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걸 손쉽게 눈치챘지만,
캐물을 수는 없었다.
자넷의 표정이 꽤나 진지해 보였기에.
어중간히 물어봤다가는 더 이야기해 주지 않을 낌새였다.
기회가 오기를 차분히 기다리자.
지상으로 나가려는 하얀 고래 용병단은 전체적으로 소지품 검사가 실시 되었다.
발리에르 영주성으로 들어갈 때 보다 몇 배나 더 꼼꼼히.
원작에서는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과 반대되었다.
도중에 자넷의 품에서 금화가 잔뜩 들어 있는 마법 주머니가 발견되며 잠깐 소란이 일었지만,
그조차 금방 종식되었다.
왕국의 가장 큰 은행에서 발급하는 재산 보증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역시 금전에 관해서는 빈틈없이 준비를 해놓는 자넷다웠다.
“후아… 밖은 아침이었네? 아래에서 며칠이나 있었는지, 시간 감각도 까먹었다니까.”
자넷이 차가운 새벽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나와 크리스는 햇빛 정도야 마음껏 볼 수 있었으나,
이들은 아니겠지.
색다른 감흥을 느낄만하다.
“파계승아.”
“네.”
“이쯤 되면 궁금하네. 그 기사, 엄청 꼼꼼하게 뒤져대던데… 솔직히 좀 쫄렸다고. 도대체 아티펙트는 어디 숨긴 거야?”
“대답 안 할 겁니다.”
“나도 알아. 대답을 들을 거란 기대는 없었어. 그냥 감탄사지, 감탄사.”
몇 주 만에 맛보는 지상의 공기.
그렇다면 용병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무엇일까?
당연히 술과 고기를 입안에 욱여넣는 것이다.
시간이 해가 막 떠오르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었다.
이곳은 술집이 골목마다 들어차 있는 수도니까.
찾아보면 분명 운영 중인 술집도 있을 것이다.
“매번 가는 그쪽으로 갈까? 거긴 이 시간에도 열려 있을 거야.”
- 터벅터벅.
멜과 크리스의 부축을 받으며 자넷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다행히 자넷이 안내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크기가 어찌나 큰지, 잘하면 반백에 달하는 용병단 전원이 숙소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크리스, 멜을 제외한 단원들은 이 가게가 익숙한 듯 보였다.
텅 빈 자리에 자연스럽게 나눠 앉아 주인장을 불러대었으니까.
“하암… 어이쿠? 하얀 고래 분들 아니십니까? 오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드디어 찾아 주시는군요.”
용병들이 사방에서 침을 튀기며 주문을 시작했다.
그 대부분이 술이었으며, 그다음으로 많이 시킨 것은 고기가 주가 되는 요리다.
메뉴 설명을 듣지도 않고 시키는 것이 이 술집에서 잘나가는 음식도 꿰고 있나 보다.
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류 용병단의 노련함을 이런 엉뚱한 곳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우리 애기들 세 명은 나 따라 앉아! 이 집은 다 좋은데, 가끔 함정 음식이 숨어있단 말이지? 아무 음식이나 주문하면 못 볼 꼴 본다고.”
“허허… 작년에 내놓은 신작, 식초 절임 시금치 스튜가 그리 맛이 없었나요?…”
“넌 그걸 돈 받고 팔면 안 됐어.”
“뭐… 안 팔리긴 하더군요.”
후덕한 인상의 여관 주인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주인 겸 주방장까지 맡고 있나 보다.
게다가 이 시간에도 깨어있다니,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려나?
가진 풍채 때문에 그리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 부인은 건강하시고?”
“아, 제 아내요? 지금 퍼질러 자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무게가 늘어나고 있지요.”
“큭큭큭. 네 뱃살이나 집어넣고 말해.”
“크흠! 다른 테이블도 주문은 끝냈고… 단장님께선 무얼로 드실 건가요?”
“고기 두 배로 넣은 라자냐. 안에 이상한 거 처넣지 말고. 소시지나 통짜 햄도 약간 줘. 아, 곁들일 빵도.”
“하하! 매출이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술은 어떻게? 맥주나 적당한 와인?”
여관 주인이 넉살 좋게 턱살을 흔들며 말했다.
난 술의 종류는 가리지 않는다.
못 먹어 줄 정도만 아니면.
그건 자넷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술을 즐긴다기보다는 술자리를 즐기는 타입이었으니.
평소라면 맥주나 와인으로 만족했겠지만…
오늘의 자넷은 조금 달랐다.
“…난 럼으로. 저 셋한테는 맥주나 줘.”
“어… 증류주라… 저희 가게 럼 중 그리 질 좋은 놈은 없습니다. 꽤 맛이 거칠 텐데요?”
“괜찮아. 오늘은 좀… 독한 놈이 땡겨서.”
“오! 단순히 독한 술이 당기는 거면 추천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잠시 사라졌다 돌아온 주인의 손에는 말끔한 술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술병인데?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실력 있는 연금술사의 증류주 #3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취함 상태 이상 부여
상세:
정체 모를 싸구려 재료들을 발효 시켜 만든 증류주입니다.
양조한 연금술사의 실력이 무척 뛰어나 불순물은 거의 없습니다.
즉, 숙취가 거의 없는 술입니다.
그러나 돈벌이용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리 맛의 퀄리티가 높지 않습니다.
도수를 조금 낮춘 상태로 개량했습니다.
가끔 역함이 올라오는 부작용을 없앴습니다.
도수 - 51%
* ‘헨리의 연금 공방’ 소속 데이지 (제작자)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상태창을 보자 알았다.
이 술병, 어디서 봤나 했더니 유적에 들어가기 전 잡화 상점에서 바가지를 쓸 뻔한 그 술이다.
연금술사가 만들었다는 증류주.
아무래도 우리가 유적을 내려가 있는 동안 개량한 버전도 나왔나 보다.
위험한 수준의 도수와, 부작용을 지운 걸 보니.
게다가 대놓고 아이템 이름에 3번째 술이라 나와 있다.
“요즘 수도에 숙취가 없는 술로 유명하기 그지없는 술입니다! 뭐, 제작자가 술맛을 모르는지 맛은 없지만요. 그래도 취하기 위해 마실 때, 이보다 더 좋은 놈은 없죠.”
“…비싼 놈인가? 아, 아니, 됐어. 그냥 줘.”
- 뽀옥! 꿀꺽.
자넷은 여관 주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코르크 마개를 비틀어 뽑더니, 바로 한 모금을 마시는 것 아닌가?
아직 음식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데.
“크으… 으. 존나 세네. 마음에 들어.”
인상이 와락 구겨진 것이 연금술사가 만든 증류주라고 해도 맛이 거칠지 않은 건 아닌가 보다.
하긴, 도수가 무려 51%인데…
“세분은 맥주로 괜찮나요?”
- 끄덕.
굳이 자해에 가까운 간의 혹사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었다.
우리 셋은 얌전히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 시끌시끌!
고기 라자냐는 맛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한국에서 내다 팔더라도 꽤 흥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만큼 값이 비싸긴 했지만…
내 돈도 아닌데, 걱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야, 퐈계승아. 마싰냐? 흐흐… 더 시켜주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짜고 기름진 음식.
내 입맛과 살짝 동떨어져 있는 음식들이다.
그렇기에 별로 손대지 않았는데,
자넷은 그걸 눈치채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 테이블에 앉은 넷 모두 그리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미 시킨 음식들도 전부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더 시킨다니?
마찬가지로 자넷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는 못했다.
당연하다.
저 무식한 여자는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저 술병의 절반이나 비워버렸으니까.
“어휴… 이젠 거의 다 드셨네… 단장님. 술 좀 천천히 드세요. 누가 뺏는답니까?”
“크흐흐! 얌마, 용병이. 어? 술 한 병을 깠쓰면 죽떠라도 먹는 거…”
“입 닫고 소시지나 드세요.”
“응!”
나는 즐겁게 소시지를 포크로 해체하고 있는 자넷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종종 술자리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만취한 건 처음 본다.
그만큼 하고 있는 고민이 깊다는 것이겠지.
‘아까 있었던 왕자와의 독대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뜻인데…’
원작에서 얻은 정보로는 전혀 유추할 수 없었다.
자넷에게 고민거리가 생긴 것은 물론, 2 왕자가 등장하지도 않았으니까.
“…마셔도 좀 절반만 마시지.”
“예? 찬영님, 원래 술은 시킨 사람이 전부 마시는 거 아닌가요?”
“맥주나 와인 같은 건 그러는데… 좀 센 술은 달라.”
“그,그래요?”
주도를 잘 모르는 멜이 내게 질문했다.
이곳에도 킵(Keep) 문화가 있는지는 모르니…
보통 여러 명이 잔 단위로 먹거나, 남기면 가지고 가는 수준이겠지.
저리 스트레이트로 위에 쏟아붓는 짓은 바보 같은 행동이다.
“주이이인자아앙!! 나 이 술 한 개, 한 병, 한 개? 아무튼 한 병만 더…”
“크리스! 막아! 죄송합니다. 추가 주문 안 해요.”
“내가 워언래 안이러는데, 골치 아픈 이리 이써서 그래. 어? 마시면 안 돼? 안되냐고!”
“안됩니다.”
“근데 사실 다 못마셔쓸 거 같아. 킥킥! 퐈계승 똑똑케!”
슬슬 들어간 술이 몸에 돌기 시작하나 보다.
본격적으로 주정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미리 방을 잡아둬서 다행이지…’
전에 이 여관을 들어 채운 용병들이 유적탐사를 위해 우수수 빠진 덕에 빈방이 많았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방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건 꽤 좋았다.
다시 모이는 것만 해도 적잖은 시간을 잡아먹었으니.
“다 먹었어? 일어날까?”
셋 모두 적당히 배를 채운 것 같다.
슬슬 방으로 올라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기어코 술 한 병을 다 비운 자넷은 이미 인사불성이 되었고,
우리 테이블에서 술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찬영님?… 저,전 조금만 더 마셔보고 싶은데…”
“멜? 너 더 마시고 싶어?”
“어,어, 취한 기분이 뭔지 궁금해서요?…”
분명 법적으로 마셔도 되는 나이지만,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보일까?
취한 상태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건 청소년이나 할 법한 생각인데…
심지어 앞에서 자넷이 어떤 추태를 하는지 보고 있으면서.
아무래도 이 정도로는 멜의 호기심을 막기엔 부족했나 보다.
“너 지난번에 제대로 취해가지고 내 방을 착각해…”
“으악! 알겠어요! 들어가시죠!”
호기심 많은 멜은 결국 술잔을 놓았다.
음식이 남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기보다는 슬슬 쉬고 싶었다.
우리는 다 같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 휘청. 턱.
“조심 좀 해라?”
“푸하핫! 야, 크리스! 나 취했나봐핳하!!”
“너 빼고 다 알아. 이 골빈년아…”
“크핫! 골빈,골빈년이래! 푸하하핫!!”
“어휴… 병신…”
몸을 일으키다 휘청거리는 자넷을 크리스가 붙잡았다.
또한 은근슬쩍 자넷이 술에 취한 틈을 타 말을 놓았다.
근데 좀 많이 편하게 놓았네.
욕까지 다 하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크리스는 원래 저런 성격이잖아?’
내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얌전할 뿐이지,
원래 남들에게는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이 그녀다.
또한 한 입담 하기도 했고.
“으허헝… 나도 남자 만나보고 싶어… 외로워…”
“찬영. 우리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 말자. 반드시.”
“흐히. 크리수, 크리스? 나 진짜 궁금한 거 이써. 진짜로.”
“뭔데.”
“섹스하면 기분 조아?”
“아 진짜. 넌 두 번 다신 내 앞에서 술 마시지 마라.”
“아하! 딱 아랐다!! 너네 아직 안 했꾸나! 머야, 크리수 너도 모르…읍읍!”
아무리 봐도 자넷이 혼자 계단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크리스가 자넷의 걸음을 돕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부축해주고 싶지만, 나는 부축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옆에 붙은 멜의 부드러움을 느끼면서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같은 방 쓰지? 크리스, 단장 좀 잘 부탁할게.”
“얘두라 잘쟈아아…?”
“몰라. 대충 침대에 던져둘 거야. 멜 씨는 제 찬영 잘 좀 부탁할게요!”
“앗! 네엡!”
크리스의 ‘제 찬영’이란 말에 멜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다.
그렇게 크리스와 자넷은 배정받은 2인실로 사라졌다.
“우리도 갈까? 부축은 안 해줘도 되는데.”
“아,안돼요! 절대!”
“…그렇다면야.”
- 끼익.
꽤 넓은 방이 우리를 마주했다.
수도의 여관이라 그럴까?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곳보다 청결해 보였다.
이 여관은 그것만으로 내 마음을 상당히 흡족하게 만들었다.
각 구석에 놓인 수제 침대는 총 4개.
나와 멜이 배정받은 곳은 4인실이지만,
다들 아직 뒤풀이를 하는 데 한창이기에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멜. 바로 잘 거야?”
“네? 간단히 씻고 자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자기 전에…”
- 스윽. 포옥.
“하으?!…”
나를 부축한 멜의 몸을 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볼을 머리에 댄 채, 뜨거운 날숨과 함께 작게 속삭였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안돼는… 입에서 음식 냄새…읍.”
- 츕.
아직은 키스까지만.
나는 멜의 턱을 잡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몇 번 쪼듯이 입술을 상냥히 뜯자,
멜이 망설이면서도 입술을 열어주었다.
“하움…”
서로의 입에선 아직 식지 않은 치즈와 토마토소스의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