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지구
- 달그락. 달그락.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라더니?”
“그래도 맛있잖아요. 카레. 연애 초기, 둘이서 처음 밥을 먹은 날도 생각나고.”
“킥킥. 저희, 연애 초기를 추억할 정도로 오래 사귀었나요?”
“달라진 건 많죠? 그때의 전 여자의 손 한번 못 잡아 본 애송이였으니까.”
“크흡! 윽, 밥 먹는데 자꾸 웃기지 마세요!”
잘난체를 하는 표정의 나를 본 고다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고개를 돌리는 것에 성공해 식탁 위 음식에 말로 못 할 참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 스윽. 슥.
“직접 닦아줄 걸 그랬나?”
“…여기 밖이에요. 다른 사람 눈도 있다고요.”
샐쭉이며 나를 흘기는 그녀를 생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고다연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하며 웃었다.
“여기 카레도 괜찮나요? 저는 맛있는데.”
우리가 지금 저녁을 먹는 가게.
카레집은 맞으나, 전에 한번 갔었던 곳은 아니다.
그곳은 아무래도 연습실과 가까웠기 때문에.
혹시나 강다예가 카레집에서 나오는 우리를 발견해서야 곤란해진다.
“맛있어요. 사실 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서. 오히려 찬영씨가 음식을 좀 가리지 않나요? 짜거나 기름진 것.”
“기억하시네요? 제 편식 습관.”
“몸에 좋은 식습관도 편식인가요? 후후.”
“어찌 되었든 음식은 가리니까?”
가볍고 일상적인 잡담은 이어졌다.
그렇게 카레를 어느 정도 다 먹어갈 때쯤.
나는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다연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애 사실 공개에 대해서.”
“공개라면, 댄스 크루 내부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네.”
- 달그락…
품위 있는 몸가짐으로 젓가락을 이용해 숟가락에 카레를 담던 그녀가 손을 멈추었다.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민이 되나요?”
“…찬영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가 연애 사실을 공개하면 후폭풍이 있을 수도 있어서요.”
“음… 사실 저도 후폭풍에 대해선 짐작이 갑니다. 눈치가 없진 않아서.”
“네? 차,찬영씨가? 눈치를 챘다고요?”
고다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녀는 나를 연애에 관한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니 당연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요. 대학에서도 그랬고, 크루 내부에서도 다연씨는 인기가 많잖아요.”
“어라? 저요?”
“네? 당연하죠. 다연씨를 노리고 있는 남자부원들 때문 아닌가요? 연애 사실을 공개하면, 저랑 그 남자부원들이랑 마찰이 일어날까 봐.”
“아…”
“…후폭풍은 이걸 말한 것이 아닌가요?… 표정이 왜 그렇게 어색해지셨는지…”
- 피식.
“킥킥. 완전히 정답은 아니지만, 비슷하네요.”
고다연은 정답을 바로 옆에 두고 헛발을 디딘 나를 보곤 유쾌해 했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연애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오늘 오후, 강다예처럼 귀찮은 경우가 사라질 테니.
게다가 알음알음 고다연을 노리고 있는 남자들에게도 선을 그을 수 있다.
내가 기존에 연애 사실을 숨기려 한 이유는…
고다연이 내게 정을 붙이기 전에 이 댄스 크루가 붕괴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정기적으로 만날 기회가 사라지고 말 테니까.
현생이 바쁜 그녀는 내가 부른다고 한들 바쁘다며 약속을 미룰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니 그나마 있던 마음도 떠날 테고,
연락이 점점 뜸해지다가 흔히 있는 장거리 연애의 잠수 이별이 돼버릴 테지.
‘하지만 이젠 상황이 변했어.’
고다연은 지금, 내게 애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
분명 내가 부르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만나려 할 것이다.
나랑 있는 것이 즐거운 듯, 작은 농담만 던져도 쉽사리 웃음을 터뜨렸으니까.
“찬영씨는 어떤 것이 좋아요? 공개? 아니면… 그냥 이대로 숨기기?”
“저는 공개가 좋습니다.”
“…고민도 없이 답을 낸 건 의외네요. 전에는 나서서 비밀로 하자 하셨으면서.”
“전과 달리 다연씨와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거든요. 지금 하고 싶은 건… SNS 프로필 사진을 커플 사진으로 해놓고 싶네요.”
“흐읏!”
고다연은 내가 말한 상황을 상상했는지, 살짝 쑥스러워 했다.
아무래도 프로필 사진 변경은 과도하게 공개적인가 보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얼굴 속에는 명백한 흥미가 존재했다.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기에.
그녀도 연애에 대한 로망이 있을 것이다.
가령 첫 키스는 전망대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면서라던지?
물론 그런 유치한 종류일 리 없겠지만…
주변 커플이 흔하게 하는 프로필 사진 변경은 그녀 또한 완전히 생각 밖의 일은 아닌 듯했다.
“다연씨는 그런 거 없나요? 공개하고선 저랑 하고픈 일.”
“…”
- 달그락. 달그락.
내 질문에 애먼 식기들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속사포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 음… 그러고 보니 제 주변 커플들은 종종 같은 옷을 입기도 했죠. 보통 그걸 커플티라고 하나요? 물론! 연애 중인 것을 팍팍 티 내고 싶은 낯짝 두꺼운 사람이나 할 법한 관종 짓이라 생각하지만… 뭐,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 겪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요동을 친다.
고다연의 손가락에 의해서.
“찬영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역시 커플티 같은 건 촌스럽다고? 사실 저도 그리 생각하긴…”
“커플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재밌을 것 같아요. 음… 다연씨가 싫어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나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미약하게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몸이 풀어진다.
얼굴도 살짝 화색이 감돌았다.
아직까지는 당당하게 내게 연애 관련된 것을 요구하기에는 부끄럽나 보다.
이리 대놓고 돌려 말하는 것을 보면.
“딱히 부정적이라 생각은 안 해요! 그냥,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정확히 중립을 유지하고 있죠. 찬영씨가 하고 싶으시다면 거부할 생각은 없어요.”
“정말요? 양보해 줘서 고마워요. 다연씨.”
“양보라고 할 것도 없는 걸요 뭘…”
- 스윽.
양심이 찔린 고다연이 몸의 자세를 고쳤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쇼핑했을 때 한 벌 맞출 걸 그랬네요.”
“앗! 그으… 저는 커플티 같은 건 좀 천천히, 하더라도 나아중에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하긴, 지금은 좀 이르죠? 아직 저희는 손잡는 것도 익숙지 않으니까.”
“…네.”
제대로 손을 맞잡은 것이 어제다.
그녀에겐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할 텐데, 벌써부터 커플티를 맞춘다니…
이건 어디까지나 미래에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지금 당장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 저희 연애 사실은 공개 하는 건가요?”
“그…럴까요?”
“저는 남자부원들과 싸우지 않고 지낼 자신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친하거든요.”
“알아요. 찬영씨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오히려 그게 문제가 되는 거라고요. 알아요?”
“네?”
- 하아…
“…아니에요. 말해줘도 모를 것 같고.”
고다연은 속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술이 살짝 튀어나온 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법했다.
‘내가 남자랑만 친한 게 아니라, 여자와도 무척 친한 것이 문제가 되는 거겠지. 남자와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고다연과 다르게.’
그렇다고 남자에게만 상냥히 굴기는 싫었다.
다른 여자부원에게 연애 감정은 전혀 없더라도, 남자보다 여자가 좋은 걸 어떻게 하는가?
물론 이대로 여자와 격 없이 지내면 고다연이 속을 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큰 상처를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지구에서 양다리를 걸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약간 불안에 떨 고다연을 위해, 앞으로 평생을 남자랑만 친하게 지내라고?
싫다.
난 내 행동방침을 바꿀 생각이 없다.
어찌 되었든 바람 피운다는 헛소문만 안 나면 되겠지.
“그래요. 하죠. 공개. 저도 찬영씨처럼 인간관계에 자신이 있으니까… 뭐, 잘 되겠죠.”
“약간 이해가 안 되는 말도 좀 있지만, 결국 공개 연애를 한다는 말이죠?”
“네. 그런데… 그렇게 기뻐요? 완전 웃음꽃이네. 푸훗.”
“말했잖아요. 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아! 그러고 보면 저희는 각자의 사진은 가지고 있어도, 둘이서 찍은 사진은 아직 없네요?”
“어라? 그러고 보니…”
- 스윽.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그녀의 옆으로 가 앉았다.
고다연의 어깨와 나의 어깨가 슬며시 맞닿았다.
“차,찬영씨?”
“자. 좀 더 붙어봐요. 핸드폰 렌즈 보시고.”
“네? 네?”
- 킥킥. 저 둘 봐봐. 엄청 귀엽다.
- 둘 다 연예인 같이 생겼길래 유전자 쩌는 남매인 줄 알았는데, 커플인가 보네…
당연하지만 우리 둘은 어딜 가도 시선을 받곤 했다.
일상 속 배경에 녹아들기에 우리는 너무 눈에 띄었다.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 뼘 더 그녀의 곁으로 붙었다.
이제는 사실상 몸의 한 면이 완전히 닿았다고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
핸드폰 화면 속, 고다연의 얼굴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저,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렌즈 보라니까? 나중에 사진 못 나왔다고 후회하기 없어요?”
“…그럼 적어도 빨리 찍죠!…”
내가 사진을 찍기 전까진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걸 눈치챘던 걸까?
고다연이 재빠르게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렌즈를 본 뒤,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고다연은 이렇게 붉어진 스스로의 얼굴을 처음 보려나?’
“찍을게요. 하나, 둘,”
“자,잠깐! 저 심호흡 좀 하고요!”
눈까지 감으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노력한다.
나는 이번에도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 후우! 후우!
5초가 흘렀다.
방금까지만 해도 닿은 어깨를 타고 선명히 전해져 오던 그녀의 심장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놀랍게도 이 짧은 순간 요동치던 감정을 누른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괜찮은가? 저 얼굴 안 이상해요?”
“여전히 귀여워요.”
“윽! 으아아 진짜! 저 다시 한번 심호흡 좀 할게요!”
“푸하핫!”
간신히 가라앉은 얼굴이 다시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차분한가 싶다가도, 말 한마디에 감정이 휙휙 바뀌는 것이 놀리는 맛이 있었다.
“찬영씨! 일부러 그러는 거죠!”
“큭큭. 포기하고 찍는 건 어때요?”
“저만 이상한 얼굴이잖아요! 첫 사진에 저 혼자 이런 건 싫어요!”
“그럼 하루종일 이러고 있을까요? 저는 상관없는데. 붙어 있으니 좋고?”
그녀가 실실 웃으며 말하는 나를 째려본다.
계속 놀려지니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얌전히 얼굴을 붉힌 사진이나 내게 넘겨주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아주 조금 틀어졌다.
“좋아요. 그렇게 나오신다면…”
짧은 고민을 하던 고다연.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 듯이 숨을 삼켰다.
- 포옥!
“이,이러면 찬영씨도 멀쩡하지는 못하겠죠?”
“엇?”
고다연이 양팔을 벌리며 와락 안겼다.
그리고 온몸의 중심을 내게 맡기며 짓궂은 얼굴을 한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바로 옆에서 안긴 거라 피할 겨를이…’
어제저녁처럼 짧고 빠른 포옹이 아닌,
진짜로 몸을 전부 밀착한 제대로 된 포옹.
심지어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부드러운 살덩이 두 개가 내 품을 짓눌렀다.
감각이 예민한 내게는 그 감촉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제대로 당황했다.
하지만 괜찮다.
내게 3초만 주어지면 자연치유가 내 혼란을 수습할 테니.
“아… 차,찬영씨도 얼굴… 붉어졌네요…”
“네? 정말요?”
“에잇.”
- 찰칵.
내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휴대폰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고다연이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내 얼굴은 화면 속에 제대로 박제되었다.
“음… 두,둘다 완전 빨가네요.”
“…다연씨가 조금 더 빨개요.”
“아니요? 절대 아닌데요? 찬영씨가 더…”
- 와…
- 카레가… 왜 이렇게 달지?
- 나도, 나도 연애가 하고 싶어…
“윽!”
- 휘익!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다연이 재빠르게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두 뼘…
아니, 세 뼘 정도 떨어져 앉았다.
시선을 인식한 모양이다.
음…
확실히 방금 우리는 SNS의 프로필을 커플 사진으로 바꾸는 것보다 훨씬 대담한 짓을 하긴 했다.
나조차 살짝 쪽팔릴 정도로.
“다연씨. 카레… 조금 남았는데, 그냥 일어설까요?”
“그러죠. 제가 빠르게 계산할게요.”
고다연은 도망가자는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했다.
그녀의 표정은 억지로 무표정을 가장했지만, 그 얼굴은 사진보다 더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