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지구
- 터벅터벅.
인생 첫 데이트.
사실 진실 된 의미로 첫 데이트는 아니었다.
고다연은 ‘백하민’과 한번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으니까.
그 다시 떠올리기 무척 불쾌한 경험을 데이트로 쳤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게 내 인생의 첫 데이트로 하자.’
솔직히 고다연은 오늘의 데이트에 기대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깨닫고 있지 못했지만,
무의식 속에는 은연중 데이트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히 존재했다.
술에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는 한들…
강간을 당할뻔한 경험은 연애에 대한 모든 것을 소극적이게 만들었다.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남자와 손을 잡을 시도를 하지도 못하고,
그 시도마저 몇 번이나 실패하다가 박찬영에게 들킬 만큼.
‘그런데… 나 오늘 왜 이렇게 실수가 많은 것 같지?’
고다연은 이질감을 느꼈다.
오늘은 평소 컨디션과 많이 달랐다.
말도 저절로 떨렸으며, 표정 관리도 잘 안 되었고, 행동도 감정적이 되었다.
평소라면 박은미에게도 말해주지 않을 속마음도 입 밖으로 나왔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그녀의 평소 행실과 완전히 정반대인 날인 것이다.
분명 오늘이 끝나고 방 침대에 도착하게 된다면…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에 애꿎은 이불에 화풀이하게 되리라.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원인은 데이트에 대한 설렘과 미약한 거부감 때문도 있다.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데이트 자체는 평소의 그녀도 상상했을 법한,
친구들에게 종종 듣곤 하는 꽤 로맨틱한 데이트였다.
하지만 최초의 데이트를 최악으로 덧칠 당해버린 고다연에게는…
작고 사소한 즐거움이 너무나 크게 와 닿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방어의 일환으로 무의식적으로 데이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었는데,
예상한 것보다 훨씬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마음이 어린애처럼 들뜰 수밖에 없었다.
마치 당첨될 거란 기대가 하나도 없었던, 선물 받은 복권의 1등에 당첨이 된 것처럼.
‘으으… 손에 땀 차지는 않겠지?’
- 꼼지락.
“…간지러운데요.”
“앗! 죄송해요.”
데이트에 대한 미약한 트라우마.
바닥을 치닫던 기대감을 반전시킬 정도의 설렘.
게다가 오늘따라 유독 이상한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성찰까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한 고다연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가 야외였음에도 30분을 훌쩍 넘을 정도로 일찍 나오고,
평소 정확하던 발음이 사정없이 떨렸으며,
충동적으로 가슴에 머리를 기댄 것에는 이런 복합적인 이유가 얽혀 원인이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혼란이 가시지 않은 고다연은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365일 중 하루 있곤 하는 이상한 날 정도로 느낄 뿐.
- 터벅터벅.
데이트는 정말 즐거웠다.
단순히 마음이 가는 남성과 다니며 오는 설렘이 끝이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로 즐거웠다.
항상 운동복만 입고 연습실로 오던 박찬영.
그의 색다른 사복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다리는 마네킹에 비견 될 정도로 길고, 운동으로 다져진 등은 넓다.
결정적으로 얼굴이 된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찾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
직원마저 부러운 눈으로 보는 남자가 그녀의 연인이라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을 봤을 때는…
‘사진으로 남겨놓길 잘했지. 진짜!’
원인 모를 혼란에서 오는 용기로 그의 정장 샷을 핸드폰에 남기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제정신을 차린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 행동을 칭찬하게 되는 값진 사진이다.
박찬영의 새로운 모습은 외견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을 겪으며 고다연이 알게 된 연인은 색다른 모습이 많았다.
‘의외로… 장난기도 좀 있는 것 같고?’
- 씨익.
슬쩍 박찬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낀 그가 고다연을 마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장난기 있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 푹!
결국 시선을 피한 것은 늘 그렇듯 고다연이 되었다.
용기가 솟아오르다가도, 어째선지 눈만은 마주치기가 그리 힘들었다.
댄스 크루 모두의 이미지에 박힌 얌전하고 부드러우며, 조용하던 그가 아니었다.
데이트 도중 그녀를 향한 사소한 장난이 꽤 있었다.
‘그때 간접키스로 장난친 게 원래 성격이었구나…’
그러나 낯설지는 않았다.
새로운 면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쁘기까지 했다.
한번 호감이 박혀 들자, 별것 아닌 것도 전부 장점으로 보였다.
남들에게는 칼같이 하던 이미지 관리도 그녀의 앞에선 솔직해지는 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다연씨. 저희 근데… 이렇게 말없이 걷기만 할 건가요?”
“어? 그러고 보니 말이 없었네요?”
“하하. 오늘 좀 만족스러웠나 보네요.”
“…네.”
- 터벅 터벅.
차게 식은 밤공기가 고다연의 폐에 들어왔다가 나온다.
어쩐지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길을 보며 걸으니 혼란도 슬슬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마주 잡은 손에서 오는 온기는 여전히 가슴을 뛰게 했지만.
이 손은 익숙해지나 싶다가도, 그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좀 걱정했거든요. 오늘 데이트 코스는 전부 제가 정했으니까.”
“재밌었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러는 것 같았어요. 옷 고르실 때 저보다 더 적극적이셨으니.”
“…”
- 부스럭.
박찬영이 손에 든 쇼핑백을 슬쩍 보이며 말했다.
쇼핑백 안에는 고다연이 반드시 사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한 옷도 몇 가지 있었다.
어찌나 적극적이었는지,
사지 않을 기세면 그녀의 카드로 결제해 선물까지 할 눈까지 했다.
박찬영은 직원도 살짝 질려 한 그녀의 기세에 옷을 구입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 일로 놀려먹을 생각에 미소 지으며.
‘내,내가 그랬나?…’
정작 고다연은 스스로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단 결론이 나왔다.
“그… 너무 잘 어울리셔서…”
“나중에 오늘 산 옷을 입고 연습실에 올까요?”
박찬영의 제안은 언뜻 들으면 괜찮은 생각이었다.
지금 그가 입은 옷도 그랬지만, 그의 사복은 남다른 감흥을 주었으니까.
가능하다면 가끔 보고 싶은 것이 본심이다.
하지만…
“아뇨! 그것보단, 저랑 있을 때만 입는 게 어떨까요?”
고단연은 거절로 마음이 쏠렸다.
더는 그의 매력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된다.
그래서야 최후의 수단으로 둘의 연애 사실을 밝혀야 할지도 모르니까.
“…아. 그렇네요. 그러기로 하죠.”
어째선지 박찬영은 고다연의 부정을 군말 없이 수용했다.
이건 박찬영 역시 이후의 파장을 예상했기에 나온 즉답이었지만,
그를 연애에 관해서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고다연은 깨닫지 못했다.
그냥 자신의 말을 들어준 것으로 이해했다.
정적은 끝이 나고, 가벼운 잡담이 둘 사이를 오갔다.
그것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는 박찬영이 리드했다.
주제는 대부분이 그녀가 흥미 있을 만한 이야깃거리였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만 하면 다른 주제로 자연스럽게 옮겨주었다.
평소에는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축이었던 고다연으로써는 이조차 새로웠다.
‘남들이 보는 나는 찬영씨처럼 비칠까?’
고다연은 그는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런 대화법은 그녀가 많이 사용하곤 하는 화술이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할 때.
그러나 약간 다른 점도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화술에는…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이 묻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다연씨는 양식도 좋아하시죠?”
“맞아요! 어떻게?…”
“오늘 나이프질 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요. 그리고 인스타에 올리신 맛집 과반수가 양식점이었고.”
호불호가 없는 정해진 화제만을 골라 대화를 이끌어 나가던 고다연과는 달랐다.
조금 더…
‘정성이 있…다?’
단순히 누구나 재미를 느낄만한 내용이 아닌, 그녀만이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콕 집어졌다.
실제로 고다연은 요리가 어렵지 않은 양식은 집에서 해먹기까지 했다.
특히 간단한 스테이크같이 밖에서 사 먹기 비싼 종류는 더더욱.
그는 대부분 사람이 별생각 없이 넘어가는 사소한 것조차 놓치지 않고 잡아내었다.
아니면 상대가 그녀이기에 더욱 신경을 기울인 것일까?
고다연은 알지 못했지만,
이왕이면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 그러면 다연씨는 요리도 하실 줄 알겠네요?”
“양식밖에 할 줄 모르지만요.”
“우연이네요? 저는 반대로 가정식이나 한식밖에 할 줄 모르는데.”
“오늘 처음 찾은 차이점이네요. 저희의.”
“아니죠. 이건 오히려 장점으로 봐야지. 저희 둘이 붙어 있으면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만들 수 있지 않겠나요?”
“그런…건가?”
“그렇죠. 게다가 요리는 기본만 알면 모르는 레시피라도 거들 수 있잖습니까? 제 손, 크게 도움될 겁니다.”
“큭큭. 찬영씨는 엄청나게 긍정적이네요.”
뻔뻔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는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다시 생각해 봐도 억지에 가까운 논리였지만,
부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그의 너스레를 웃는 얼굴로 받아주었다.
무엇보다 고다연도 눈앞의 연인과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보다는, 딱 들어 맞는다는 이야기를 훨씬 좋아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그 새로움은 배척하고 싶은 낯섦이 아니었다.
저절로 마음이 열리게 되는, 그런 따뜻함이 담긴 경험이었다.
상냥하지, 잘생겼지, 여심도 잘 읽지…
심지어 능력도 있고, 비록 지금은 중퇴했지만 그녀의 대학에 합격한 것을 보면 머리까지 좋았다.
이 정도 조건이면 언행에 거만함이 묻어 나올 법한데, 역으로 남을 챙겨 주는 것에 능하다.
도대체 단점을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남자가 지금까지 연애도 못 했을까?
세상 사람들의 눈이 옹이구멍도 아닐 텐데.
‘아. 딱 하나 단점 있구나! 연애에 대해선 눈치가 없다는 것.’
아마 그 스스로도 모르게 다가오는 이성들을 철벽 쳤을 것이다.
마치 댄스 크루의 여자부원들을 대하는 것처럼.
고다연은 새삼스럽게 그를 처음으로 잡아챈 사람이 자신인 것이 큰 행운이라 생각되었다.
이건 분명히 ‘백하민’을 만나 큰 고생을 한 그녀를 위한 세상의 보상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
그런데 진실 된 사정을 알고 나면…
그녀가 박찬영과 만나게 된 것은, ‘백하민’과 얽히며 생긴 인연인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너무나 공교롭게도.
“슬슬 도착했어요. 저기 보이죠? 저기가 저의 집이에요.”
“이런. 그럼 오늘 데이트도 곧 끝나는 건가요?”
- 움찔.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소리.
무의식인지, 마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기에 고다연의 심장이 크게 한번 뛰었다.
설렘 반, 놀람 반으로.
“…네. 바래다줘서 너무 고마워요.”
“벌써 작별 인사 하지 말죠. 아직 도착하려면 몇 분 남았습니다.”
“큭큭… 찬영씨. 그거 알아요?”
“네?”
“찬영씨는 가끔 엄청나게 귀여워요.”
“제가 다연씨에게 드려야 하는 말 아닐까요?”
“정말, 말은 엄청나게 잘해.”
“음… 생각해보니 좀 다르네요.”
“어떤 것이요?”
“다연씨는 가끔 귀여운 게 아니라 항상 귀여우니까?”
“하하하! 으으! 오글거려엇! 킥킥.”
“큭큭큭.”
끝이 보임에 따라 아쉬움도 잠깐.
장난스럽게 말을 해오는 박찬영의 말에 순식간에 유쾌해졌다.
어쩐지 이대로라면 집에 바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직감이지만, 이대로 집 앞에서 한참을 대화할 것 같은 기분.
솔직히 그와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아예 자리라도 잡고 한참을 떠들고 싶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서야 곤란하다.
확률은 너무나 낮겠지만…
그녀의 가족이 집 앞으로 나오거나, 이웃이 그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터벅. 터벅.
“…이제 진짜로 도착했네요. 저… 그만 들어가 볼게요.”
“다연씨.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닌가요?”
“사실… 저도 조금 아쉬워요.”
마지막이니까.
살짝 본심을 보이기로 했다.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운 것은 박찬영뿐만이 아니었다.
고다연 또한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도 역시 안돼요. 여기서 정말 이야기를 시작해 버리면, 저 도중에 그만둘 자신 없으니까.”
“너무 성실하시네요. 다연씨 답게. …좋아요! 들어가는 것. 막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찬영씨도 조심히 들어…”
“대신에.”
- 스윽!
박찬영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를 배려한 약한 힘에 이끌려 박찬영의 품으로 당겨졌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어째선지 몸이 그를 거부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늘 열심히 유혹을 참은 상 한 개만 받아갈게요.”
“아,안되는…”
고다연은 살짝 눈을 감았다.
절반을 불안에 떨고, 절반을 기대 하며.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지만, 드라마에서 많이 봤다.
박은미를 비롯한 친구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랑했다.
새벽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돌려 보았다.
턱을 살짝 들며,
들이쉬고 내쉬던 숨을 잠시 멈춘다.
그가 입술을 맞추기 쉽게끔.
그리고 잠깐을 기다리고 있으면, 남자 쪽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다.
하지만…
박찬영이 그녀에게 하려던 것은 키스가 아니었다.
- 포옥.
“읏?…”
고다연이 눈을 떴을 때는 박찬영의 품 안이었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넓고,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남자의 품.
- 스윽.
포옹은 너무나 짧았다.
만끽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이나.
고다연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대한 혼란에 빠져있을 때,
애정이 담긴 따스한 목소리가 위에서 흘러나왔다.
“이 정도는 괜찮죠?”
“괘,괜…찬…”
기껏 가라앉았던 말의 떨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포옹의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만약 허그가 아닌 키스였다면 분명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으리라.
아니,
포옹만으로 이미 다리의 힘은 점점 풀려가고 있었다.
고다연은 자신의 허벅지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밤이니까.
어둠에 가려져서 스스로의 허벅지를 꼬집는 건 보지 못할 것이다.
절대 보지 못해야 한다.
그런 걸 보이면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테니.
이러한 사고를 마친 고다연은 고통을 주어 풀려가는 다리를 막았다.
- 꼬집.
“푸훗.”
“네,네?”
“아닙니다. 조심히 들어가시라고요. 다연씨, 저도 가볼게요.”
“네…엡. 그, 조심히…”
“다음에 봐요!”
고다연은 가시지 않은 혼란 때문에 박찬영의 웃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그녀에겐 다행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