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77) (177/310)



〈 177화 〉지구

배서연과 최성규.
둘은 A.Light 댄스 크루에 속한 유일한 커플이다.
이 둘은 댄스팀 공식 너튜브 채널의 운영 및 홍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직업과 관련 있다.


“으… 요즘 구독자 수가 통 늘지를 않네. 댓글 반응도 시원찮고…”


“너무 신경 쓰지 마 서연아. 언젠가는 정체기가  거라고 예상했잖아? 게다가 최근 올린 영상은 우려먹기가 좀 심하긴 했어.”

“개그맨들은 항상 아이디어에 대해 압박을 받는다던데, 우리가 그걸 겪을 줄이야…”


이들의 본업은 코미디 너튜버였다.
재치 있는 입담과 아이디어를 무기 삼아, 너튜브 시청자들의 웃음을 이끌어 내는.


둘은 서로를 향한 간단한 몰래카메라 영상을 시작으로 큰 대박을 내었다.
본업 너튜버를 결심할 정도로 수입까지 나왔다.


첫 영상 이후로  년 정도가 흐른 지금.
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말할  있지만…
다른 말로는 더이상의 폭발적인 성장은 볼 수 없단 뜻이다.

“오빠. 뭐 새로운 아이디어 없어? 남들이 생각   신박한 콘텐츠 같은 거!”


“있으면 진작에 얘기했지…”

막힌 벽을 뚫으려면 색다른 아이디어를 찾아야 했다.


으레 창작이란 인풋(input, ‘창작자는 영화·소설·영상 등 많은 경험을 해야 상상력이 증폭된다’는 격언의 은어.)을 쌓는 걸 중시 해야 하는 법.


둘은 언제나 그렇듯 다른 개그 너튜버들의 영상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특정 콘텐츠를 똑같이 따라 하는 건 도의상 못하지만, 적어도 아이디어의 실마리를 잡기엔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었기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영상들.
그중 하나의 영상이 최성규의 눈에 유독 밟혔다.


“미녀 번호 따기 몰카?”

간단하면서도 자극적인 영상이었다.
동료 너튜버에게는 촬영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사전에 협조를 구한 미녀가 번호를 땄을 때의 반응을 담은 영상.
과하지 않은 수준의 합법적인 장난, Prank Video다.

“서연아. 이거 봐봐.”

“응? 몰카? 이거 하자고?”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오늘 아이디어 회의 도망간 애들 속이면.”


영상의 메인 MC는 배서연과 최성규, 두 커플이다.
하지만 댄스 크루에 속하지 않은 너튜브 멤버도 몇  있었다.
코미디 너튜버는 소수가 모여서 하기엔 콘텐츠 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제약이 많았으니까.

“근데 오빠. 미녀는 어디서 구해? 아, 설마 내가 미녀 역할…”


“헛소리하지 말고.”


“야 최성규. 너 지금 헛소리라고 했냐? 내가 미녀가 아니란 뜻?”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걔들이 네가 수상하게 행동하면 몰카인 걸 눈치 못  리가 없단 말이었지. 같이 일한 게 일 년인데.”

- 스윽.

저도 모르게 나온 말실수에 최성규의 등이 땀으로 젖었다.
하지만 수습은 성공한 듯했다.
위로 치솟은 배서연의 눈썹이 다시  자리를 찾았으니까.

“한  넘어가 준다. 두 번은 없어.”

“에이, 서연아. 오해라니까?”


“아무튼 오빠. 그래서 어떻게 하게? 미녀 하면 생각나는  다연이인데… 저번에 제안을 한번 거절당했으니까.”

최성규는 자신의 연인을 살짝 한심한 눈으로 봤다.
입담과 연기에는 재능이 있지만, 입발림으로도 현명하다곤  수 없으리라.

“아직도 모르겠어? 있잖아. 우리 댄스팀 공식 오징어 생성기.”


댄스 영상을 찍을 때 곁에 서고 싶지 않은 사람 원픽.
비교 대상이 되는 순간,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잔혹한 진실을 쑤셔 박는…
박찬영. 그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오빠랑 찬영씨랑 친했지? 서로  동생 하는 사이고.”

“걔랑  친한 사람이 있으려나?… 아무튼 걘 사람이 좋으니까,  이야기해 보면 허락해 줄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아.”


“맞네! 모델도 한다 했으니 얼굴 팔리는 거에 부담도 없을 테고! 섭외 개런티  넉넉히 챙겨주면 될지도?”


“…넉넉히? 왜 불안하냐. 너 사심 섞어서 돈 어처구니없이 주지는 마라?”

“사,사심은 무슨! 내가 뭔 사심이 있다고! 오빠 나 지금 의심해?”


“어. 너 겁나게 얼빠잖아.”

“…큼. 그래서 내가 오빠랑 사귀는 거지.”

- 피식.

“아부는 됐네요.”

말은 그리했지만 최성규의 기분은 단번에 풀렸다.
역시 배서연의 입담은 꽤 강했다.

“그럼 내가 한번 찬영이 걔랑 이야기해 볼게.”

그렇게 섭외 대상은 박찬영으로 정해졌다.
너튜브 채널을 다시 한번 부흥시키기 위한 묘수로.

하지만 둘의 계획은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난관에 부딪혔다.
그날 밤.
댄스 크루의 단톡방에서,  사상 두 번째 커플링의 탄생했기 때문이다.





+



어젯밤은 상당히 피곤했다.
단톡방에 밀려드는 수십 수백 개의 질문 세례.
한창 중간에 상황을 깨달은 부원들의 중복 된 질문만 해도  수 없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1분만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무려 300개의 읽지 않은 톡이 쌓인 걸 보고는 좀 질렸다.


‘…결국 고다연과 동시에 전원을 꺼버렸지만.’


이리 대답만 하다가는 끝도 없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개인 톡으로 고다연과 상의한 결과,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해주기로 한 뒤 잠수해 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고…
평소에는 나와 고다연만 참여하던 월요일의 연습.
놀랍게도 대부분의 부원들이 참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저도 다연씨도 드디어 모솔을 탈출한 거죠.”

“이야, 축하한다. 솔직히 잘 어울리긴 해.”
“내가 전에 말했지? 저 둘 조금 수상하다고. 난 눈치채고 있었다니까? 진짜로?”
“이봐 아저씨. 그런 말을 한 걸 들은 적이 없는데, 거짓말은 좀 티 나지 않게 하자.”
“으으… 역시 어제 오빠랑 언니를 둘만 보내지 말았어야…”


고개를 숙인  수치심을 견뎌내는 고다연을 대신해 내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이런 시선이 익숙해지려면 한 시간은 걸릴  같다.
그때까지는 내가 대신 방패가 되어주어야겠지.

힐끗.

나는 티 나지 않게 다른 부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들은 전체적으로 불만을 가진 이가 없었다.
내가 눈치챈 고다연을 마음에  몇몇 역시 화가 난 눈치는 전혀 없었다.


‘나 정도면 고다연의 연인으로 충분히 합격이란 눈이네.’

다행히 지금까지 착실하게 쌓아 놓은 호감도는 제 역할을 해냈다.


이들에게 나는 흔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동생일 것이다.
제 입으로 내게 고다연을 마음에 두고 있다 말한 것도 아닌데…
내가 몰래 짝사랑하던 여자와 사귄다고 대놓고 질투하면 너무나 추해 보인단  정도는 알고 있나 보다.

용사의 아들내미라 하기 부끄러운 어딘가의 개새끼와는 차원이 다른 그릇이다.


‘너튜브에 얼굴 영상을 올리고, 가끔은 버스킹까지 하는 활동적인 댄스 크루인데…  좁은 사람이 오래 몸담기도 어려우려나?’

이들은 전부 인간관계에 어느 정도 도가  인싸들이다.
남들이 보기에 어떤 행동이 한심하게 비출지는 구분이 가능하리라.


이 이야기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 또한 마찬가지인듯 했다.
예상과 달리, 여자 단원들의 눈에 서린 것은 질투가 아니었다.
체념 아니면 포기였다.

세상에는 잘생긴 여자보다 잘생긴 남자가 압도적으로 적다.
그렇기에 나는 자칫하다간 질투에 눈이 멀어 불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했다.
남녀는 그 처지가 다르니까.
하지만 그녀들은 쉽사리 꼬리를 내렸다.
상대가 그 고다연이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명문대생에, 몸의 라인도 좋아, 성격까지  챙겨 주기 좋아하고 착하니, 어지간하면 엄두를  내겠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못지않은 완벽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우리 둘은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어울렸다.

- 시끌시끌!


춤 연습을 위한 모임이라기보다는 청문회가 어울리는 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괴롭힌 당한 끝에 겨우 질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고다연은 벽에 기대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 털썩.

“시달리느라 수고했어요, 다연씨. 여기 물.”


생수병의 입구를 내 쪽으로 향하게  뒤 내밀었다.
그녀가 편히 받을 수 있게끔.
고다연은 내가 내민 병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스윽.


“…질문은 전부 찬영씨가 대신 받아줬으면서. 그래도 고마워요.”

“아, 참고로 입 대고 마셔도 됩니다. 그  완전히 새것이거든요.”

“네? 갑자기요?”

“다연씨는 간접키스 신경 쓰잖아요? 큭큭.”


“…어후 얄미워!”

- 툭

힘이 한 줌 들어가지 않은 주먹이 내 어깨를 친다.
이렇게 알콩달콩 장난을 치는 우리를 저 멀리서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럿 있었지만,
굳이 그녀에게 알려주지는 않기로 했다.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더 좋은 게 많다.


그러고 보면 물어볼 것이 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댄 뒤, 목소리를 줄였다.


- 소근소근.


“그런데 다연씨… 어제 둘이서 찍은 사진은 프로필로 할 건가요?”


“…아뇨. 이건 그냥 소장용으로 두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남에게 보여주기… 음…”

“부끄러워요?”

…끄덕.

확실히 나 역시 이 사진은 남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홍조를 띤 고다연의 얼굴은 나만 감상하고 싶다.


“게다가 이 사진, 저희 완전 꽉 끌어안고 있으니까요.”


“제대로 말해주세요. ‘다연씨가’ ‘저를’ 끌어안은 거죠.”

“그게 왜 그렇게 되나요…!”


“맞잖아요? 사진을 봐도 그렇게 보이고, 실제로도 그랬고.”

“…”

내 얼굴을 붉히기 위해 끌어안은 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자폭이나 다를 바 없는 공격이었다.
그때 당시의 사실만을 나열했을 뿐인데, 고다연은 큰 타격을 받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하지만 어지러움에 흔들린 것도 잠시.
그녀가 고개를 들고 역공했다.

“…그래서 제가 안기니 기분 나빴어요? 아주 좋아 죽으려 그랬으면서.”


“좋아 죽으려?… 제가?…”

“왜, 아니에요?”


- 째릿.

“음… 맞아요. 솔직히 좋았어요. 포옹을 푸신 게 엄청 아쉬웠을 만큼.”

“…으으윽…!! 아악!”

오히려 속 시원하게 인정을 해버리자 고다연이 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귓등은 물론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여져 있었다.
이런 직구에 가까운 애정표현에 너무나 약한 그녀다.

후우. 후우…


그녀는 열심히 심호흡하며 냉정을 되찾으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가보다.
저리 끙끙대는 것을 보면.


“알겠어요. 제가 졌어요. 졌으니까, 그만.”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고다연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웅얼거렸다.
백기 선언이다.


“큭큭큭. 부채질이라도 해드려요?”


“하기만 해봐. 진짜 물어버릴 거야.”


진심이 가득 들어 있는 경고다.
그것 때문에  웃겨서, 크게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귀여워 죽겠네.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면… 저희의 투샷을 프로필로 쓰기 위한 조건이 생겼네요? 사진  얼굴이 멀쩡할 것.”

나도 그녀도 서로의 홍조가 담긴 사진을 프로필로 쓰긴 싫다.
그러니 저절로 이런 조건이 달릴 수밖에 없다.

- 스윽.

“조건… 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그럼 좋겠죠.”


내 질문에 고다연이 파묻었던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무릎에 한쪽 볼이 눌린 채.


그녀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구도는  심장에 타격을 주었다.
유혹하는 건가?
이대로 고개를 숙여서 입을 맞춰달라고?


- 꿀꺽. 후…


“…그럼 열심히 연습해야겠네요. 몸을 딱 붙여서 사진을 찍어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만큼.”

“연습? 아! 그,그게 목적이었어요? 저랑 계속 붙어 있는 것?”


“포옹까지는 아니잖아요. 단순히 곁에 달라붙은 정도인데.”


“…변태.”

“싫으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돼요. 억지로 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진지함을 담아 말하자 쭈뼛거리며 눈을 피한다.
 제안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새,생각 해 보니 그리 싫지는 않…”

“저기, 한창 연애 중에 난입해서 미안한데… 잠깐 괜찮니 다연아?”

“엇? 서연 언니?”


- 벌떡.

고다연이 끌어안고 있던 무릎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앞에는 누군가가 와 있었다.


‘다가오는 걸 기척으로 알고 있었긴 했지만…’

방금까지 우리의 연애를 가장 흥미 있게 봤던 두 명이다.
배서연과 그녀의 연인인 최성규.
일단 둘 모두 나와 적당히 친했다.


“다연아, 미안한데… 혹시 네 남친 좀 빌려줄  있어?”


“찬영씨요? 어디에 쓰시려고?”

“그…  남친이 내 지인을  꼬셔야 하거든.”

뭐?
내가 누굴 꼬셔야 한다고?
그리고 그걸  연인인 고다연에게 허락을 받고 있고?

나는 배서연이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살짝 의심했다.
사실 ‘살짝’ 의심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많이 의심했다.

이렇게 뜬금없는 말을 들으니 도저히 상황을 유추할 수가 없다.
특수한 사정이 있는 건가?
아니, 도대체 무슨 사정이기에 이런 말도  되는 부탁을?


“…네? 언니의 지인이라면… 여자?…”


“당연하지! 찬영씨가 남자를 꼬실 수는 없…”

딱.

배서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말을 꿀밤을 써서 끊었다.
그녀를 때린 인물은 당연히 최성규였다.

“악! 오빠!  때려!”

“야 이 멍청아! 그리 말하면 둘이 오해하잖아!”

그의 말대로 나와 고다연은 한창 뒤숭숭한 오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게 정말로 오해인지는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