가 이득이 될 것 같은 기분.
그런 느낌이 데이지에게서 풍겼다.
“…그럼 감정은 맡기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헨리씨.”
“네. 하얀 고래의 단장님. 그럼 대금을 치르시면 바로 감정에 들어가도록 하죠.”
“그 전에. 이 공방에 저희 용병단 한 명을 상주시켜도 괜찮겠지요? 아무래도 그 물약이 좀 어렵게 구한 놈이다 보니, 최대한 소식을 빠르게 듣고 싶습니다.”
“으음… 그건…”
헨리가 슬쩍 뒤를 흘겼다.
데이지가 기척을 죽인 채 서 있는 곳을 향해.
고개는 돌리지 않고, 짧은 순간 동공만이 옮겨졌기에 나를 제외한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듯싶었다.
- …
동시에 데이지는 모르는 척한 발자국을 앞으로 옮겼다.
제대로 주시하고 있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
“네. 상관없습니다.”
과연…
사전에 상의하지 못한 내용의 결정은 이런 식으로 내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의 상황은 우연이라 치부하긴 어려웠다.
“어려운 요구일 수도 있었는데,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의뢰 대금이 넉넉해서 저희야말로 감사를 드려야 하지요.”
자넷은 요구가 수락되자 만족하는 얼굴을 했다.
방금의 회의를 끝으로 의뢰 내용은 결정되었다.
우리는 연금 공방을 뒤로하고 나왔다.
나는 부축을 해주는 크리스에게 어깨를 기대었고.
‘…저 아이는 끝까지 내 다리를 보고 있네. 혹시 이상한 게 묻었나?’
부목이 대어져 있는 다리를 보아도 어색한 점은 없었다.
이 세상에도 붕대 정도는 흔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
나중에 만나게 되면 은근슬쩍 물어봐야겠다.
어째서 내 다리를 계속 보고 있는지에 대해.
- 터벅. 터벅.
당연하지만 아직 물약은 맡기지 않았다.
공방에 상주할 단원에게 의뢰금과 물약을 쥐여 다시 보낸다고 말을 하고 나온 것이다.
“상주 인원 말인데요, 그거 저 연금술사를 감시하기 위함이죠?”
“그럼. 당연하지. 그 비약이 어마무시한 놈이라고 밝혀져 봐. 가지고 왕국에서 도망가 버릴걸?”
“뭐… 그 산더미 같은 보물 중에서도 중요하게 보관되어 있던 약이니 전혀 없을 확률은 아니네요.”
“으음… 사실 내 감은 살짝 아리까리 한데, 그래도 이런 건 대비 하는 게 무조건 옳으니까.”
자넷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감은, 그 비약이 돈이 될지는 애매하다고 말해주고 있나 보다.
확실히 그럴 만 했다.
원작의 비약은 결국 효능을 밝혀내지 못해 계륵으로 남았고,
지금의 비약은 비약이 아닌 그냥 색소를 탄 이온 음료가 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단장님. 그 상주 단원 말인데요…”
“아.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지. 파계승.”
살짝 놀랐다.
하고자 했던 말이 자넷의 입에서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넌 지금 부상 때문에 의뢰하기도 힘들고… 차라리 거기 앉아서 휴식이나 취해.”
“…제가 없는 동안 의뢰를 하실 예정인가요?”
“뭐, 별건 아니고… 그냥 이 근처에서 처리 가능한 잡다한 의뢰?”
실제로 원작에서 감정을 기다리는 동안 한 의뢰는 정말 별것 아니었다.
수도다 보니 몬스터는 전혀 출몰하지 않았고, 치안도 가장 안정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멜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수도를 즐기는 모양이지만…
굳이 내가 식도락 여행에 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절 그냥 연금 공방에 두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다시 가야 하잖아요.”
“…단원들에게 잠시 떨어진다 인사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아.”
*
모두에게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크리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연금 공방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크리스. 참고삼아서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아까 연금 공방에 있던 소녀. 걔 있잖아.”
“아, 데이지씨?”
“응. 혹시 그 여자애한테도 네 ‘감’이 들었어? 저번에 말한, 나랑 이성적으로 엮일 것 같은 사람에 든다던 그 감.”
“…그 여자애 엄청 어리던데?… 당연히 아니지.”
“그래?”
“하나도 안 들었어. 전혀. 조금도. 그런데… 그게 왜?”
“최근에는 자넷을 적대하는 등 티를 하나도 안 냈잖아? 요즘도 그런 감이 드나 싶어서.”
“으응… 사실 멜 씨랑 자넷 단장한테는 가끔 드는데, 그냥 내색하지 않을 뿐이야.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그래?”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가 보증해 주었으면 괜찮겠지.
아무리 그래도 데이지는 내 취향 안에 들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만일 크리스가 그 소녀에게도 감이 온다고 말했으면…
의도적으로 멀리해야 했으리라.
물론 데이지가 못생겼다고 말하는 건 전혀 아니다.
꽤 미래가 기대되는 아리따운 소녀다.
그러나 나는 꽃에 흥미를 느낄 뿐이지,
꽃봉오리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 극히 평범한 성 관념을 가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