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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73) (173/310)



〈 173화 〉지구

“으으… 스테이크…요…”

고다연의 얼굴에 약간 수심이 어렸다.
이런 번화가에서 파는 스테이크는 보통 값이 비싸기 마련이니까.
아까부터 커피나 영화 값을 내가 홀로  것에 대해 아무 말  하는 걸 보니,
저녁은 그녀가 살 생각이었나보다.

‘안절부절못하는 저 얼굴을 보니  예상이 맞았나 보네.’


평범한 대학생이 내기에는 2인분의 스테이크 비용은 부담이 될 것이다.
아니,
단순히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어쩔  몰라하는  보니 예산을 초과한 건가?


물론 나는 그녀가 저녁을 사게 두지 않을 것이니 의미 없는 고민이다.

“당연하지만 저녁도 제가 사겠습니다.”


“네?  돼요! 적어도 저녁이라도 제가 사야…”


“오늘 저를 도와주신 보답이에요.”


“그건 이미 영화랑 커피값으로 끝났잖아요!”


아무래도 쉽게 물러설 눈치는 아니었다.
그야 하루종일  푼도 안 쓴 채 얻어먹기에는 적잖이 부담이 갈 것이다.
스테이크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녁만큼은 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저녁은 제가 사는 것이 맞을 것 같네요.”

차분히.
부드럽게.
나는 고다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네? 제 생각은 좀 다른…”


“하하. 들어 보세요. 다연씨는 지금 알바를 하고 있나요?”

“…그… 요즘은 안 하고 있어요.”

학업.
댄스 동아리 부장.
여기저기 생기는 술자리.
거기다 A.Light 크루까지.

안 그래도 바쁜 그녀의 시간표에 일을  시간이 날 리가 없다.
오히려 과거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럼 용돈을 받으시겠네요?”


“그…렇죠?”


“보세요. 저는 제가  돈으로 사드리는 것인데, 다연씨는 그렇지 않으니까. 만약 얻어먹게 된다면… 제가 너무, 다연씨 부모님께 신세를 지는 기분?…”

“…”

“말재주가 없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들으셨죠?”


고다연은 반박을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도저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돈이 떨어진 대학생은 어쩔 수 없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게 되어있다.
그게 과연 고다연이 내게 사주는 것이 될까?
나는 그녀에게 이런 의미가 담긴 질문을 했고,
그 말은 고다연을 망설이게 했다.

‘물론 고다연이 사주는  맞지. 어찌 되었든 돈을 소유한 사람은 그녀니까. 그런데… 그 당사자는 그리 못 느끼겠지.’


결국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은 고다연 그녀다.
자신의 돈이 아니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다연은 나의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다연씨가 나중에 일하게 되어서 수입이 생긴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제가 데이트 비용을 조금  부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그… 으…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수입이 없고 다연씨가 수입이 있다면, 오히려 제가 다연씨에게 얻어먹을 수도 있는 거죠.”


“…”

“그러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백수 되면 다연씨한테 얻어 먹을 거니까.”


연인에게 얻어만 먹고 뻔뻔하게 굴기에는 고다연의 심성이 너무 올곧았다.
그러니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약간의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풀었다.


나의 배려가 닿은 것일까?
한참을 망설이던 고다연의 얼굴이 결국 풀렸다.
포기하는 방향으로.

“찬영씨는… 진짜로… 어른스럽네요.”

“지난번에도 들었지만, 그거 늙었다고 돌려 말하는 거 아니죠?”

“푸훗. 아니에요. 그냥… 힘들 때 기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 투욱.

기댄다는 것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고다연이 내 가슴에 머리를 작게 기대어 왔다.

한 손을 마주 잡은 채로, 포개지듯이.
짐을 내려놓고 손을 어깨에 두르기만 한다면 곧바로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리라.


“팔… 올려서 안아도 되나요?”

“안 돼요. 이대로 가만히 있어요. 안으려고 하면 나 도망칠 거야. 킥킥.”


“…”


짐을 놓으려던 손바닥에 다시 힘을 주었다.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정말로 도망쳐 버릴까 봐 꽉 끌어안지는 못하겠다.

게다가 지금 이 상태로도 꽤나 기분 좋았다.
완전히 내게 기대기는 부끄러운지 머리만 살짝 기대어 온 그녀를 구경하는 것도,
하루종일 돌아다녔음에도 가시지 않은 머리카락의 향기를 몰래 즐기는 것도.


비록 조금 감질맛이 났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쁘지 않았다.

- 속닥속닥.

저 멀리 몇몇 커플들이 우리를 보고 슬며시 웃으며 지나간다.
아무래도 그들의 연애 초기가 떠오른 모양이다.
그 정도로 우리의 모습이 풋풋하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런 타인의 모습을 그녀가  수는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내 가슴 바로 가까이에 향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직까지 머리는 떨어지지 않은 채 내게 기대어져 있었다.

‘슬슬 진짜 저녁이네.’

내려앉은 노을이 슬며시 저물어간다.
주홍빛 하늘을 밀어내고 검은 먹이 덧칠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맞닿은 이마를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서 오감에 대한 스킬 버프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요? 슬슬 밖은 추워질 텐데.”

“…사,사실 저도 떼야 할 타이밍을 몰라서…”

“푸후훗. 큭큭큭…”


“이익!”


- 툭.

내가 웃는 소리에 고다연은 바로 이마를 떼어 몸을 바로 했다.
저 붉게 물든 채 반쯤 삐진 얼굴을 봐라.
진짜 너무 귀엽네.


그녀는 알고 있을까?
방금 스스로가 엄청 위험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내게서 빠르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참지 못하고 키스를 할 뻔했다.


‘최근 절제력과 인내심을 수련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혈귀화를 제어하기 위한 수련은 엉뚱한 방향에서 효과를 보였다.


“오늘 유독 저를 유혹하시는 거 아닌가요?”

“유,유혹 같은 것  했는데…”

“그럼 원래부터 그렇게 매력 있었습니까? …어?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만! 이,이상한 말은 그만하죠!”

내 칭찬 세례를 견디지 못한 고다연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저렇게 감정이 휙휙 바뀌어서야 밥이 목으로 넘어갈까 걱정된다.

“그렇네요.  늦어서야 곤란하고. 슬슬 식사하러 갈까요?”

“앗! 식사 말인데요. 얻어먹는 것까지는 인정 할게요. 그런데…”


“그런데?”


“굳이 스테이크 같은 비싼 밥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좀 가성비가 좋은 거 먹으러 가죠!”


고다연은 내게 당당한 얼굴을 하며 그리 말했다.
표정으로 ‘어때?’하고 물어 오는 것이,
아무래도 스스로의 논리에 무척이나 만족하는 표정이다.


내게 머리를 기대며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저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고다연과 스테이크를 먹어야겠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자꾸 내게 빚을 지려 하지 않는 고다연이 가소로웠다.
어쩐지 반드시 스테이크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크리스와 안젤리, 심지어 멜까지도 내게 종종 말하기에 슬슬 인정했지만…
나는 짓궂은 면이 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저 말을 반박하냐고?
그냥 우기면 된다.

“안됩니다.”

“네? 이건 왜요! 그냥 평범히 냄새  나는 저녁을 먹으면…”

“원래  데이트는 좀 그럴듯하게 하고 싶어서… 말했죠? 저도 첫 연애라고.”


“아…”

“첫 데이트에 여자친구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는 것. 제 로망이니까, 이번만 들어주세요.”

“으윽… 그,그, 으으…”


나는 살짝 슬퍼 보이는 눈을 하며 요구했다.

고다연은  눈을 오래 마주치지 못했다.
슬쩍 피하면서 말을 떠는 것이,
그녀는 내 시무룩한 눈에 약한 것 같았다.
어쩐지  처음 그녀에게 주었던 사진을 아직까지 보는 것 같더라니…


“그,그럼! 다음에는 제가 밥 살게요. 꼭!”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저녁은 소고기로 결정 났다.



*



“자,잘먹었습니다…”


“괜찮았네요. 자영업으로 하는 양식집치고는. 다연씨는 입에 맞으셨나요?”

“맛있었어요! 엄청!”

반주로 와인을 걸쳤지만, 우리  모두 술에 약하지는 않았기에 한잔 정도로는 취하지 않았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맛도 꽤 좋았고, 인테리어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주말이라 사람이 좀 많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없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걸로 배가 차나요? 혹시 저 때문에 덜 먹은 건 아닌지…”

“괜찮아요. 애초에 저녁보다는 아침을 많이 먹는 생활 습관이 몸에 배서.”

“거,건강하게 사시네요.”

흔히 볼  있는 스테이크 일 인분.
고다연 같은 군살 없는 여성이라면 몰라도,
운동을 하는 성인 남성의 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적당히 허기를 때울 정도는 되었다.

‘요즘에는 유독 잘 먹고 있기는 했는데… 난 원래 소식을 하는 스타일이었으니.’

애초에 극한의 다이어트를 겪으며 식욕을 억누르는 것에 익숙해진 육체다.
별 영향이 오지는 않았다.
고다연은 나를 살짝 걱정했지만.

저벅저벅.

아직 영화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우리는 간단한 산책을 하며 소화를 시키기로 했다.

오늘 데이트에 쇼핑을 하며 많이 걸어 다닐 것을 예상했는지,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가벼운 산책은 할  있었다.


스윽.


“다연씨?”


“네?”


“손.”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시 잡고 싶다는 신호였다.

몸을 살짝 흠칫  고다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읏.”


- 스을쩍.

고다연이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을 천천히 하며, 이젠 익숙해진 그녀의 보폭을 맞추었다.

연인이 으레 하곤 하는 깍지끼기는 아니었다.
아직 우리는 가볍게 손을 맞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렘을 얻을  있었다.

- 터벅. 터벅.

쑥스러움에 말이 사라진 고다연.
나 역시 굳이  정적을 해치려 들지 않고 이 공기를 즐겼다.
내려앉은 어둠을 흰색 가로등이 밝히는 가로수길은  운치 있었다.
둘 사이에 말은 없었지만, 전혀 어색함이 감돌지는 않았다.


“…”

밤길에 조용히 걷는 데이트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손을 타고 오는 그녀의 심장 박동이 꽤 크고 강했다.
확실히 분위기 있기는 했다.
여기저기 놓인 벤치에는 수많은 연인이 자리를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으니.


번화가 외각에 흔히 있는 평범한 가로수길에 불과했지만,
지금 그녀에겐 특별한 데이트 명소처럼 느껴지나 보다.


“다연씨. 추워요?”

“네? 아뇨. 괜찮아요!”


“아… 아깝네요.”

“아깝…다? 왜요?”

“춥다고 했으면 안아주려고 했거든요.”

움찔!

“자,자꾸 그렇게 농담 하실거예요?!”


“큭큭큭. 그런데 반응이 너무 좋으셔서… 이거, 중독성 있는데요?”

“…못됐어 아주.”

“미안해요. 나름 자제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그… 음… 네…”

굳이 농담이 아니라고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눈치를 챈 모양이다.
안으려고 했다는 말에 진심이 반쯤 섞여 있다는 것을.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이 생겼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말과는 달리 완전히 거부하지 않을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살짝 놀라기야 하겠지.
하지만 나중에 혼나더라도, 지금 당장은 모르는  받아들일  같다.


‘계속 스킨십을 의식하게 한 보람이 있네.’

어쩌면 오늘의 진도는 손을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입맞춤까지는 못가더라도,
허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다.

“슬슬 영화 보러 가볼까요?”

“앗. 네. 가죠!”

함께 밤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았으나, 슬슬 돌아가야 했다.
기껏 예매한 영화표를 휴지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터벅터벅.

“그런데… 무슨 영화라고 했죠?”


“로맨스 코미디요. 호불호가 거의 갈리지 않은 영화라서, 괜찮을 겁니다.”


“휴… 다행이네요. 저 무서운 건 못 봐서.”

“첫 데이트 영화를 공포 영화로 고르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요?… 일단 전 아닙니다.”

방금 저녁을 먹은 터라 팝콘은 사지 않았다.
그냥 음료수만 들고 가기로 했다.

“이 정도는 제가 살  있으니까요!”

“음… 정말 괜찮은데, 그냥 깔끔하게 오늘은 전부 제가 쏘는 거로 하는 것이…”


“안 돼요오! 저기, 콜라 2개 큰 거로 주세요! 계산은 이 카드로!”

무어라고 하기 전에 고다연은 영화관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자신의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시켰겠지만, 얼마나 급했는지 그냥 콜라로 시켜버렸다.
나는 어쩔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콜라를 받기로 했다.



- 웅성웅성.


영화는 리뷰에 호평이 대부분인 것을 증명하듯 재밌었다.
코믹한 부분도 있고, 후반에는 나름 여운도 남기는…
딱 커플이 와서 보기 좋은 영화였다.


영화관 데이트는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평범했다.
키스신이 나왔을 때는 살짝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콜라가 아주 빠르게 줄어들었다는 것만 빼면.

“그럼…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네.”


다시 내밀어진 나의 손.
그녀는 이젠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듯했으나…
마지막에는 결국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보통 여자들은… 집 앞에서 하는, 헤어지기 전에 나누는 스킨십에 로망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이건 괜찮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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