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지구
“그러니까 찬영은 더이상 이쪽에 신경을 기울이면 안 돼. 우리가 알아서 할게. 믿고 기다려줘.”
안젤리는 내게 그리 말했다.
꽤나 간절해 보이는 얼굴로.
“용사란 남자가 그리 위험해? 가진 무력을 제외하고, 그 성향이.”
“악한 건 절대 아닌데, 선한 것도 아니라서…”
“아, 혹시 나처럼 상태창을 가지고 있으려나?”
“아니. 상태창은 없어. 그 인간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검술 재능이 뛰어났거든. 지구에서는 그 재능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용사는 천계에서 선택받아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
당연하지만, 지구에서 손을 꼽을 정도로 전투에 대한 재능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거기다 더해 신탁에 의한 전 인류의 지원.
용사가 승승장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영생까지 얻었다고 했지? 세상을 구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만큼, 강함이 짐작이 안 가네.’
얼마나 약하든 시스템을 얻은 지 일 년이 아직 안된 내가 적대하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난 아직 납득 못 하겠어. 왜 지금까지 내게 이 사실을 숨긴 거야? 오히려 내게 빨리 말해주고 협조를 구하면 되잖아.”
“그,그건…”
“정말로 내가 겁먹을까 봐 용사가 날 노린단 사실을 숨긴 거야?”
“…”
“아니지?”
“사실 말하면 안 되는 거긴 한데… 으… 진짜 말하면 안 되는데!!… 으아! 내가 이럴까 봐 숨긴 거야아! 찬영은 결국 자초지종을 들어야 납득할 거잖아!!”
안젤리가 울먹이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말하기 무척 곤란하더라도, 결국은 말해주겠다는 뜻이다.
“말해줘서 고마워.”
“…적어도, 제발 이 사실을 알고 있단 티를 내지 말아줘. 진짜 큰일 나서 그래. 내가!”
아무래도 단순히 혼나는 수준이 아닌가 보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알겠어. 최대한 비밀로 할게.”
“…용사는 세계를 구한만큼,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을 많이 갖추고 있어.”
“그렇겠지.”
“용사의 능력. 그 능력 중 하나가… 너무나 까다롭거든. 나 같은 천사는 괜찮지만, 찬영은 저항할 수 없어.”
“능력? 도대체 무슨?”
“…한번 ‘인식’한 상대의 모습을 마음 내킬 때 구경할 수 있어. 평생.”
“허…”
“저주도 아니라 인식을 풀지도 못해. 천리안의 강화 된 버전이야. 이름 짓자면 차원안이 되려나?”
“…그 ‘인색’의 조건은? 얼굴을 마주 보는 것?”
“차원을 벽에 둔 채 마법으로 대화를 나누어도 인식이 돼.”
뭐 그런 개사기 스킬이 다 있지?
상대와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고 대화한 것만으로,
생긴 모습은 물론 먹고 자고 연인과 뒹구는 것까지 모조리 구경할 수 있다고?
심지어 차원까지 뚫고 감시가 가능하단다.
아무리 전투 관련된 능력이 아니라고 한들…
지나치게 강력한 능력이다.
“만약 찬영이 이쪽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가… 혹시, 정말 혹시라도 실수해서 용사에게 인식이 되는 순간…”
“내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놈이 감시할 수 있다는 건가.”
“맞아. 그럼 돌이킬 수 없어. 찬영이 다른 차원… 즉, 소설 속 세계에 가더라도 눈을 피하지 못해. 용사를 상대하기 위해 무슨 수를 준비하든, 그걸 다 들키는 거야.”
이리 들으니 정말 위험하긴 하다.
아기천사가 하고 있는 일에 나도 참견하기가 망설여질 만큼이나.
안젤리의 말대로였다.
전말을 들어도, 내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음…
누군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달라진 것이 많다고 할지 모른다.
가령 용사를 대비하여 좀 더 무력을 키워놓는다든지,
아니면 용사에게 쓸 비장의 수를 찾는다든지…
이런 식의 대비를 하며 좀 더 나은 미래를 걷게 되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용사라는 적이 있단 걸 듣기 전과 듣기 후.
내가 할 행동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난 항상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니까.’
시스템으로 다른 차원에 들어가며 얻게 된 무한에 가까운 시간.
그럼에도 나태해지지 않고 본신의 무력을 쌓는 것에 노력했으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비장의 수를 찾는 것은 항상 하는 일이었고,
순간순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다.
돌아봐도 성실히 살아왔다 자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백하민에게 어느 정도 복수를 한 지금. 이젠 굳이 무력을 쌓을 이유가 없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걸 멈추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하다 못해, 성실에 대한 강박감이 박혀 있으니까.
왕따를 당하던 중학교 때 내 몸을 뜯어고치며 나태를 몸에서 지웠다.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기에, 자연스럽게 나태에 대한 경계를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은 몇 년에 걸쳐 가꾼 나의 몸을 순식간에 망쳐버린 ‘백하민’을 보고 더욱 굳어졌다.
나태에 대한 최악의 결과물을,
그 새끼가 보여줬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사슬로 묶어 편안히 휴식하기를 강요한다면?
분명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리라.
‘으… 소름 돋았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겠지.
난 생산성 없이 오랜 시간을 허비하는 걸 견디지 못한다.
나는 자신의 상태를 중증의 워커 홀릭이라 판단했다.
무력을 쌓으며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닌,
쌓이는 무력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근데… 이게 나쁜 건가? 적어도 나는 주변 사람들을 신경 써주고 있잖아? 휴식이 필요하다 판단될 때는 푹 쉬고.’
별로 고치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결과적으론 내 강박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에 도움이 되고,
부정적인 영향이 전혀 없기에.
“이왕 천기누설해버린 것! 관련된 내용을 다 이야기해 줄게.”
“관련된 이야기? 용사를 말하는 거지?”
“응. 용사는 지금 천계랑 하나 일을 하고 있어. 그래서 천계는 지금 용사의 요구를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
“일이란 것이 꽤 중요한가 보네. 용사가 갑이고, 천계가 을일 정도면.”
“사실… 아직 의심일 뿐이지만, 천계에…”
“천계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아서…?”
“…뭐?”
잠깐, 내가 방금 뭘 들었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배신자가 있다고?
그것도 세계를 조율하는 천계에?…
“어디까지나 의심! 최근 작은 정보가 마계로 흘러가는 조짐이 보여서. 배신자를 찾기 위해서 용사의 능력이 필요하거든.”
“잠깐, 의심이라도 배신자가 있는 건 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거잖아!”
“후후. 괜찮아. 진짜 새어나가면 안 되는 정보는, 고위 천사도 빠지지 않고 금제를 걸고 있거든.”
“…”
“관련 내용을 천사가 아닌 이에게 발설하려면 일정 수 이상 천사장의 동의가 필요해. 우리도 그 정도까지 허술하지는 않다고?”
“…너희가 어지간히 일을 못 해야지. 내 입장에서 천계의 신뢰는 바닥을 친다고. 당장 지금만 해도 배신자 색출을 용사에게 맡겼잖아?”
“그,그래도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동안 정보는 지켜졌다?”
“너희가 유능한 것이 아니라, 악마도 너네만큼 무능한 게 아닐…”
“큼!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은 용사가 중요해.”
용사가 지구로 가려 하는 것을 천계가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능력이 없어 용사의 능력에 기대야 했기 때문에.
‘…한심하네.’
그나마 실낱같이 있던 천계에 대한 믿음마저 사라진다.
용사라고 한들 인간인데, 그에게 휘둘린다고?
도대체 얼마나 무능해야 직성이 풀릴 생각이지?
사실 신의 사자가 아닌, 좀 잘생기고 예쁘게 생긴 비둘기들이 아닐까?
물론 ‘비둘기’는 안젤리 보고 한 말이 아니다.
그녀는 내 연인이니.
“오늘 들은 건 진짜 비밀로 해줘야 해… 나 벌써 첫 번째 죄를 저질렀고, 두 번째는 들킬 예정이란 말이야!… 만약, 방금 천기를 누설한 죄까지 더하면 세,세번째…? 으으…”
첫 번째 죄.
그건 짐작이 안 간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육감이 그리 말해줬다.
‘지금은 기억이 지워진, 내가 천계에 올라간 이유와 관련이 있나?’
두 번째 죄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지구에 오려는 용사를 억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이건 언젠가는 들킬 수밖에 없다.
평생 용사를 묶어둘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안전할 정도까지 강해졌다는 판단이 들면 더이상 용사의 차원 이동을 막지 않겠지.
그 순간이 안젤리의 죄가 들키는 순간이다.
세 번째 죄가 오늘 내게 한 천기누설.
언행을 들어보니 죄가 세 번 쌓이면 무언가 큰 불이익이 있나 보다.
어째서 내게 큰 말을 하지 않으려 했는지 납득이 갔다.
죗값이 어마어마하리라 예상되는,
세 번째 죄를 지을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겠지.
“좋아. 찬영, 그럼 이걸로 어느 정도 의문은 풀렸지?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선배니임!! 큰일 났어요! 지금 급하게… 으악? 차,찬영님?”
허공에 아기천사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몇 달만인가?
“안녕? 오랜만에 본다? 그런데 나올 때 노래 틀기로 하지 않았어? 왜 약속을 어기니? 마음 아프게.”
“윽, 그, 오,랜만 이네요오?! 와! 반가워요! 노래를 안 튼 건 평소 이 시간은 찬영님이 주황 머리 여자랑 뒹굴고 있을 시간이라… 선배님과 있으리라 예상을 못 했어요!”
“…그,그래? 콜록!”
“걱정 마세요! 두 번 실수는 없습니다! 전 그럼 이만 인터넷이나 하러 가볼게요… 하하.”
은근슬쩍 사라지려고 한다.
아기천사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런 녀석을 붙잡은 건 안젤리였다.
“저… 후배야? 찬영에게도 이야기했어.”
“네? 설마 ‘그거’ 말씀하시는 거 말인가요?”
“맞아. 그… 용사에 관한 이야기.”
“네에? 그,그,그럼, 설마 세 번째 죄…”
“안 들키면 돼! 안 들키면!”
아기천사의 안색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죄를 세 가지 저지른 안젤리를 걱정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기천사도 안젤리도, 서로가 서로를 엄청 아끼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다고 했으니 당연한가.
“그러니 그냥 이야기해. 급한 일 아니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앗! 용사님이 선배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급하게…”
“…좋아. 네 뒤를 따라 천계로 올라갈게. 먼저 가서 용사 쪽 차원에 통신 마력로 연다고 전해줘. 그 사람 성질이 급하니까…”
둘이 올라가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녀가 부재중인 동안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악마의 습격은 대비해야지.
“잠깐 안젤리. 그럼 나는?”
“우리 둘 다 올라가면 지구의 시간은 멈출 수 있으니까. 내가 부재중인 동안 찬영은 습격받지는 않을 거야.”
“아하. 그럼 상관없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야.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일이 진행되는 것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거대한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것보단 훨씬 좋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먼저 올라가서 이야기를…”
“어어? 후배야? 지금 이거… 나,나만 느껴지니?…”
“…으아악!! 자,잠깐만요! 억지로 차원을 뜯고 있어요!!”
갑자기 안젤리와 아기천사가 작게 패닉 했다.
내 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걸 경고했다.
마치 철로 위에 가만히 앉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는…
끔찍한 위기가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 지직.
허공에 작은 금이 갔다.
어디선가 많이 듣거나 본 것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이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금이 갔으니까.
보통 소설 속에서 이런 서술이 나왔을 때의 상황은 엇비슷했다.
설마,
차원이 갈라지고 있는 건가?
“찬영!! 이거!!”
- 휘익!
안젤리가 내 머리 위에 무언가를 던졌다.
그녀가 내게 던진 것을 손에 쥐려고 했지만, 그 무언가는 내 손을 쳐내고 머리 위에 안착했다.
그와 동시에…
내 존재가 세상에서 감추어졌다.
나는 분명히 이 자리에 존재했지만, 스스로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차원 틈새에 끼인 것만 같은 무척이나 오묘한 기분.
‘이건… 천사의 고리?’
안젤리가 던진 것은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천사의 고리였다.
이 고리가 나를 지켜주었다.
용사의 ‘인식’으로부터.
“후우… 아슬아슬…”
- 아아. 들려?
작게 금이 간 허공.
다시 보니 금이라고 할 수준이 아니라 틈으로 불릴 정까지 구멍이 커져 있었다.
그 틈에는 칼날 하나가 비집고 나왔다.
‘설마 차원을 칼로 갈랐다는 건가?…’
목소리는 칼날 쪽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칼날이 공간의 틈 사이를 완벽히 메꾸고 있다.
확인 가능한 것은 오로지 목소리뿐.
“용사 박시우! 이런 식으로 차원을 가르는 것은 불법입니다!”
- 신체 일부가 넘어간 것도 아니고, 구멍만 낸 거잖아. 그냥 넘어가.
“그냥 넘어가는 것이 가능할 리…!”
- 나도 이렇게까지 하긴 싫었는데, 너네가 말을 씹어대니… 응?
저것이 용사의 목소리?
꽤 젊었다.
이 신체의 아비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 비둘기야. 너 왜 존재가 드러났냐? 매번 꼭꼭 숨기더니.
“제 마음입니다. 그리고 멋대로 말 놓지 말아 주세요.”
- 하하. 까다롭긴. 그나저나 슬슬 내 고향에 갈 수 있게 해주지? 자꾸 이런 식으로 질질 끌어대면 나도 생각이 있는데.
“이야기는 천계에서 하죠.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 또 말 빙빙 돌려대려고? 네 후배한테 시킨 것처럼? 그냥 이대로 하지. 이야기란 거.
“절대 안됩…!”
- 그럼 차원 더 갈라서 완전히 넘어간다? 과연 비둘기는 뒷감당이 가능할까? 난 가능한데. 큭큭.
“…하죠. 이야기.”
안젤리의 일그러진 얼굴은 처음 본다.
나도 덩달아 화가 나네.
내 애인을 비둘기라 부르다 못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다니?
용사에 대한 첫인상은 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