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지구
- 스윽!
나는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어차피 들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들을 예정이었다.
안젤리는 내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다.
만일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 것이겠지.’
천계에는 비밀이 많다.
분명 알게 되면 오히려 위험해지는 정보도 많을 것이다.
안젤리의 반응을 보고 그러리라 예상되는 부분은 캐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가지 짚이는 점이 있다.
아기천사가 나 몰래 무언가를 하는 것까지는 납득이 가지만…
그걸 내가 눈치를 챈 점이 이상하다.
원래대로라면 아기 천사의 부재를 눈치채기 이전에, 부재 자체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가 경험한 천사들은 지구의 시간 축에 자유자재로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소설 밖으로 나오면 소설의 시간이 멈추는 것처럼.
“너희가 천계에 있는 동안은 지구 시간을 멈출 수 있지 않아?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어차피 아기 천사 입장에서 보면 주어진 시간은 무제한이니,
“그건 그런데… 지금은 사정상 좀 힘들어서.”
“응?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런 걸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거 아니야? 지구의 시간을 멈추는 것.”
“…설명이 진짜 많이 복잡해져. 음… 내가 지구에 강림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만 해둘게.”
“아하.”
거기까지만 말해줘도 대충 상황은 예상이 되었다.
지구의 시간을 멈추면 천계 관계자인 안젤리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겠지.
‘표정을 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을 돌리는 것처럼 무언가 자원을 소모해야 가능한 건가?’
일단 복잡한 내용은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진지하게 세계의 복잡한 규칙을 이해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냥 내게 피해가 오지 않을 정도.
딱 겉핥기 수준으로만 알면 충분하다.
“알겠어. 대충 납득할게.”
“아무튼, 당장 지구의 시간을 멈추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거든.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허가를 받지 못한다? 뉘앙스가 좀 걸리네.
“윽… 어차피 말하려고 했지만, 아기천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상부 모르게 하는 일이야. 이건 비밀로 해줘.”
업무를 미뤄둔 채, 절대 허가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니…
이건 걸리는 순간 단순히 사유서로 끝날 안건이 아니다.
못해도 중징계를 받으리라.
그렇게까지 해서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뭐가 있지?
“…비밀로 해달라고해도 내가 너희 이외에 천계 인물을 만나지는 않겠지만… 그게 가능해? 네 상사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어. 내가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신의 사자라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거든.”
“그건 뼈저리게 알고 있지. 내가 본 천계의 실수만 해도 몇 가지인데.”
이리 확신하는 이유는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지만…
머리를 굴려봐도 그 근거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머리를 간질이는 애매한 감각.
나는 금제 당한 기억과 관련이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다.
천사들은 절대 전능하지 않다는 건 지식으로써 알고 있다.
지금은 이것이 중요하다.
“다시 본론으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위쪽에 숨겨야 하는 거야?”
오늘 대화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안젤리가 망설이기 시작한다.
입을 몇 번 떼다가 다시 다물었다.
마치 말이 나오다 막히는 것처럼.
‘말이 나오다 막힌다라… 이건 너무 넘겨짚은 건가?’
눈이 살짝 좁혀졌다.
“…역시 아니야. 괜찮아! 찬영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랑 후배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결국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은 회피였다.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안 되겠는데. 난 들어야겠어.”
“…응?”
“방금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어물쩍 넘어가면 뒤통수를 맞을 것 같은 떡밥이잖아. 안 그래?”
“그건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닐까…?”
“뭘, 나는 소설 세계로 들어가는데.”
몸도 바뀌어 보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며, 천국까지 가봤다.
이미 충분히 영화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티 나기 그지없는 클리셰는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어떻게든 할 테니 믿고 기다리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무언가 터진다는 암시 아닌가?’
캐물으면 들을 수 있는데, 굳이 눈 돌릴 이유가 없다.
“일이 터진 후면 늦잖아. 그냥 내게도 이야기해 줘.”
“미리 안다고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발생 자체를 막는 것이 최선…”
“미리 알아서 대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함께’ 판단해야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안 그래?”
“…”
안젤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되는 추궁에 드디어 포기한 모양이다.
그녀는 망설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게 작은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그럼 조금만 이야기해 줄게. 그냥… 자꾸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침입자가 있어.”
“이쪽… 이라면 문맥상 지구를 말하는 걸 테고. 침입자? 그럼 왜 상사의 지원을 못 받아? 천계가 침입자를 방치해?”
“으으… 차원 이동의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어… 머리 아프게도. 그러니까 천계 입장에서는 방문자고, 우리 입장에서만 침입자인 거지.”
“그리고 그 침입자가 넘어오면 우리에게 좋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넘어온다고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니야! 그런데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이 무시 못 할 정도로 높아서.”
“몇 할 정도?”
“…5할?”
“오. 그건 진짜 미치도록…”
높네.
나도 모르게 닥친 위기에 헛웃음이 나온다.
이걸 지금이라도 알아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 급박하지는 않은 안젤리의 표정을 보니 침입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 편히 믿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그럼 다음 질문은…”
“앗! 이 이상은 안 돼! 정보 제공은 끝!”
“더 듣고 싶은데. 아직 얼마나 위험한 건지도 모르잖아.”
“그건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변수가 극심해서… 그리고 더 말 안 해줄 거야!”
나를 슬쩍 흘겼다.
우물쭈물하는 것이 내가 화낼까 봐 눈치를 보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지금 내게는 다르게 해석이 되었다.
- 끄덕.
“…이해했어. 안젤리.”
“응? 이해했다? 더는 물어보지 않겠다는 뜻이야?”
“괜찮아. 정말 이해했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난 더이상 말 안 할 거야!”
안젤리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그럼 대충 신호는 받은 것 같으니…
나는 입을 다문 그녀를 향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좋아. 목표는 너? 천사? 지구? 아니면 시스템?”
“…”
“이게 전부 아니야? 그럼… 설마 목표는 나라고? 시스템을 제외한, 순수한 나?”
“…?”
“맞네. 그렇다면 침입자는 악마?”
“…차,찬영아?”
“안색을 보니 악마는 아닌 것 같고. 하긴, 악마가 날 노리고 있으면 천계에 숨긴 채 너희가 따로 움직일 이유가 없지. 당연히 지원을 받을 테니.”
“잠깐!”
“응?”
“내 표정을 읽고 유추하는 건 그만하자!”
안젤리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그녀는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지만, 당황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뭐야. 너 발설의 금제 같은 것 걸려서 말을 해주고 싶어도 못 해주는 거 아니었어?”
내 말에 안젤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래도 헛짚은 모양이다.
난 진짜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해야 그쪽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거야?!”
“아니… 아까 말을 해주려다 턱 막히는 것 같길래… 뭔가 물리적인 장벽에 막힌 느낌? 당연히 금제인 줄 알고 네 표정을 읽어서 유추하려고 했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보고 능력 것 표정을 읽어서 정보를 빼내 가라고 눈치 준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아!”
안젤리가 눈을 감고 소리쳤다.
진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정보인가보다.
아니면 들려주기 꺼리거나.
하지만 이미 약간 늦었다.
나는 어느 정도 정보를 얻는 것에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침입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악마가 아니라니… 올림포스나 북유럽 신화 비슷한 다른 차원의 신? 아니면 외계 종족? 설마… 소설 차원에 있던 인물?…’
살짝 소름이 돋았다.
지구는 명백하게 소설 속 차원보다 상위 차원이지만…
차원 이동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하위 차원에서 상위 차원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다.
지구에 속한 내가 상위 차원인 천계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천계로 가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소설의 차원에서 지구로 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아니, 가능하다.
크리스가 있지 않은가?
시스템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녀는 명백하게 소설 속 차원에서 지구로 이동한 인물이다.
중요 한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진 않다는 것이다.
‘즉. 소설 속 인물이 차원 이동을 하려는 걸 수도 있어.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
한 가지 꺼림직한 가설이 떠올랐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어느 정도 상황이 들어맞는다.
침입자가 지구에 왔을 때 내가 5할 이상의 확률로 위험한 이유와,
두 천사가 천계에 도움을 얻지 못하는 이유,
안젤리가 내게 정보를 숨기려고 하는 이유까지도.
- 후룩.
살짝 목이 타올라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단서가 너무 많아서 도리어 추리가 복잡해진다.
아직 무언가를 단언하기는 이르다.
설령 위 가설이 바르다고 해도 내가 당장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길게 보면 대비할 것이 없지는 않다.
“안젤리. 정보를 숨기는 건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으… 나 이제 질문 안 받으려고 했는데…”
“위험한 질문은 대답 안 하면 되잖아.”
“…난 이게 최선이라 판단하고 있어.”
“그럼, 정보를 안다고 해서 내가 위험해지는 건 아니지?”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잘 몰라. 하지만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기에, 그리고 굳이 말해준다고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말을 아끼는 거고.”
- 끄덕.
기억에 금제를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정보는 아니라니?
아무래도 내 가설 중 하나가 맞는 것 같다.
정답을 알아내자, 도리어 긴장이 풀어진다.
그렇다고 위기인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왜 정보를 안 알려주려고 하는지 알 것 같네.”
“응?
“말도 안되게 강한 괴물… 용사가 날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면 패닉 할까 봐?”
“…어?”
“그러니까. 박찬영, 이 몸의 아버지.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를 구한 용사.”
“어어?… 어떻게 알았…”
“킥킥. 쓸데없는 걱정이야. 잊었어? 내가 꽤 겁이 없는 놈인 건 둘째치고, 정신의 재생을 돕는 『자연치유』가 있잖아.”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안젤리.
나는 겁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미소지어 보였다.
크리스도 그렇고 안젤리도 그렇고…
다들 나를 과보호 하려고만 하네.
물론 이번 경우는 보호할만했다.
상대는 도대체 얼마나 강할지 짐작도 안 가는 용사니까.
‘그나저나 날 노리고 있다라… 정확히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건가? 100% 위험한 것이 아닌, 50% 확률로 위험하다 했으니.’
박찬영의 아버지.
그 또한 친아들의 현재 사정을 듣고자 하면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떠올려 보면, 그는 천계 쪽과 상당히 친한 것 같았으니까.
즉,
용사는 나와 ‘백하민’의 몸이 바뀐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거기다 더해 그 새끼의 현재 사회적 시선과, 그렇게 된 이유까지.
‘나를 원인이라 생각하려나?’
물론 난 정당방위라고 주장할 것이다.
실제로도 정당방위 맞다.
또한 놈은 알아서 무너질 새끼였다.
내가 딱히 건들지 않았어도.
‘하지만 내 발언은 하등 의미 없겠지.’
중요한 것은 진실 따위가 아니다.
힘을 가진 용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다.
용사의 눈에는 아들의 잘못도 많이 있으나,
아들이 몰락한 것에는 내게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비출 테니까.
‘…벌써부터 좆같네. 후우…’
정상적인 아비라면 나를 고깝게 여길 것이다.
생판 처음 보는 타인과 자신의 혈육.
그 누가 냉정하게 저울질이 가능할까?
용사란 작자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모르는 만큼, 어쩌면 내가 놓인 상황은 위기라고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말로 잘 타일러 나와 ‘백하민’의 사이를 화해시킬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순수한 미래를 전혀 기대하지 않지만.
동화책에선 미화되고는 하나, 용사란 작자는 수천수만의 생명을 살해해야 얻을 수 있는 칭호다.
평범한 성격을 지녔으리라 생각은 안 든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분명 시스템을 처음 받았을 때 나보고 시간을 돌렸다고 했지?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놈을 조진 횟수는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때는 지구에 올려 하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나를 만나겠다는 거야?”
“…정말 다 알아챘구나. 와…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래서 답은?”
“그때 역시 오려고 했지만, 용사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 성공했거든. 시간을 돌리겠다고 설득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안까지 내놓으면서.”
“재발 방지 대안이라면… 내가 놈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천계와 한 약속?”
“맞아! 찬영에게 희귀한 특성까지 줘가며 거래를 성사시킨 이유는… 아들의 몰락을 막고 싶은 용사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야.”
내가 받은 『자연치유』에는 그러한 뒷배경이 있었나…
어쩐지 죽어도 두 번째 특성을 주려고 하지 않더라.
이제서야 아기천사가 오래전에 말한 ‘아주아주아주 예외적인 상황’이란 의미를 이해했다.
정말 상황이 너무나 예외적이긴 하다.
“하… 그렇게 약속까지 받아 가며 놈의 몰락을 막았는데, 또다시 그 꼬라지가 되어버렸으니 자신이 직접 상황을 보고 싶다?”
“아주 정확해. 게다가 이젠 시간을 돌리지 않으니, 어떻게든 오려고 하는 중이야…”
“시간을 더 안돌린다니, 그건 좀 다행이네. 지금까지의 노력이 리셋 되는 건 전혀 기분 좋지 않아서.”
“천계도 무한정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 이번에 돌린 것이 마지막이라고 보면 돼. 아니, 마지막이야.”
안젤리는 확정하듯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용사와의 거래 중 더이상 시간을 돌리지 않을 것이란 항목이 있었나보다.
내게 특성까지 주며 '백하민'을 챙기는 대신에.
“그나저나… 정말 괜찮아? 용사가 찬영을 노리고 있는 건데?…”
“난 용사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얼마나 강하길래 그리 걱정을 하는 거야?”
“음… 어… 사,상대할 생각은 하지 말자!… 적어도 지금은! 응!”
적어도 안젤리보다는 강하나보다.
골치 아프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