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안젤리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녀는 머리가 길기 때문에, 한두 장으로는 머리를 말리기 불편했다.
애초에 이런 빨래 같은 집안일은 안젤리가 대부분 해주고 있긴 하지만.
“아, 고마워!”
- 스윽. 슥.
촉촉이 젖은 몸과 가운만을 걸쳐 훤히 드러난 가슴골.
그 사이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슬쩍 떨어진다.
저절로 시선을 사로잡고 마는 광경이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몇 번이나 안젤리의 안에 쌌는데 아직도 서는 걸 보면 참 건강한 몸이란 생각이 든다.
자연 치유가 정력도 회복 시켜 주는 것일까?
“오늘은 잔뜩 했네. 아직도… 그… 아,아랫배가 얼얼한 기분…”
안젤리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저 모습을 보니 당장 안아 들어 침대로 다시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오래도록 격렬한 운동을 해서 그런지,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만족했어?”
“…그,그것 말고도 기쁜 일이 가득이야!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닌데… 생일 같아.”
“천사도 생일 있었어? 아, 생각해보니 당연하려나. 안젤리는 생일이 언제야?”
“앗… 사실 기억이 안 나… 그런데, 지구에는 생일에 선물을 주고받고는 하니까…? 그냥 느낌상 그렇다는 말이었지…”
“푸흡.”
나이와 관련된 주제가 나오자 최선을 다해 말을 돌리려 하는 것이 보인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천계에서 생활하는 안젤리가 지구에서 생일을 챙기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천계는 지구의 시간을 멈추거나 돌릴 수 있으니까.
“좀 늦었지만 뭐라고 먹자. 출출하네.”
“응!”
*
하얀 고래 전원 편안히 휴식할 때.
나는 크리스를 구석으로 살짝 불러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지난번에 아공간에 넣었던 것을 꺼내 보라고 말했다.
크리스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손에 연두색 액체가 감도는 물약을 든 채.
미로의 끝에서 자넷과 함께 발견한 비약.
‘생명의 씨앗’이다.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이름: 생명의 씨앗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노화) 억제
상세:
(불로의 비약)에 대한 연구 중.
(장수종)인 엘프에게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된 비약입니다.
목적으로 하던 (불로의 비약)의 제작은 실패했습니다.
단순히 실험 도중 파생된 비약이지만, 큰 가치를 지녔다는 건 변함 없습니다.
(노화)를 일부 억제합니다.
하지만 (수명)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서서히 진행되던 (노화)가 늦추어질 뿐,
때가 되면 (노화)가 한 번에 진행됩니다.
마치 엘프처럼.
* 세계관 귀속 아이템입니다. 상점창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제작자 - 트리스 메기스투스
=
이미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을 사용해 검열된 정보는 확인을 마쳤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던 이 비약의 효과.
그 성능은 노화를 늦추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투에 도움이 거의 안 되는, 그냥 미용용품이란 것이지.’
그렇다면 굳이 큰 대가를 지불해 가면서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공들이지 않고 가질 수 있는데 가지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찬영. 이래도 되는 걸까?”
“들킬 리가 없는데 뭘.”
“으음… 그렇긴 해도…”
“괜찮아. 평소에 너 나랑 나이 차는 거 신경 많이 썼잖아? 먼저 할머니가 되기는 죽어도 싫다면서.”
“윽…”
크리스가 내 눈을 살짝 피했다.
그녀는 마나 각성을 끝마친 초인이기에 노화가 느리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인 나 역시 초인이다.
그런 만큼 같은 속도로 늙어가리라.
그것이 크리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다.
그녀의 앞에서 말하면 삐지지만, 우선 크리스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물론 난 몇 살 차이 정도야 의미 없는 수준이라 여기지만, 여자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지난번에 장난삼아 ‘누나’라고 불렀더니 엄청 꼬집힌 것이 기억난다.
안젤리도 그렇고 크리스도 그렇고…
나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해하는 것 같다.
연인인 나의 앞에서는 특히나.
‘내가 먹어도 별 의미 없고, 세계관 귀속 아이템이라 다른 차원으로 가져가지도 못하는데… 그냥 크리스한테 주는 게 좋겠지.’
비록 내 물건은 아니지만, 크리스에게 꽤 괜찮은 선물이 될 것이다.
입으로는 망설이는 말을 한 크리스도 비약의 효과를 듣고는 상당히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괜찮아. 먹어도 돼. 들키면 내가 전부 책임질게.”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결국 크리스는 내 재촉에 못 이겨 비약을 목 뒤로 넘겼다.
그녀의 상태창을 살폈더니, ‘생명의 씨앗’의 효과가 정상적으로 활성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크리스는 거의 늙지 않으리라.
“…뭐,뭔가 이상한 맛. 으으… 브로콜리나 시금치즙을 짜 넣은 것 같아.”
“수고했어. 병은 내게 주고.”
텅 비어버린 비약의 병.
나중에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자넷이 이 빈 병을 보면 노발대발하겠으나…
전혀 상관없다.
- 쪼륵.
나는 지구에서 가져온 연둣빛을 띄는 이온 음료를 빈 병에 따라 넣었다.
그리고 식용 색소까지 타준 뒤, 살짝 흔들어 섞었다.
금세 원래 들어있던 비약과 비슷한 색의 액체가 완성되었다.
“어때, 비슷해 보여?”
“약간 다른 색이긴 한데…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둠에 영향을 받으니 안 들킬 것 같아.”
그 말대로 자넷을 비롯한 하얀 고래 단원들은 암시 능력이 없다.
그리 밝지 않은 랜턴과 횃불의 빛에 의지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색이 좀 달라진 것으론 절대 내용물을 바꿔치기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리라.
‘첫 만남에 자넷이 그랬지? 용병은 절대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들키지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 배운 것을 써먹도록 하자.
나는 가르침 받은 이론을 실전에도 적용할 줄 아는 훌륭한 학생이다.
크리스는 받아든 병을 아공간에 도로 넣었다.
이 비약은 연금술사에게 감정을 맡길 예정이라 했나?
원작과 달리 연금술사가 이 액체의 정체를 밝혀낼 수도 있다.
이 안에 든 것은 그냥 이온 음료와 색소일 뿐이니.
‘밝혀낸다 한들 전혀 의미 없겠지만.’
어찌어찌 우리를 의심할 수도 있으나,
이 지하 유적에서 비약과 똑 닮은 초록색 액체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절대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눈 씻고 찾아봐도 증거는 없다.
“이제 나이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마. 구겨진 미간보다는 펴진 미간이 더 보기 좋아.”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 꾸욱. 꾹.
크리스의 눈썹 사이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며 말했다.
내 손길에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네.
*
과거와 달리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
나를 노리고 있는 용사.
안젤리는 단순히 한 합을 견딜 수준까지면 된다고 하지만…
놈이 가진 무력을 넘어서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 휙!
다리의 부목은 여전히 풀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발자국’ 스킬에 더해, 밑창을 천으로 감쌌기 때문이다.
‘왼쪽. 없고… 오른쪽이나 천장에도 없네.’
찾고 있는 목표는 하나다.
유적의 비밀 실험실로 가는 문양.
총 3개의 실험실이 있고, 그중 2개는 내가 발견했다.
즉…
아직 내가 강해질 수 있는 기연은 한 가지 남아있다.
비록 생명의 정수는 고작 노화를 막아주는 것이 끝인, 그닥 좋지는 않은 효과였지만…
내 기대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애초에 자넷과 함께 발견한 실험실에 있던 것은 전부 눈속임용이다.
발견한 자료, 보물, 비약 모두 다.
눈에 띄게 바닥에 수 놓인 마법 함정과 마찬가지로,
비밀 실험실로부터 침입자의 눈을 돌리기 위해 유적의 주인이 만들어 둔 안배인 것이다.
실제로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들은 전부 비밀 실험실에 있었다.
용사에게 더이상 없을 정도로 유용하게 써먹은 불로의 비약.
내게 비장의 한 수를 만들어 준 진조의 혈정.
어떻게 나머지 한 곳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있을까?
“……”
하지만 넓고 방대한 미로는 비밀 실험실을 발견하는 걸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고작 3일이 지났을 뿐이다.
아직 왕실에서 사람이 찾아오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그렇게 오늘은 수색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허나 이런 느긋한 상황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조금 달라졌다.
“…네? 벌써 왔다고요?”
“아직 온다는 건 아니고, 곧 올 거야. 하인들이 미리 수십 명 와서 소란을 부리는 걸 보면 짐작하겠지만… 아주 높으신 분이 온다더라.”
자넷이 주먹을 쥔 채 엄지로 자신의 뒷부분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여러 하인들이 베이스캠프와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의 천막을 건설하고 있었다.
바닥에 카펫까지 까는 것이, 주둔지라도 건설할 모양이다.
하루 이틀 지낼 임시 거처치고는 너무 과했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온다는 것이겠지.
“누가 오길래 저리 소란을 부리는 겁니까?”
“2 왕자. 무려 2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 먼지투성이 유적에 직접 발품을 판다네.”
한참 뒤에야 와야 할 담당자가 곧 올 거라고 했을 때 직감했지만,
원작과 틀어진 것이 확실했다.
원작에는 왕자가 아닌 적당한 고위 귀족이 방문했으니까.
원작과 틀어진 이유.
아마 원인이 된다고 한다면…
유적에서 아무런 재화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겠지.
그들이 하고 있는 생각은 뻔했다.
‘용병들이 보물을 빼돌린 건 아닌가 하는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려나?’
그렇기에 원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유적에 내려온 건 납득이 가능하다.
하지만 왕자가 직접 오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하다.
단순한 귀족도 아니고 왕족이라니…
가진 무게감이 다르다.
“왕자가 직접 온다라… 그건 좀 신기하네요.”
“너도 알지? 그 가면 쓴 천사.”
모른다.
하지만 아는 척을 해야겠지.
아무리 외딴 수도원에 처박혀 지냈다고 한들, 왕국의 왕자까지 모르는 건 이상하게 여겨질 테니까.
“그리 많이는 모르고, 딱 남들만큼만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겠지. 근데 뭘 그리 놀라? 다 썩어 빠진 왕국에 남은 유일한 양심이라고 불리는 만큼… 직접 궂은 일에 손대는 건 크게 이상치 않잖아?”
“전 2 왕자님을 알현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아. 수도원. 그렇겠네.”
자넷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아무래도 2 왕자라는 인물은 가끔 얼굴을 비출 정도로 활동적인가보다.
별명이 가면을 쓴 천사라길래,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위선에 가득 찬 인물을 상상했으나…
말을 들어보면 다른 것 같다.
항상 왕국을 비판하던 자넷이 ‘유일한 양심’이라고 칭한 인물이니까.
“뭐… 항상 왕국민을 위하고, 계승권이 사실상 없는 불쌍하신 분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적이야.”
“그렇겠지요. 그들의 목표는 용병의 몸을 수색하는 것이니.”
“좋아. 잘 알아들었네.”
2 왕자는 국민을 위한 행동을 하지만, 계승권은 없다.
나는 이 정보를 머릿속에 넣었다.
혹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때. 잘 숨길 수 있겠어? 네 연인의 아티팩트. 아,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까지 데려오진 않을 거야.”
마법사의 몸값은 너무나 높다.
용병 수백의 몸에 하나하나 아티팩트를 검출해 내는 마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하긴…
나도 같은 용병이지만, 어지간한 남자 용병들은 노숙자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극소수를 제외한 전부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말투는 천박함이 묻어 나온다.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까이하기 싫은 것이 정상이다.
2 왕자라는 사람이 이상할 뿐이지.
“그렇다면 그리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음… 그 ‘아티팩트가’ 보석이나 펜던트 같은 눈에 띄는 놈이면 위험할 것 같아서. 너 같아도 몸수색할 때 눈여겨 볼 거잖아?”
“목걸이나 반지처럼 눈에 띄는 물건은 아닙니다.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들킬 확률은 없다.
크리스가 가진 건 아티팩트가 아닌 보이지 않는 스킬이니까.
“그래? 믿어도 되는 거지? 그거 들키면 난 꼬리 자를 거다?”
“…그걸 제 얼굴에다 대고 말하면 꽤 불쾌한데요.”
“겉으론 감싸줄 것처럼 이야기하다, 나중에 뒤통수치는 역겨운 짓보다야 낫잖아. 같이 죽어줄 거라고 말하면 100% 거짓말이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긴 하다.
그렇기에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무려 왕족을 상대로 한낱 용병 단장이 나를 커버 쳐줄 수는 없을 테니까.
허나 가해자가 당당히 손절을 친다 말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
마음 한쪽이 찜찜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과거와 달리 내 행동 동기에 감정이 포함된 만큼,
앞으로 자넷이 엮인 선택을 해야할 때 꽤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대화였다.
“으음…”
“자,잠깐!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어차피 저 보물 중 많은 몫이 너네 두 명 거라고! 이 위험수당까지 포함 된 계산이니까!”
내 좁혀진 미간을 본 자넷이 황급하게 말했다.
눈치가 없어 가끔 안 해도 될 말을 할 뿐이지,
나를 꽤 중요하게 여기고 있긴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포션까지 줘가며 나를 묶을 이유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 감이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단 말이야! 이럴 때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어, 믿어줘!”
“…”
“화,화났냐? 많이?…”
“…후… 단장님은 그, 말하기 전에 한 번 생각을 하실 필요가 있으실 것 같네요. 굳이 말로 안 해도 서로 알고 있는 내용인데, 이래서야 긁어 부스럼 아닙니까?”
“으윽… 미안…”
나는 한심한 눈으로 고개 숙인 자넷을 봤다.
어차피 한동안은 함께 해야 할 것.
그냥 ‘생명의 씨앗’을 빼돌린 마음의 빚을 지우는 것으로 용서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