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78) (178/310)



〈 178화 〉지구

최성규의 해명 덕에 오해는 풀렸다.
어지간하면 풀리지 않을 오해라 생각했지만…
듣고 나니 정말 있을 법한 일이라서 벙쪄 버렸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데, 다연이 너는 관심 없지? 우리 채널에 출연하는 거.”

“네… 언니네 채널 조회  엄청 나오잖아요? 제 지인들이 볼 가능성이 너무 높아서, 좀 부담돼요.”


고다연은 꽤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영상 한 편에 출현한다고 학교 선후배나 친구에게 알려진다니…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자의식 과잉이지만,
그녀가 하면 다르다.
알고 지내는 사람만 백 단위인 그녀로선 무시하기 힘든 가능성인 것이다.
특히 최성규와 배서연 채널의 구독자는 20대 초반 연령대가 주 축이 되기에 더더욱.

“그래? 어쩔 수 없지… 강요는 할  없으니까. 그럼 찬영씨는 어때요? 관심 있어?”

“음… 저도 은근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솔직히 재밌을 것 같긴 한데,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이 있네요.”


“응? 뭐가? 돈? 시간? 괜찮아! 과하지 않은 정도면 우리 쪽에서 다 맞춰줄 자신 있…”


“하하. 아니요. 다릅니다. 좀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까요?…”

나는 살짝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본적인 문제라는 단어에 최성규와 배서연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한다.
짐작 가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 편하게 말해 봐! 한번 들어볼게.”

“그… 말씀하신 기획대로 영상을 찍으려면, 연기자에게 이성적인 매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다연씨면 몰라도 제가 그 정도로 인기가 있는 얼굴은 아니어서…”

“…뭐?”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여자한테 고백을 받은 적도 한 손에 꼽고, 그렇다고 과거에 연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못생긴 정도는 아니란 걸 아는데, 선배들이 찾고 계신… 존잘남?…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말하면서도 헛소리라 느껴진다.
하지만 내 연기는 완벽했다.
여기 있는 모두는  말이 진심이라 받아들인 모양이다.
고다연조차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라는 얼굴을 했으니.


“야이… 씹…”

뒤에  있던 최성규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나에 대한 적의가 아니라, 그냥 순전히 억울함에서 나오는 욕설이다.
손에 보석을 쥐고 다니면서도 그걸 보석이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봤으니 당연한가?


“하아… 다연아. 네 남친 이런다. 어떻게 생각하니?”

“대답은… 큼! 미루고 싶네요. 그보다 저도 그렇게 인기 많은 건 아니라 생각 하는데…”

“아오. 커플들이 쌍으로 진짜!!”

- 터억.

배서연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두 눈을 덮었다.
많이 어지러운 답변이었나보다.

‘나는 100% 거짓말인 가식이지만, 고다연은 진짜로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  텐데? 피곤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건 아니라고.’

당연하다.
실제로 고다연에게 고백을 하거나, 번호를 따려 하는 남자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예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대쉬 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위에서 빛나고 있는 여성에겐 다가서기 쉽지 않으니까.
고백해도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거라고 치부해버리고, 마음속에만 연심을 담아두는 것이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친구의 관계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네요. 선배님은 어쩌실 건가요? 방금의 제안은 유효한가요?”


“할  겁나게 많지만,  아프게 말한다고 알아들을 정도의 수준이면 애초에 저런 말은 안 했겠지. 우린 네가 적합자라고 생각했어. 반박은 안 받을 거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해.”

“뭐… 그러시다면야…”

“그래서. 할래? 말래?”

“출연료도 있나요?”

“당연히 있지. 시급으로만 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셀 거야. 대신 촬영은 엄청 금방 끝나지만.”


조건을 간단하게 들었다.
생각보다 소모되는 시간이 무척이나 적었다.
 부담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애초에 편집을 완료하면 2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영상이다.
촬영이 길어질 리 없다.
본편을 찍는 것에 길어봐야 30분…
 이후 짧은 인터뷰 몇 분?
그것이 스케줄의 끝이었다.


별문제 없으면 1시간이 약간 안 될 정도.
아무리 질질 끌려도 2시간이면 끝날 것이다.
그렇게 받게 되는 금액은 무려 10만 원이다.
시급이 5만 원에서 10만  사이면…


‘하루 용돈치고는 할만한데?’


금전을 목적으로 제안을 수락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돈이 있으면 나쁜 것 없다.

내가 제안에 대해 수락으로 기우는 이유는 돈을 제외하고 따로 있다.
 얼굴을 좀 더 알리기 위해서다.


얼굴이 팔리면 팔릴수록 좋다.
인터넷 방송이나 너튜브를 할 건 전혀 아니지만,
적어도 아마추어 모델로서의 인지도는 쌓을  있겠지.
그 말은 곧 몸값이 오른단 뜻이다.


음…
솔직히 말하면,
그 몰카라는 것이 재밌어 보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구미가 당기네요. 잠깐 나오는 것으로 10만 원이라니…”

“오오! 뭐야,


“그런데 제 마음대로는 안될 것 같아요.”


“응? 무슨 소리?”


“전 이제 연인이 있으니까요.”

나는 옆에 선 고다연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약간의 불만을 숨긴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을 쳐다보는 내 눈길에 살짝 놀란 모양이다.

“저요?…”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일단은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잖아요?”

“…”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저는 조금 아플 것 같아서.”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하니 고다연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 준 것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굳이 고다연의 심기를 상하게 하면서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용돈 정도야 없어도 그만이니까.

“다연아! 내가 부탁할게! 제발 허락해 줘!… 절대 이상한 일은 안 날 거야! 애초에, 걔 너보다 훨씬 못생겼어!”

“그분이 예쁘다고 한들 이상한 일은  벌어질 겁니다. 지금 저랑 다연씨는 연애 극초기, 가장 뜨거울 때…”
“차,찬영씨! 그런 말은 둘이 있을… 앗?”

탁. 스윽.

나는 내 팔뚝을 꼬집으려는 고다연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쥐었다.
지난 데이트 때처럼 손을 잡은 뒤, 최성규와 배서연의 앞에서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아무튼, 전 지금 콩깍지 단단히 썼으니 만의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흣…”

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고다연을 보고 그리 말했다.


타인 앞에서 하는 스킨십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맞잡은 손을 풀려고 시도했다.
물론 내가 놔주지 않자 곧 얌전해졌지만.

“…세상에. 당황스러워라. 찬영씨가 이리 남자다웠나?… 다연이 좋아 죽는  좀 봐.”
“저,저 좋아 죽지 않았는…”

“오빠! 오빠도 가끔 저런 것 좀 해. 으으… 나까지  설레네 진짜.”

“뭐, 어떻게. 손잡자고? 자.”

“됐다. 저리 치워. 오빠한테 그런 걸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 탁!

“악! 왜 때려!”

고다연의 새된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의 불안은 덮어 주었으니,
이제 손을 놓기로 했다.
 더 이러고 있으면 저쪽에서 우릴 보고 있는 다른 단원들이 사진을 찍기 시작할 것 같고.

- 스윽.

“놀랐어요? 다연씨.”

“그럼 놀라죠…! 안 놀라겠어요?”

“너무 놀랐으면 앞으로 안 할게요. 이런 식으로 기습하는 것. …하지 말까요?”


“…”


“하더라도 둘만 있을 때 할게요.”


“…그,그렇다면 가끔은 괜찮… 큼! 그보다! 찬영씨는 어때요? 하고 싶어요?”


“네? 방금처럼 손잡는 거요? 그야 당연히 하고 싶…”

“앗! 아니! 언니가 제안한 코미디 영상 촬영 말하는 거예요! 그걸 하고 싶은지!”


주어가 생략되었기에 문맥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나는 잠깐을 고민했다.
이 질문에 굳이 거짓말로 답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저도 가끔가다 이런 코미디 몰카를 본 적이 있어 흥미가 이는 정도일 뿐이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런 건 없어요. 다연씨 편한 대로.”


“…좋아요. 우선  의견을 들어보려 했으니 합격. 대신,”


“대신?”


“저도 구경할래요. 그 몰카 찍는 거.”


좋네.
나도 차라리 이게 마음 편하다.
오해받을 짓도  할 거지만, 혹시나 오해받아서야 곤란하다.

배서연이 눈을 빛냈다.
고다연의 답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챈 듯하다.

“아하! 하긴, 직접 두 눈으로 감시하면   걱정 되려나?”


“감시가 아니라 구경이에요!”


“아무튼 우리는 상관없어. 남자친구 감시하는  자유지.”

“구경!”

고다연은 끝까지 감시가 아닌 구경이라고 주장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최성규까지도.





*



“으… 역시 이번에 도망치면 안 되겠지?”

문혜주는 저번 아이디어 회의에선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  것 같다.
배서연이 문혜주를  집어서 나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웬일이래? 작업실에서 아이디어 회의를 안 하고.’

그녀가 불린 것은 카페였다.
흔치 않은 야외 회의에 약간 의문을 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약속장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뭐야. 아직 없잖아?”

주변을 둘러봐도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충 아무 음료나 시킨 뒤, 아무 자리에 앉아 자신을 부른 둘에게 문자를 해 위치를 물었다.


- 우웅.


“…차가 밀려서 10분 정도 늦는다고? 아오.”

오히려 잘됐다.
그들이 지각한 것을 빌미로 삼아 간식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양심이 있으면 계산은 그들이 해주겠지.


“저기, 허니 브레드하고 치즈 케이크 한 조각 주세요.”


그렇게 문혜주가 달콤함을 즐기며 SNS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어떤 시선이 하나 느껴졌다.

- 스윽.


‘…어어?’

그녀보다 먼저 카페에 와 있던 남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는 것은, 그가 문혜주를 보고 있었다는 뜻이 되었다.

- 휙.


어쩐지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고 말았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불쾌감이 들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전혀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남자가 너무나도 잘생겼기 때문에.


‘여,연예인? 뭐야?’


연예인들이 신분을 숨길 때 흔히 사용하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도 없는 걸 봐서는 일반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해가 합당할 정도로 살며 본 외모  단연코 한 손가락에 꼽힐 수준이다.
그런 남자가 그녀를 쳐다봤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을 만큼이나.

방금 눈이 마주쳤다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조심스럽게, 티 나지 않게, 카페의 인테리어를 살피는 척하며 다시 고개를 돌려본다.


- 휙!


‘또 마주쳤잖아! 확실해! 나를 보고 있었어!’


오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당황에 고개가 앞으로 돌아갔다.


어째서 그녀를 보고 있을까?
화장도  되었고, 옷도 평범한 외출복이었으며, 등 뒤에 이상한 것이 묻은 것도 없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 만한 이유가 없었다.

‘혹시… 설마? 진짜? 나,나한테 관심이… 있나?… ……에이 아니겠지. 저런 잘생긴 남자가 뭐가 부족하다고 나를.’

 번까지는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휴대폰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돌려, 사진을 찍는 척 방금 그 잘생긴 남자를 봤다.


- 흠칫!

역시나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세 번.
더이상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남자는 문혜주를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궁금했다.
남자가 그녀를 보고 있는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사실, 희망 섞인 이유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그 확률을 높게 치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 있다.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런 남자와 친해질 기회.
원래 남녀 사이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 하지 않은가?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며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나를 보고 있냐고 물어보자.’


하지만 그런 그녀의 다짐은 실패했다.
문혜주가 움직이기 이전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남자가 향한 방향은 명백히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움직임을 핸드폰으로 몰래 훔쳐보면서, 제대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저, 죄송한데… 잠깐 시간 되시나요?”

“네? 저,저요?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그… 제가 원래 이런 성격이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마,말씀 하세요…”


남자가 쑥스러운지 볼을 살짝 긁적였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 반전 있는 순수한 모습에 한번 심장에 타격받은 문혜주는,
저절로 그다음 나올 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고,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니?
그건 보통 헌팅을 할 때 자주 쓰는 말 아닌가?
지금까지 희박하리라 여겼던 상상은 상상이 아니었나?

“크흠! 다름이 아니라… 번호 좀… 주실 수 있으신…가요?”


‘와…’


“아니, 혹시 약속이 없으시면… 오늘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적어도  매력을 어필해줄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이미 엄청나게 어필 받고 있어요…’


“아! 설마 남자친구 있으신가요? 이걸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죄,죄송해요. 저도 좀 긴장했나 봐요.”


- 절레절레…

“휴… 다행이네요…”

문혜주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설마 망상이 진짜라니?
이건 설마 꿈인가?

“저… 역시 안되… 려나요?…”


남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한다.
문혜주는 자신이 대답을 아직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기서 더 대답을 미뤘다가는 이 기적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녀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바꾸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됩니다. 시간, 돼요. 그러니까 어서 카페를 나가죠.”

“네? 카페 밖으로요? 하지만… 시키신 허니 브레드랑 조각 케잌 많이 남았는데요?”

“아! 이건, 그, 저 원래 이렇게 많이 안 먹어요! 진짜! 그냥  먹지 못할 거 한번 시켜본 거죠! 지금 완전 배가 찼어요!”


“…그런가요?”

“그럼요. 저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서…”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지금이라도 이미지 관리를 시도했다.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아이디어 회의?
그런 건 기억에서 지웠다.
일단, 이 카페 밖으로 나가야 했다.
곧 있으면 훼방꾼 두 명이 문혜주를 찾아올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