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찾았다.”
얼핏 보면 문양처럼 보이는 문자가 천장의 벽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이 아닌,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Δεύτερο βήμα.
대충 ‘두 번째 단계’란 뜻이다.
- 띠링!
그 정보창을 살펴보아도 내가 알던 것과 변하지 않았다.
이건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비밀 실험실 #2’으로 향하는 입구였다.
문양이 새겨진 곳은 천장.
다행히 손이 닿지 않을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부상을 당한 발로 점프까지는 할 수 있으나, 착지할 때가 걱정된다.
하지만 괜찮으리라.
딱히 손으로 건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멜이 확인 시켜 주었으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동전 한 개를 꺼낸 뒤,
망설이지 않고 문양을 향해 튕겼다.
- 티잉!
“…”
공중을 회전하며 돌아가는 동전이 문양에 닿았을 때.
나는 소음하나 없이 실험실로 이동한 것을 확인했다.
빛 하나 없이 잠긴 어둠.
하지만 시력 강화 버프와 더불어 암시 버프까지 받은 내게는 대낮처럼 훤하게 보였다.
‘역시 이곳도 ‘실험실 #1’처럼 텅 비었네… 저 상자를 빼고는.’
내용도 이해하지 못할 자료는 내게 있어서 큰 값어치를 지니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금은보화 역시 마찬가지.
용사가 나를 노리고 있는 지금, 가장 값진 것은 다름 아닌 무력을 키워 줄 기연이다.
- 끼익…
혹시나 함정이 있는지 시스템으로 전부 확인한 뒤,
나는 상자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역시나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물약이었다.
윤기가 도는 황금색의 액체.
마치 갓 짜낸 올리브유 같은 신선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액체가… 흐르고 있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들고 있음에도 병에 담긴 액체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불규칙적으로.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생명을 가진 슬라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이름: 풍요의 정수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스킬, ‘대지모신(大地母神)의 가호’ 획득.
상세:
불사의 비약에 대한 연구 중.
불멸종인 정령에게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된 비약입니다.
목적으로 하던 불사의 비약의 제작은 실패했습니다.
단순히 실험 도중 파생된 비약이지만, 큰 가치를 지녔다는 건 변함 없습니다.
사로잡은 ‘대지의 정령’의 정수를 뽑아내어 만들었습니다.
패시브 스킬, ‘대지모신(大地母神)의 가호’를 얻습니다.
* 추가 정보
[대지모신(大地母神)의 가호]
풍요와 창조, 성장을 관장하는 가이아의 가호가 몸에 깃듭니다.
(풍요)
- 아직 해금되지 않았습니다 -
(창조)
- 아직 해금되지 않았습니다 -
(성장)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 기본 스텟 숙련도 상승 + 100%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 스킬 숙련도 상승 + 100%
[부작용]
▷ 비약, ‘풍요의 정수’를 보유·섭취한 사실이 알려지면 정령이 적대할 수 있습니다.
* 세계관 귀속 아이템입니다. 상점창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제작자 - 트리스 메기스투스
=
“역시!”
시스템 창이 보여준 내용을 보곤 흥분에 차 감탄사를 뱉었다.
비약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섭취 시 얻게 되는 것은 모든 스킬의 성장률에 100%가 더해지는 것.
혈귀화를 안겨 준 진조의 혈정처럼 당장 보이는 무언가를 얻게 된 것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풍요와 창조. 아직 해금되지 않았다라… 이 말은 해금이 가능하단 뜻이겠지?’
스킬에 잠겨져 있던 옵션을 풀 때 필요한 조건이 무엇일까?
당연히 높은 확률로 스킬 레벨업이다.
즉, 저 패시브 스킬은 레벨업이 가능할 것이다.
레벨을 올렸을 때 옵션만 해금되는 것이 아니다.
(성장)의 숙련도 보너스 역시 오를 수 있다.
즉, 기댓값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후반 스킬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환장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패널티가 거의 없잖아?’
당장 마시더라도 아무런 패널티가 없다.
미래는…
솔직히 정령이 내 인생에 깊숙이 엮일 것 같지 않았다.
단순히 감뿐만이 아니라,
우선 이 세계에서 정령사나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한 티끌 조차 들을 수 없었다.
또한 현재 들어갈 수 있는 소설들 역시 전부 정령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나마 정통판타지인 이 ‘하얀 고래의 발자취’가 엮일만하다.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정령이 나올법한 소설에 들어갈 때쯤이면 정령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 정도로 강해졌을 테고…’
언제 만날지 모르는 정령을 걱정한다고 비약을 마시지 않는 건 너무나 겁쟁이 아닌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병을 열어 약을 마셨다.
- 움찔!… 꿀꺽.
“씹… 뭐야?
미끈거리는 액체가 입에 들어오자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순간 놀라서 흘릴 뻔한 걸 겨우 삼켰다.
덕분에 맛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약간 찝찝했지만,
아무튼 시스템 창을 확인해 보니 스킬은 정상적으로 획득했다.
*
2 왕자가 유적에 가장 처음 도착하고 한 행동이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정답은 큰 한숨이다.
그는 웅장하게 지어진 임시 거처를 보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아무래도 저 임시 거처는 왕자의 지시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보다.
‘그런데… 이명인 가면의 천사가, 비유가 아니라 진짜 가면이었어?’
2 왕자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저 철 가면이다.
인간의 표정을 정교하게 찍어낸 저 철 가면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숨긴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다.
손과 발목, 심지어 목덜미까지 옷에 싸여 피부 한 톨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자의 상태창을 확인하자 알 수 있었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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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보드엠 드 그리다니아
[직업]
[힘] 12 [민첩] 7
[체력] 5 [지능] 12
[기교] 21 [매력] 98
[마나] 55
[특성] 『어진 군주』
* 특이사항
상태이상(질병) - 나병(한센병, Hansen)
완치가 될 때까지 피부 조직이 무너집니다.
상급 이상의 포션을 사용해 악화를 막고 있습니다.
=
=
『어진 군주』
뚜렷하고 명확한 통치 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내린 결정은 높은 확률로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주의하세요.
인간인 이상 판단 실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곁에 다양한 조언자를 두기를 추천합니다.
매력 스텟 + 50
=
‘그리다니아’는 우리가 있는 왕국의 이름이다.
즉, 국명을 성으로 달고 있는 이 남자는 대역이 아닌 2 왕자 본인이 맞았다.
‘문둥병이라…’
흔히 나병 환자에게서 나곤 하는, 피부가 썩는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아 몰랐다.
아무래도 포션을 물 쓰듯 들이붓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피부 조직이 무너지는 것 자체는 막지 못했나 보다.
저리 피부를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니, 혹시 모를 전염을 조금이라도 예방하기 위한 조치인가?
한 나라의 왕자답게 특성 역시 가지고 있었다.
외모가 망가지는 나병을 가지고도 왜 저리 매력이 높나 했더니, 특성의 덕인 모양이다.
스텟을 보면 알다시피…
딱히 무술을 수련한 낌세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스킬을 살펴보아도 검술이나 창술 등등 무기술에 관련된 스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그리다니아 직계 왕족용 심법’을 익히고는 있었으니까.
‘왕국의 왕자가 익히는 심법이라… 소설을 완결하고 난 뒤가 기대되네.’
난 왕자의 스킬에 대해 확인을 끝마쳤다.
이후 상점창에서 위 심법이 나온다는 뜻이다.
비록 내가 마나 부족에 시달린 적은 전혀 없지만…
왕족만이 익히는 것이 허용된 심법이다.
레벨을 올리다 보면 분명 쓸만한 이득을 주지 않겠는가?
저절로 입맛이 돌았다.
“파계승.”
“네. 단장님.”
“나 왕자가 호출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 다른 용병 단장들이랑 같이요?”
“아니. 나만 부르더라? 일단 내가 이 용병들의 대표로 알맞으니, 내게 공지 같은 걸 전달하게 할 모양이야.”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리 성격 좋은 2 왕자라고 해도 냄새나는 용병들을 무더기로 대면하고 싶지는 않겠지.
그런 만큼 자넷은 상당한 적합자였다.
우선 다른 용병들을 대표할 만큼 명성을 가졌으며,
여성답게 청결에 굉장히 많이 신경을 쓰는 타입이었으니까.
“좋아. 난 그럼 바로 갈게. 왕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자넷은 그대로 뒤를 돌아 떠나버리는 듯했다.
나는 살짝 당황해서 뒤돌아선 자넷을 말로 붙잡았다.
“네? 그게 끝인가요?”
“어? 왜? 더 할 이야기 있어?”
“방금 한 이야기를 다른 단원들에게 전달해라, 이런 이야기 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아닌데? 그냥 너 혼자 알고 있어.”
자넷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자넷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제게 왜 해주신 겁니까? 심지어 부단장에게도 말 안 하고 저만 콕 짚어 말씀하시고.”
“아… 그… 모르겠어?”
- 긁적.
자넷의 자신의 뺨을 살짝 긁었다.
어쩐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핑크빛 기류는 하나 흐르지 않았다.
그냥 어색한 분위기만 만들어졌을 뿐.
확신할 수 있다.
이건 남녀 사이의 그 감정이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뭔데?
“말 안 해주실 겁니까?”
“크흠! …화,화해 하자는 뜻… 이지?”
“네? 화해?”
“아니, 전에 내가 말실수 했잖아. 넌 이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듣는 거 정말 좋아하니까, 말해 주는 거지.”
“아…”
평소 내가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으니까,
그걸 해주는 대신 용서를 해달라고?
‘뭐야. 꽤 귀여운 면도 있네?’
인간관계에 약한 그녀인 만큼, 내게 사과할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쥐어짜 냈는지 쉽사리 예상 갔다.
난 이미 ‘생명의 씨앗’을 빼돌리며 용서를 했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과까지 며칠이 걸린 것도 끙끙 고민한 것이 그 이유리라.
어쩐지, 최근 그녀에게 배정된 천막에 박혀 얼굴을 잘 비추지 않더라.
“네… 사실 그리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습니다. 실수 한두 번은 누구나 하기 마련 아닙니까?”
“그,그래? 그럼 다행이고.”
자넷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아무래도 그날의 실수가 꽤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 궁금한 거 있으면 은근슬쩍 대신 물어봐 줄 수 있는데… 뭐 없어?”
“아뇨… 딱히 생각나는 건 없네요. 대신,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도는 궁금합니다.”
“그래? 그 정도는 쉽지. 나는 멀리서 왕자를 몇 번 봤지만, 그는 내가 초면이니… 특별한 비밀 이야기가 오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넷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왕자가 있는 거대한 천막으로 사라지는 자넷을 배웅한 뒤.
그녀가 천막에서 다시 나온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대략 3시간은 걸린 것 같은데?
짧은 이야기만 오갈 줄 예상했던 것과 반대되었다.
원작에서는 고위 귀족이 이 유적에 오래 있기 싫다는 이유로 용병과 기사, 시종을 닦달했기 때문이다.
2 왕자는 꽤 느긋한 성격인가보다.
- 저벅저벅.
“……”
멀리서 굳은 표정의 자넷이 걸어 나온다.
입을 다문 채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갔다.
“단장님?”
- 화들짝!
“으갸악! 어? 어어? 아. 응. 파계승.”
자넷이 온몸을 비틀며 내 부름에 놀란다.
딱딱히 굳은 표정도 그렇고…
정말 하나하나, 수상쩍기 그지없는 움직임이다.
“…땀. 흘리셨어요. 닦으시라고.”
“…아. 고마워. 크흠!”
- 스윽.
자넷은 내가 건네 준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덥거나 흥분해서 흘린 땀은 아니다.
그렇다기엔 자넷의 피부톤이 너무나 창백했다.
저건 식은땀이라고 봐야 옳았다.
도대체 천막 안쪽에서 3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길래?
원작과 전혀 달라진 분기점이라 그런지 예상이 하나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슬슬 연중 된 시점도 다가오고 있었고.
“약속대로 왕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요?”
“하하, 별 이야기 아니야. 그냥 내가 미로 끝의 발견자니까, 기사랑 학자 몇 명을 안내하라는 명령?”
“…그걸 3시간 동안이요?”
“다른 용병단의 처우도 이야기도 했지. 혹시 다른 방이 발견될지 모르니 수색을 멈추지 말라고.”
“…음…”
“아! 그래도 걱정 마. 우리는 이미 충분히 제 몫을 해냈다면서, 의뢰 완수로 치기로 했거든. 재계약 제안을 받긴 했지만, 거절했고.”
“그건… 좋네요.”
“그렇지? 슬슬 햇빛이 그립더라고. 여긴 너무 어두침침해.”
3시간에 걸친 왕자와의 독대.
그중 별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고?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저건 거짓말이다.
자넷은 최선을 다해 평소를 가장하고 있지만…
나의 날카로운 청각과 시각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동공을 잡아내었다.
손에 땀이 찼는지 계속 쥐락펴락하는 건 물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