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지구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잠시 보류했다.
새로 얻은 능력을 제대로 체득하기 위해서다.
패널티가 극심한 스킬인 만큼 제대로 조절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수련은 지구가 아닌 테라포밍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혹시나 조절에 실패해 몸이 무너진다면, 지구의 경우 되돌릴 수 없다.
‘혈귀화’는 다른 무엇보다 내 의지와 절제가 크게 요구되는 능력.
그렇기에 수련 중 타인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덕분에 크리스는 오랜만에 겪는 제대로 된 휴식에 좋아하는 것 같고…’
그렇게 내 할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중간에 보내주기로 약속했지만 까먹고 있었던 셀카도 고다연에게 보내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답신은 문자를 읽고 한참 뒤에나 왔다.
- 스윽.
방 안에 세워진 전신 거울을 봤다.
밝은색의 캐쥬얼한 오버핏 셔츠.
그 위에 걸친 두껍지 않은 가디건.
실상은 다 합쳐 80,000원을 넘지 않는, 한 계절 입고 버려야 하는 옷들이지만…
깔끔한 이미지를 주는 것에는 충분했다.
“적어도 데이트 상대로서 부끄러울 정도로 못 입은 건 아니지.”
몸이 바뀐 이후에 딱히 비싼 옷을 구매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의상이 쪽팔리지 않는 수준으로만 유지하면 되었으니까.
게다가 한창 몸매가 다른 사람처럼 변하던 시기였으니,
그때 옷을 샀어도 지금 입지는 못했으리라.
선크림도 발랐고, 평범하게 챙길만한 물건은 챙겼다.
향수는 뿌리지 않기로 했다.
너무 과하게 신경 쓴 티를 내서야 좀 그렇지 않은가?
모든 준비를 끝마친 나는 집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고다연과 데이트를 약속 한 날, 토요일이다.
*
“찬영씨! 그… 안녕하세요?”
“…너무 일찍 나오신 것 아니에요?… 지금 30분 전인데.”
“앗! 저도 막 도착했어요!”
꽤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고다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색이나 표정을 봐서는 그녀의 말대로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닌 듯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도착한 것은 전혀 아니다.
당장 주변을 곁눈질해도, 고다연의 번호를 딸지 말지 망설이는 남자만 네 명이다.
최소 10분은 서 있었다는 뜻이다.
“10분…정도 기다렸나요?”
“넷? 어떻게?…”
“이런… 첫 데이트에 기다리게 하다니, ‘남자친구’로서 아직 부족하네요. 미안해요 다연씨.”
내가 유독 힘주어 말한 남자친구라는 단어에 고다연을 노리던 남자들이 낙담했다.
동시에 모르는 척 나를 뒤따라오던 여자 몇 명도.
- 절레절레!
“아니에요! 정말로 많이 안 기다렸어요!”
“기다리긴 했다는 뜻이네요.”
“…아.”
“바로 출발하기보다는…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근처 카페나 들려서. 아, 당연히 사죄 삼아서 제가 사는겁니다. 용서해 주실 거죠?”
“으으… 네…”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우리의 첫 번째 행선지는 카페로 정해졌다.
우리가 찾은 곳은 옷가게가 많은 번화가다.
당연히 몇 m 간격으로 여러 개의 카페가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중 대충 눈에 밟히는 곳에 들어갔다.
- 홀짝.
“다연씨에게 도움을 구하길 정말 잘했네요.”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리는 고다연에게 말했다.
“네?”
“다연씨의 사복은 처음 보는데, 역시 제가 예상한 대로 센스가 좋으신 것 같아서요.”
대놓고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닌, 슬쩍 돌려서 칭찬을 해주었다.
포장된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느끼게끔.
실제로 그냥 말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안색이 밝아진 얼굴을 숙여 내게 기쁜 티를 숨기려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실제로 그녀의 옷차림은 상당히 화사했다.
그러나 과하게 꾸민 정도는 아니라서, 정말로 그녀와 잘 어울렸다.
꾸민 듯 안 꾸민 것처럼.
패션의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원칙을 손쉽게 지켜냈다.
“다연씨. 슬슬 출발할까요? 너무 쇼핑이 늦어지면… 조금 곤란해서요.”
“네? 아… 혹시 이후에 다른 볼일이?…”
“하하! 그럴 리가요. 저녁 이후에 영화 한 편 예약했거든요. 오늘은 데이트니까.”
“여,영화요?”
“적당히 평가 좋은 로맨스 코미디 영화입니다. 아, 설마 통금이 있다던지?”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좋네요. 어울려 주실 거죠?”
“그… …가,감사합니다…”
대학 및 댄스 크루 술자리에 자주 참석하는 그녀인 만큼 통금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데이트 날짜인 토요일은 그녀가 잡은 시간이다.
다른 약속이 겹칠 리 없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영화를 예약할 수 있었다.
“가시죠.”
커피를 마신 이후에는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
들려야 할 곳은 매장 한곳이 아니다.
꽤 옷을 많이 사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브랜드 정장 한 벌 뿐만이 아니라,
촬영 당일에 입고 갈 옷 여러 벌이 필요하다.
전문 모델들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의 상·하의 한 벌.
다음날 촬영을 나갈 때 같은 옷을 입을 수 없으니 그때 입을 옷 또 한 벌.
적어도 돌려 입을 수 있을 개수의 옷을 사야 한다.
- 저벅저벅.
그렇게 이곳저곳을 둘러다 보고,
마음에 드는 옷을 사들인 지 두 시간 쯤 지났을 때.
“다연씨?”
“흡! 네엣?”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고다연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못된 짓을 하다 들킨 것만 같은 표정이다.
“멍하니 뭐 하시나요?”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대화는 이번 한 번 뿐만이 아니었다.
내 곁에 선 그녀는 가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내가 부르면 저런 표정을 지으며 얼버무리기 바빴다.
데이트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혹시 어디 아프시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조금…”
“조금?”
“으으…”
고다연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끝은 손에 든 짐에 가 있었다.
혹시 지금까지 산 옷들 중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가 있었나?
분명히 한번 입고 나왔을 때는 칭찬만 가득 했었는데?
그렇기에 의아해했다.
“후우…!”
- 스윽.
하지만 나는 곧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어쩐지 다짐이 담긴 한숨을 내뱉은 고다연이 내 손에 들린 짐을 빼앗으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가 두 시간 내내 홀로 짐을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밟혔나 보다.
한두 벌도 아니고, 짐마다 옷걸이까지 들어있으니 꽤나 무거울 만 하다.
‘내게는 의식도 하지 못할 무게지만.’
나는 당연히 짐 드는 것을 거드려는 그녀를 말리려고 했다.
과장이 아니라, 여기서 짐이 수백 배 무거워지지 않는 이상에야 너무나 여유로웠기에.
“잠깐만요, 짐은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은…”
“그게 아니라!…”
- 덥썩.
“이거… 때문…에요…”
“…아.”
고다연의 의도대로, 내 손에는 짐이 치워졌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 것은 단순히 짐을 들어주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다연은…
짐을 빼앗겨 빈손이 된 내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도저히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항상 스킨십에 부담을 느끼던 그녀 쪽에서 먼저 다가온 것이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꽤나 심장에 타격을 주는 공격이다.
나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어버릴 만큼이나.
- 움찔!
내 딱딱한 손바닥에 담긴 작은 손이 긴장에 차 살짝 떨어대었다.
어쩐지 나까지 그 긴장이 전해져서, 우리 둘은 그렇게 말없이 손을 마주 잡은 채 몇 초간 서 있었다.
주말 번화가 특유의 북적거리는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연씨. 이러면 저… 참기 힘든데요.”
“네? 안돼요! 참으셔야 해요!”
“푸훗. 큭큭큭… 그,그렇게 당황할 말이었나요? 큭큭.”
“아앗! 그냥 놀라서! 아니, 그, 싫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농담인 것 아는데…!!”
- 허둥지둥!
내 진심이 절반쯤 섞인 말에 고다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황한 말투로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얼굴이 너무 빨갛게 달아올라 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크게.
“그만 웃으세요!”
“아니, 큭큭… 방금 한 말에 담긴 절박함이 너무 웃겨서… 풋!”
“흣!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찬영씨!”
- 꼬옥.
물론 이렇게 작은 소란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맞잡은 두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부끄러움을 못 이겨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면 막으려고 했을 것이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고다연이 내 손을 힘을 줘 잡고 있었다.
마치 두 번은 내지 못할 용기인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
최대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 슥.
“…찬영씨…? 앗!”
나는 그녀가 내게서 빼앗아 간 짐을 다시 가져왔다.
한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에 들린 짐을 빼앗으려다 보니,
저절로 포옹하려는 자세가 되었다.
물론 정말로 포옹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그녀는 충분한 용기를 내었다.
여기서 더 나가려고 한다면 역효과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품에 안으려는 척을 한 것은 맞다.
고다연을 당황시켜, 그 틈을 타 손쉽게 짐을 돌려받기 위해서.
“짐은 돌려받을게요.”
“도와드리고 싶은데…”
“마음만 받을게요!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리고… 전혀 안 무겁고요.”
- 톡톡.
“읏! 가,간지러워요.”
나는 맞잡은 그녀의 손등을 살짝 두들겼다.
굳은살이 박여 평범한 사람에 비해 많이 거친 내 손가락으로.
‘이런 무게로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다.’라는 뜻이다.
다행히 나의 뜻은 고다연에게 잘 전달되었다.
내 손에 박인 굳은살을 다시 상기한 듯했다.
그리고 춤을 연습할 때마다 그녀가 은근슬쩍 곁눈질하던 내 근육도.
“다시 갈까요?”
- …끄덕.
나는 그녀의 인생에서 첫 연인이다.
당연히 키가 차이 나는 연인끼리 손을 잡으면 보폭을 맞춰 걸어야 한다는 것도,
인파가 많은 거리를 지나갈 때는 서로의 어깨가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초보 커플이나 겪을 법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숨 쉬듯 그녀의 보폭에 몸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손을 잡은 영향인 듯 발걸음에는 항상 긴장이 가득해 불규칙적이었지만…
내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 꼼지락 꼼지락…
“손에 땀 안 찼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핫! 네!”
“풋.”
“왜…왜 자꾸 웃으세요!”
“아니, 너무 귀여워서.”
“…”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내었던 화는 내 한마디에 격추되었다.
결국 푹 숙인 고다연의 얼굴이 다시 올라온 것은 다음 옷가게에 도착하고 난 뒤가 되었다.
삐져있던 건 절대 아니고,
단순히 내 얼굴을 보기 부끄러웠나 보다.
*
“음… 이 정도면 살만큼은 산 것 같은데요?”
“그럼 쇼핑은 끝?”
“고생 많으셨어요. 다연씨. 오늘 저랑 어울려주느라.”
“아니에요! 저도 재밌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쓰셔도 괜찮은가요?”
“돈이요?”
“네…”
한 손 가득 들린 짐.
이조차 모자라서, 정장의 경우는 집으로 배달시켜 달라고까지 했다.
오늘 하루 쓴 금액은…
다 합쳐보니 살짝 질릴 정도긴 하다.
‘어쩔 수 없지. 제대로 된 정장만 해도 기본 가격이 장난 아니니까.’
게다가 옷 한벌 한벌이 평상복치고는 꽤 비쌌다.
내 몸의 태가 상상 이상으로 좋아서,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사버린 탓도 있고.
“모아놓은 돈이 넉넉하게 있어서요.”
내가 모은 돈은 아니지만.
“요즘 수입도 좀 있고, 다 계산해서 한 소비입니다. 게다가 계약만 잘 되면 한두 달 만에 복구할걸요?”
“…그렇게 많이 받을 수 있나요? 피팅 모델이…”
“물론 사회 초년생치고는 많은 돈이지만, 수명이 긴 직업은 아니니까요.”
“아하…”
“저 평소에도 이렇게 과소비하는 사람 절대 아닙니다.”
곤란한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무계획적인 사람으로 비추어서야 곤란하다.
그건 누구에게나 큰 감점 포인트니까.
‘언제 한번 집에 초대나 해야겠네. 물론 대낮에.’
내게 있어서 이것이 과소비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려면 집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혼자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넓은 집이니까.
서울의 황금 부지에 저런 단독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재력에 큰 증명이 된다.
“슬슬 저녁 식사 하러 갈까요? 느긋하게 뭐라도 먹고 나오면 딱 영화 시간이겠네요.”
“저녁이라… 음… 뭐 먹을까요?”
“고기나 썰러 가죠.”
“고기라면… 어… 삼겹살을 말하는 건 아니죠?”
“하하! 기껏 산 옷에 냄새 배게 할 일 있나요? 당연히 스테이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