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분배할 때 너희 몫도 지급하고.”
“으음…”
“으음? ‘으음’이라고 했냐? 야 임마. 절반을 준다는데 그런 태도라고?”
자넷이 어이가 없단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당당하다.
이건 전부 자넷에게서 배운 거다.
24시간이 지나 다시 아침이 밝자 숙취 따윈 하나 없어 보이는 자넷이 얼굴을 비췄다.
그렇게 된 것이 조금 전.
우리는 지금 협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유적 탐사에서 빼돌린 재화에 대해 어떻게 분배를 할지에 대해서.
‘절반이면… 상상 이상인데?’
아무리 유적 탐사에 우리 덕이 크다고 한들 절반은 통이 너무나 컸다.
그녀는 모르지만, 미로의 정답을 단번에 찾은 건 순수하게 자넷의 덕이니.
만약 나 혼자 왔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절반.
자넷의 입장에서 보면 보물을 빼돌린 것도 내 덕이니,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닌가?
하지만 나머지 절반을 용병단에게 나눠줄 때 끼워주기까지 한단다.
너무나 통이 큰 조건.
듣자마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걸 막아서야 했다.
“그냥, 살짝 애매하게 느껴져서요.”
“이놈이? 사실 만족하면서, 혹시 더 뜯어낼 구석이 있는지 연기하는 거 모를 것 같아?”
확신하는 자넷의 표정.
나를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기에,
더이상의 연기는 의미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표정 연기엔 꽤 자신 있었는데… 어디서 들켰나요?”
“큭큭. ‘으음…’ 같이 어중간하게 망설이는 척하면 다 들켜. 그냥 인삭을 팍! 구긴 다음 불편하단 티를 엄청 내야 상대도 쫄리지.”
“…단장님, 혹시 양심 같은 건 내다 파신 건가요?…”
“어. 가져다 파니까, 돈을 주더라고. 그래서 냉큼 팔았지.”
자넷이 놀리듯 말한다.
좋아.
그녀가 나름대로 능력이 있단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왜,왜 이렇게 단장님이 얄미울까요?”
“푸하하! 칭찬 고마워!”
“어제 술자리에서도 그렇게 좀 똑 부러졌으면, 어디 덧납니까?”
“…씹새끼.”
“뭐라 했더라? 섹스는 기분 좋…”
“야! 안 닥쳐?”
- 타악.
내게 날아드는 주먹을 실실 웃으며 손으로 잡아챘다.
진짜로 힘이 실린 건 아니고, 그냥 내 입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자넷의 얼굴에 띈 홍조는 처음 본다.
아무래도 부끄러움보다는 쪽팔림에 가까운 홍조겠지.
연금술사가 만든 증류주.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숙취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시스템에 나오지 않은 가장 큰 부작용이 있었다.
얼마나 취했든, 기억을 잃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약인 것들이 꽤 많이 있다.
그리고 어제 아침의 회식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에서 지워진 편이 좋았을 것이다.
자넷에게는.
“제가 이긴 거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네가 이기긴 뭘 이겨?”
“그럼 방금 하다 만 이야기나 계속?”
“…유치한 새끼.”
“단장님 수준에 맞춰 드리는 거죠. 딱 사춘기 아닙니까? 절제 따윈 모른 채 술을 먹고, 성(性)에 흥미를 보이…”
“내,내가 잘못했다. 야. 그만하자…”
결국 자넷이 손바닥으로 눈을 감싸며 말했다.
어쩐지 저 포기한 얼굴을 보니 만족감이 든다.
멜이나 고다연이나 나를 어른스럽다고 말하는데,
다 틀렸다.
“큭큭큭.”
“아주 좋아 죽네 죽어. 씨발… 내가 니 장난감이지?”
“크흠! 그럼 장난은 그만하죠. 제게 주신 제안. 솔직히 말하면, 큰 불만 없습니다.”
“그렇겠지. 한두 푼도 아니고, 그 보물의 절반이면… 값비싼 수도의 땅에 집을 사서 놀고먹을 수 있는 수준이니.”
사실 얼마나 많은 돈인지는 잘 모른다.
그냥 내 능력에 대한 가치를 내리깎기 싫었기에 받아낼 수 있는 만큼 받아내는 것일 뿐.
내가 수도에 으리으리한 집을 지어서 뭐 하나?
SF 소설 속에 나오는 일반 가정집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하는데.
여차할 때 쓸 수 있는 수많은 패 중 하나.
내게 돈이란 그 정도의 위치였다.
이다음으로 대화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크리스가 필요했다.
실질적인 보물은 그녀의 아공간 안에 있으니.
나는 크리스와 자넷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쉬고 있던 크리스는 얌전히 아공간을 열어 보물을 바닥에 쏟아 내었다.
곧, 작은 황금색 언덕이 방바닥에 쌓였다.
- 챠르륵.
“단장님? 뭐 하시나요?”
“돈 세야지. 빼먹은 거 없는지.”
“…세상에. 그걸 하나하나 세게요?”
“이런 건 오히려 세야지 서로 깔끔하게 거래할 수 있어. 막말로 내가 나중에 일부분 빼돌린 것 같다고 우기면 어쩌려고? 그때 가선 증거도 사라지잖아?”
자넷이 언덕으로 다가가 금화나 보물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빼돌리려면 언제든 기회는 널려 있었다.
그냥 지구에다가 금화 한두 개쯤 놓고 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자넷의 돈 냄새를 맡는 능력이면 눈치를 챌 위험이 있어 건드리지 않았는데…
올바른 판단이었나보다.
“…좋아. 딱 맞네.”
뒤에서 자넷이 돈을 세는 것을 지켜보았기에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자넷이 나눈 두 개의 황금 언덕 중 하나는 내 것이다.
크리스는 우리 몫으로 받은 보물들을 아공간에 넣었다.
하얀 고래 용병단의 몫인 나머지 절반은…
“아…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지… 외부 사람이 보면 좀 골치 아픈데…”
“단장님도 공간 확장 마법 걸린 주머니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른 단원한테 들켰는데요.”
“아… 그 기사 씹새끼… 조용히 검사 하자니까, 기어코 거절하더니 그리 소란을 부리면… 하…”
자넷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전 재산의 위치가 공개된 것이 마음에 안 드나보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은행을 이용하게 생겼네.
그래도 자넷 정도면 VIP 고객이니 상당한 보관비 할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포기하시고 그냥 주머니에 넣으세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주머니 안 비싼 놈이라 이렇게 많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말했지? 포션보다 싸다고.”
반으로 나누었다고 한들 여전히 언덕을 이룰 정도의 보물.
자넷의 가진 주머니엔 반은커녕 반의반도 넣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기사가 주머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주머니 안에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했지?
결국 우리에게 다시 한번 신세 지기로 했다.
적어도 이 보물을 동등한 금액의 현금으로 바꾸고,
단원들에게 배분을 마칠 때까지는 크리스가 가지고 있기로.
“보관비는 얼마로 할까요?”
“…뭐?”
“보관비요. 저희에게 맡기신 보물을 보관해 주는 비용.”
“야 이 양아치야!!”
자넷이 고함을 질렀다.
얼굴도 억울함을 가득 담은 것이,
보물을 절반이나 주면서 보관비를 따로 뜯기는 것이 마음에 안 드나보다.
…진짜네?
그녀는 아까 자신이 한 말대로 연기를 할 때, 최대한 격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음…’이란 애매한 반응을 해 들킨 나와 달리 간을 보고 있는 걸 알아채지 못하게끔.
확실히 저리 연기하니까 훨씬 진실성이 느껴진다.
어지간한 사람은 상황에 휩쓸려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리라.
그리고 보관비를 받지 않겠지.
하지만…
난 방금 배운 걸 까먹을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아니다.
“야! 한두 푼도 아니고 그리 많이 줬는데 안 받을 만 하잖아!!”
“그건 단장이 제게 베푼 것이 아닌, 제 능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받은 거잖아요. 당연히 이건 따로 계산해야죠.”
“……”
“저희도 아티팩트 공간이 무한한 건 아닌데,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면 보관비를 받아야 함이 옳습니다. 아시면서 왜 연기를 합니까?”
“큼큼… 시험해 본 거야. 배운 걸 제대로 기억하는지.”
“또 거짓말은. 그러다 제가 속았으면 보관비는 절대 안 줄 생각이었죠?”
“…원래 사람은 직접 손해를 봐야 가르침이 제대로 머릿속에 박힌다고. 너처럼 말로만 듣고 실전에 써먹는 놈은 별로 없어.”
“오. 이게 단장님의 교육방식이란 건가요?”
“그렇지. 그리고 보관비 정도의 적은 금액은 교육비고.”
그러고 보면 자넷에게 무언가를 배울 때는 항상 이런 식이었던 것 같긴 하다.
꽤 일관성 있네.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세계에서 자넷 정도면 엄청나게 상냥한 걸지도 모르겠다.
교육비도 그리 비싸지 않았으며, 확실하게 돈값만큼 알려주니까.
“좋아. 그럼 거래는 성사 됐다?”
결국 적당한 값을 받고 보관해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보관비는 반드시 받아야 했다.
이 보물은 묶인 보물이기 때문에.
바로 팔아 치워서 현금으로 전환이 어려운 것이다.
‘유적을 나온 지 얼마 안 된 용병단이 보물을 팔았다?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닌 무더기로?’
그날 이후 아주 골치 아픈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심증만으로 우리를 잡아들여 수작을 부리리라.
암시장?
자넷의 말로는 놈들을 신뢰하는 놈은 더 없을 멍청한 놈이란다.
오히려 그놈들이 신나서 정보를 팔아 재꼈으면 재꼈지.
적어도 유적 사건이 좀 잠잠해질 때를 기다리거나,
아예 제국으로 원정을 가 다른 나라에서 팔아 치워야 한다.
당연히 둘 모두 하루 이틀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크리스의 아공간은 묶이니…
아직까진 여유 공간이 넉넉하다고 한들, 부담이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넷 역시 이를 인정하고 보관비를 순순히 납부했다.
‘이게 그 이유겠지. 내가 이 정도 재화를 얻었음에도 자넷이 불안에 떨지 않는.’
오늘 내가 받은 보물 정도면 포션은 사고도 남는다.
지난번 자넷과 한 ‘계약’에서 언제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편해하는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보물을 현금으로 바꾸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필요했기에.
자넷의 머릿속이 훤히 읽혔다.
보물로 포션의 값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하면, 세탁이 필요한 돈이라면서 그 값어치를 절반 이상이나 깎겠지.
내가 아까워서 도저히 거래를 수락하지 못할 만큼이나.
자넷이 보는 나는 돈에 대해 어느 정도 집착이 있어 보일 확률이 높다.
나는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어떻게든 받아내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초점이 ‘대가를 받아내는 것’에 있고, 정작 그 대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단 걸 모르는 모양이다.
실제로 언제든지 이 보물쯤은 포기할 수 있는데.
“그럼 이젠… 이 물약의 처리를 할 때가 되었네요. 크리스?”
“아. 여기.”
나는 크리스에게 초록빛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나뭇잎의 즙을 짜 넣은 것만 같은 이 액체는, 사실 색소를 탄 이온 음료다.
“연금술사에게 감정을 맡긴다고 하셨죠?”
“응. 파계승, 네 능력으로 밝혀내지 못했으면 어쩔 수 없지.”
“아시는 연금술사는 있습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래도 수도니까 구석구석 뒤지다 보면 있겠지.”
자넷은 약병을 내게 받아 그 색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크리스는 자넷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튼 들키지 않을 것 같다.
“연금술사… 연금술사라… 그러고 어제 술자리에서 마셨던 술 있지 않습니까?”
“야야야! 너 그 이야기 안 하기로…!”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 술병, 유적에 들어가기 전에 잡화점에서 한번 본 기억이 있거든요.”
“…술? 그 증류주?”
“네. 그 술도 연금술사가 만든 거래요. 출품자가… 헨리의 연금 공방이라 했던가.”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시스템 창의 덕에 알고 있다.
증류주를 만든 것이 헨리의 연금 공방에 있는 ‘데이지’라는 연금술사라는 것을.
그 연금술사는 시스템이 인정하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이 초록빛 액체가 그냥 전해질 좀 섞인 물이란 걸 단박에 알아챌지도 모른다.
하지만 밝혀낸들 어찌하겠는가?
자넷으로선 나를 절대 의심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병 안에 든 것이 원래 그러한 액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한 이유로 자신 있게 그 연금술사를 자넷에게 추천할 수 있었다.
‘괜히 실력 없는 연금술사에게 맡기면 시간만 버릴 테니…’
원작에서는 연금술사가 비약의 정체를 밝혀낼 때까지 하염없이 수도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굳이 그런 생산성 없는 일을 하기는 싫었다.
차라리 후딱 액체의 정체를 밝혀낸 뒤, 보물을 처분하기 위해 제국으로 가는 등 의뢰를 수행하고 싶었다.
“연금 공방? 그런 쓰기 편리한 곳이 있다고? 의뢰도 받는대?”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그런데 술을 내다 팔 정도면… 돈을 주면 의뢰를 받지 않을까요?”
“오! 좋아! 어딘지는 알아?”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공방의 이름을 알면, 찾기는 쉽겠죠.”
우리는 그렇게 ‘헨리의 연금 공방’으로 향하기로 결정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