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지구
- 딸랑딸랑.
카페를 나왔지만, 바로 이동을 하지는 못했다.
아직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요? 좀 이르지만 저녁 식사는 어떨까요?”
“네? 방금 배를 채우셨다면서?…”
- 흠칫.
“아하! 하하! 그러네요! 그냥 해본 말이었죠.”
남자의 날카로운 발언에 문혜주가 당황했다.
하지만 굳이 더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모르는 척 넘어갔기 때문이다.
“일단 어디로든 가볼까요?”
“…그,그러죠.”
- 스윽.
문혜주의 보폭에 남자가 발걸음을 맞춘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한 뼘만 더 옆으로 간다면 어깨가 닿을 정도.
누군가 둘을 본다면 친구 이상의 관계라 볼 정도의 거리감이다.
‘좋아! 좋다고!’
이런 현실을 만끽하던 문혜주는…
뒤에서 갑자기 덮치는 양손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 문혜주!! 어딜 도망가!!”
- 타악!
“으아악! 깜짝이야! 어? 어? 서연 언니? 뭐야, 뭔데?”
뒤를 돌아보니 있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보인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문혜주가 빠져나온 카페가 약속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서연이 그녀를 저런 얼굴로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마치 장난에 성공한 어린애… 라기에는 많이 음흉한.
뭔가 보기만 해도 열 받는 표정 아닌가?
“뭐긴 뭐야. 몰카지.”
“몰… 뭐라고?”
“잔말 말고 저쪽 봐봐.”
문혜주는 배서연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나온 카페의 좌석.
투명한 유리창 안쪽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쓴 남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손에는 캠코더 한 개가 들려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 마스크와 모자를 천천히 벗자…
문혜주는 남자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성규 오빠?”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다.
방금까지 그녀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던 잘생긴 남자는 어느새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호감을 보여왔다는 것은 전부 연기였다는 듯이.
“저기… 정말 몰카였나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혜주씨가 이 카페에 올 것, 이미 알고 있었어요…”
- 스윽.
잘생긴 남자가 미안한 얼굴로 사죄를 해왔다.
그런 그가 앞섬을 뒤지더니 꺼내든 것은…
적당한 크기의 녹음기였다.
예전, 영상을 촬영할 때 종종 착용했기에 문혜주도 사용한 적이 여럿 있는.
“아… 진짜… 제발… 으아악…!!”
게다가 남자는 문혜주의 이름을 말했다.
아직 서로 통성명하기 전임에도.
‘어쩐지!! 내게 이런 행운이 있었을 리가 없잖아!’
즉…
이 남자는 저 둘에게 섭외된 것이리라.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찍었어?”
“당연히 전부지! 네 추태는 다 이 카메라 안에 담겼다. 셀카 찍는 척 찬영 씨를 보려던 것도, 서둘러 카페에서 도망치려는 것도! 푸하핫!!”
“…와. 못 참겠다. 죽어!!”
“아악! 야, 잠깐, 나 너보다 언니야! 악! 그만, 때리지 마!”
- 퍽! 퍼억!
제대로 속은 것, 화나 풀려고 했다.
몇대정도 때려도 합법이겠지.
상황이 너무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아니,
사실 웃기기도 했다.
너무 완벽하게 속은 것이 웃겨서.
열받지만 웃겼다.
웃겨서 더 화가 났다.
그런데 문혜주로서는 과하게 화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 퍽! 퍽!
“잠깐, 잠깐! 악! 너도 나 속였잖아!”
“윽…”
“지지난달 기억 안 나? 그때 몰카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열 받았는데!!”
문혜주도 배서연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지독한 것으로.
그때 했던 몰카는 그녀의 멤버 탈퇴를 거짓으로 말한 뒤, 배서연의 반응을 찍은 것이었으니…
‘저,적어도 지금보다 더하면 했지 덜하진 않았네…’
이 모든 것은 문혜주의 업보였다.
직접 당해보니 얼마나 열불이 터지는지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윽… 잠깐, 설마 그럼 오늘 찍은 것도 채널에 업로드돼?”
“당연하지. 너도 그 영상 올렸잖아?”
배서연의 표정을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업로드를 강행할 표정이었다.
두 달 전, 반응이 좋을 것이라며 제발 올리자고 우기던 스스로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끝내 허락을 받아낸 것까지도.
…문혜주로서는 업로드를 막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그럼 적어도 내가 영상 편집을 돕게 해줘!”
그래야 과도하게 쪽팔리는 장면은 지울 수 있다.
가령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라는 발언이라든지.
만약 녹음기를 건네 받은 배서연이 그 발언을 듣게 된다면?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왜, 조작하게? 절대 안 되지. 지난번에 네가 몰카 찍었을 땐 뭐라고 했더라? 저희 채널은 리얼 버라이어티를 지향합니다?”
“언니 제발… 내가 두 손 모으고 부탁할게…”
“참고로 지금 이 대화도 쿠키 영상으로 올라갈 거야.”
“아아아악!!”
사실 이성을 찾은 문혜주는 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발언과 행동은 모두 촬영 중이라고.
당장 저쪽의 최성규만 해도 열심히 카메라로 이쪽을 찍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더욱 화난 척을 했고, 억울한 척을 연기했다.
이왕 추태를 보이는 것이 확정된 것…
개그맨으로서 영상이라도 좀 더 재밌게 뽑자는 마음가짐으로.
“성함이 찬영씨라고 하셨나요? 성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문혜주에요. 그리고 서연 언니랑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
“박찬영입니다. 서연 선배님하고는 작은 동호회 비스름한 곳에서 만났죠.”
“그렇구나! 그럼 여자친구는 있어요? 연기하다가 진짜로 제가 마음에 들었다든지, 혹시 모르잖아요?”
“하하…”
호들갑을 떨며 말했으나, 연기 속에는 진심이 몇 할 정도는 섞여 있었다.
문혜주도 자신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라는 것은 알지만…
한번 찔러 보는 것 정도는 죄가 아니리라.
나름의 기대감을 가지고 박찬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대답은 그의 입에서가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저 얼굴을 봐. 여친 없겠냐? 당연히 있지.”
“…서연 언니! 적어도 여친 없는 사람으로 준비해 주라고! 이후에 희망이라도 가지게!”
어쩐지 울컥해진 문혜주는 그리 대답했다.
*
‘…생각보다 재미는 없네.’
영상 촬영은 예상보다 재미없었다.
그 이유?
입 밖으로는 못내뱉겠지만, 문혜주의 얼굴이 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엔터테이너답게 눈에 띌 정도로 못생기지 않았다.
또한 피부가 엄청 깨끗했기에, 누군가는 호감 상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녀만 보며 눈이 높아진 내게는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생각을 겉에 티를 낼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기에 대화는 평범하게 이루어졌다.
단, 선을 긋는단 느낌을 주도록 문혜주를 향해 격식을 차렸다.
- 힐끗.
나는 멀리서 이쪽 눈치를 보는 고다연에게 눈짓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오란 의미에서.
“…안녕하세요? 찬영씨 여자친구입니다.”
“앗? 여,여친분도 오셨구나. 그… 안녕하세요.”
- 꾸벅.
문혜주와 고다연이 서로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고다연의 옆으로 가 섰다.
누가 봐도 서로를 아끼고 있는 연인으로 보이기 위해.
그제서야 내 여자친구의 기분이 좀 나아진 듯했다.
아까 문혜주와 가까이 붙으며 걸었을 때,
몰래 그녀가 있는 쪽을 봤더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표정이었거든.
‘문혜주도 고다연의 얼굴을 보니 빠르게 포기한 모양이고.’
사전에 허락을 구하고 카페 내부에 미리 설치해 놓은 카메라.
그것들을 회수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된 촬영은 끝이 났다.
지금까지 30분도 흐르지 않았다.
이후에는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지만…
별것 없었다.
뒤풀이 겸, 나 자신을 광고하는 자리였으니까.
적당히 내가 모델을 하고 있다는 얘기와, 내 사진이 대표로 담긴 쇼핑몰을 흘려 이야기했다.
너무 홍보란 느낌은 들지 않게 조절하며, 궁금한 사람은 찾아볼 수 있게끔.
실명은 밝혀도 상관없었기에 거리낌 없이 밝혔다.
“수고했다 찬영아. 오늘 촬영은 업로드까지 2주 안 되게 걸릴 거야.”
“네. 형도 고생 많으셨어요. 숨죽여서 촬영하느라?”
“흐흐. 조심히 들어가.”
작게 인사를 마친 뒤 모임은 해산되었다.
문혜주는 나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다연 앞에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내 계좌에는 10만 원이 추가되었다.
- 터벅.터벅.
“다연씨는 이후에 약속 있으세요?”
“오늘이요? 음, 미루려면 미룰 수 있어요.”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고 들어갈까요? 알바비 받은 기념으로.”
“그렇게 받자마자 막 쓰시면 안 돼요. 아끼셔야지.”
“어차피 이럴 때 쓰려고 번 돈이었는데요 뭘. 이 10만원, 오늘이 아니어도 데이트 비용으로 나갈 돈입니다.”
- 피식.
“진짜 말은 잘해.”
고다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와의 식사는 꽤 즐거웠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가버릴 정도로.
“이제 그만 가볼게요.”
“역시 데려다주는 게…”
“정말 괜찮으니까요! 집에 도착한 뒤 문자 할게요. 누구처럼 잠수타지 않고.”
“이런. 아파라.”
- 킥킥.
하다못해 커피라도 사겠다며 내 손에 들려준 아메리카노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오늘의 촬영 장소를 정할 때, 내 제안으로 인해 그녀의 집 근처로 정했기 때문이다.
고작 도보로 10분 걸리는 곳에서 굳이 데려다줄 필요가 없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다연의 도착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다가, 슬슬 집에 도착했기에 길어졌던 안부 인사를 마무리했다.
- 끼익. 쿵.
“나 왔어.”
집에 도착한 뒤, 나는 신발을 벗으며 집에 크게 울리도록 말했다.
크리스에게 하는 인사는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테라포밍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잠깐 안젤리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에, 그녀와 함께 지구로 귀환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귀가 밝은 크리스를 집 안에 두고 안젤리와 마음 편히 이야기하긴 힘드니까.
“찬영! 어서 와!”
“안젤리.”
금발 벽안을 한 천사가 나를 마중해주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 크리스에게만 마중을 받았지, 그녀에게 인사를 받은 적은 오랜만이다.
나는 약간의 새로움을 느끼며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늘 돌아오면 물어볼 얘기가 있다고 했지?”
“응!
- 털썩.
“아, 나는 아메리카노 있으니까 네 것만 타오면 돼.”
“알겠어!”
내가 거실의 소파에 앉자, 안젤리가 차 한잔을 타왔다.
이제는 향만 맡아도 알아챌 수 있다.
구름나무 차다.
“뭐가 궁금했어?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
“아니, 좀 다른 이야기.”
- 후룩.
카페인의 향이 입안에 감돈다.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본론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겉치레로 서론을 나눌 정도로 나와 안젤리의 사이가 안 좋지는 않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요즘 아기천사 얼굴이 통 보이지 않아서.”
- 움찔!
“인터넷 하고 있다고 했지?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응! 맞아! 하하, 완전 중독자라니까?”
“으음…”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안젤리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
무언가 내게 숨기고 있다.
“좋아. 크리스도 없겠다, 오랜만에 셋이서 밥이나 먹을까? 지금 내가 아기천사 불러올…”
- 탁.
“괜찮아! 후배는 알아서 밥 챙겨 먹는다고 했으니까!”
안젤리에게 잡힌 팔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후배의 방을 향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시선을 받은 안젤리가 다시 한번 몸을 움찔하고 떤다.
“…이미 다 알고 있어. 걔 방문 앞을 지날 때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는커녕 인기척도 없는데, 못 알아채기가 어렵지.”
“엇… 드,들켰다고? 어떻게 그리 청각이 예민한 거야?”
“스킬의 덕이지 뭐. 걔 지금 우리 집 안에 없지?”
“…응…”
망설이던 안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대로 아기천사는 우리 집 안에 없었다.
나를 악마로부터 지켜준다는 직무를 내팽개친 채.
사정은 분명히 존재하리라.
보아하니 안젤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모양인데, 묵인했다.
그 말은 아기천사의 허가 없는 일탈은 아니란 뜻이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가장 걱정되는 것부터.
“우선, 내 안전은 괜찮은 거야? 갑자기 악마가 습격하면? 천사 하나의 전력이 빠진 지금. 나로서는 조금 불안한데.”
“하급 천사는 전투력이 전무해… 지금의 찬영보다 훨씬 약할 정도. 솔직히 후배는 도움이 하나 안될걸?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그러고 보면 발키리가 꿈이라고 했나?”
“맞아. 나 싸움도 엄청 잘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되었다.
그렇다면 전말을 들을 차례다.
원래라면 나의 집 안에 있어야 할 아기천사.
걔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