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지구
- 탁타탁. 탁!
“슬슬 저녁 시간이네… 마무리는 각자 집에서 하는 거로 할까? 어차피 과제 발표는 멀었으니.”
“그러자. 정리하느라 고생했어.”
“오케이. 오늘 회의 내용은 메일로 보낸다?”
- 끄덕.
이지연은 작성한 회의록을 메일에 첨부하여 보냈다.
과제의 진전은 빨랐다.
팀원 뽑기는 순전히 운이라지만, 다들 열심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수가 이번 과제는 친한 사람들 끼리 조를 만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고다연과 조를 이룬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지연은 고다연에게 소개팅도 주선해 주었을 만큼 친했기에.
‘…그때 생각나니 또 짜증 나네. 결국 백하민 그 새낀 나랑 다연이한테 사과 한마디 없었고.’
이지연은 고다연에게 백하민을 소개시켜 주었다.
결과는 대학의 모두가 알다시피…
이보다 더 최악이 없을 정도로 파탄 났다.
물론 그녀들이 실제로 피해 본 것은 없다.
그러나 가끔 고다연에게 향하는 불특정 다수의 동정 어린 시선.
그 시선이 그녀의 친구에게 향하는 것은 상당히 거슬렸다.
원인이 그녀에게 있었기에 더더욱.
고다연은 미안해 고개를 못 들던 그녀를 역으로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
마음이 착해도 너무 착한 친구라고, 이지은은 생각했다.
지금도 봐라.
당장 모임이 해산될 분위기니까 혼자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지 않은가?
저렇게 친구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그녀까지 성실해지는 기분이다.
곁에 있으면 인생에 힘이 되는 친구.
딱 고다연을 향하는 말이었다.
- 스윽.
“…나도 도와줄게.”
“아, 고마워 지연아.”
“고맙기는… 야. 뭐해? 늘어져 있지 말고 너희들도 도와!”
“귀찮.”
“…나 잠깐 전화 좀.”
“오. 그럼 나는 화장실.”
- 후다닥. 끼익. 쿵!
“…죽이고 싶네.”
“푸훗.”
고다연은 도망가버린 두 친구를 보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두 친구를 보고 작게 욕을 내뱉은 이지연을 보고.
두 명의 친구는 도망가버렸다.
결국 여기저기 프린터와 다과가 차지한 책상은 둘이서 정리해야 했다.
- 스윽. 슥.
“그러고 보면 지연아.”
“응?”
“너는 연애를 많이 해봤지?”
“그…치? 연애를 ‘많이’하는 것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앗… 미안…”
“농담이야.”
이지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여자들끼리의 연애 이야기는 좋아했다.
아니, 했었다.
이런저런 남자를 많이 겪어보며 남자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그녀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스로의 남자 보는 눈을 별로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모두 백하민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연애는 왜?”
“별건 아니야. 그냥 남들은 남자친구와 진도를 언제쯤 나가나 싶어서.”
“진도? 진도라면… 뭐 첫날밤 이런 고민?”
“처,첫…!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말꼬리는 그렇게 흐려졌다.
뒷말을 이어 말해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항상 침착하던 그녀가 어쩐 일로 저리 수줍음을 타는지 너무나 수상해 보였지만,
맺지 못한 뒷말이 조금 더 궁금했다.
첫날밤에 관한 고민은 아니다.
하지만 모태솔로가 직접 입 밖으로 내기에는 부끄럽다.
그렇다면 답은…
“키스?”
- …끄덕.
고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연의 예상을 긍정해주었다.
그 표정은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와 같았으나, 달아오른 얼굴색만은 표정 연기로도 감추지 못했다.
“오… 뭔데. 그 반응.”
“응? 내 반응이 왜?”
“대학 밖? 대학 안?”
“저기… 지연아?”
“…으음… 잘 모르겠네. 그래도 대학 밖이려나? 안이면 내가 몰랐을 리 없으니까.”
이지연은 고다연의 표정까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니 주어진 단서들로 상황을 조립해 보기로 했다.
대학은 밖일 가능성이 더 컸다.
고다연과 손에 꼽을 정도로 친한 이지연 몰래 연인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둘은 수업이 갈릴 때 빼고는 거의 붙어 다녔으니까.
짝사랑 역시 아닐 것이다.
그녀는 키스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친분도 없는 상대를 생각하며 진도를 고민하다니?
이지연이 아는 고다연의 성격과 맞지 않을 정도로 호들갑이 가득했다.
‘프로필 사진, SNS에도 별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럼 남친은 아니려나?’
- 덜컥. 터벅터벅.
그때,
문밖을 나갔던 두 명의 친구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속보!! 고다연 썸남 생긴 듯!”
“얘들아. 커피 배달 왔… 뭐라고?”
“써,썸남? 다연이한테?”
“으아아! 아니야아!”
방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고다연이 크게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다연은 이지연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썸남’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들은 두 친구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이지연은 일단 일을 크게 벌이기로 했다.
그래야 고다연이 발뺌하기 힘들고, 자백을 받기 수월하니까.
이 조별 과제 팀원들은 전부 친한 친구의 모임이다.
적어도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가볍게 떠들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두 친구 중 한 명의 손이 이지연의 눈에 들어왔다.
친구의 손에 커피 캐리어가 들려 있다.
커피는 총합 네 개.
이 조별 과제 조원의 수와 정확히 들어맞았다.
“어라? 너 전화 받으러 간단 것이 그거였어? 그런데 웬 커피?”
“아. 난 솔직히 자료조사만 해서 꿀 빨고 있잖아? 그래서 물주라도 하려고.”
“오… 좀 기특하네.”
“넷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 근데 썸남은 무슨 소리야. 설마 이대로 말 돌릴 거 아니지?”
“설명은 다연이한테 듣자.”
세 명의 시선.
총 여섯 개의 동공이 고다연을 향한다.
고다연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려 가방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달려드는 이지연에게 제지당했다.
- 탁!
“어딜 도망가려고!”
“그,그런거 진짜 아니야!…”
“그럼 쟤들한테도 물어볼까? 얘들아. 다연이가 남자랑 키스는 사귄 지 언제쯤 하는 게 좋냐고 물어보던데… 이건 내 착각이야?”
“…와… 진짜 썸남 있나 본데?”
“맞네. 최근에 남자한테 크게 데인 경험이 있는데, 그걸 아무 이유 없이 궁금해 할 리가…”
“대박. 연애에서 입은 상처는 연애로 덮는다?
“으아아아아!!”
고다연이 비명을 지르며 부정해보려고 했지만, 내심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 명의 친구는 이미 확정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 봄날이 온 것을.
고다연은 머리를 굴렸다.
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의 머리는 엉뚱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얘들에게는 숨길 이유가 없지 않나?…’
애초에 댄스 크루의 팀원들에게 연애 사실을 숨긴 이유는 괜한 분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녀도 눈치가 없진 않아서, 대부분의 여자 팀원이 박찬영에게 관심이 있단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학 친구들에게 알려진다고 한들 문제점은 생기지 않는다.
굳이 문제라고 하면…
고다연 그녀가 조금 부끄러워질 뿐.
그녀에게는 대학 친구 말고도 박은미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연애를 잘 아는 그녀에게 물어본다면 쉽사리 답을 얻을 수 있겠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질문을 하지 않아도 매일 조언을 해 오는 그녀다.
혹시 한번 어수룩한 티를 내게 된다면?
그럴 줄 알았다며 도움을 준다는 핑계로 얼마나 질문의 세례를 받을지 몰랐다.
고다연의 부끄러운 사생활은 절대 지켜지지 못할 것이다.
‘맞아! 부,분명 찬영 씨도 자신의 연애가 매일같이 얼굴도 모르는 남에게 알려지는 건 싫을 거야!’
이들은 고다연의 연애에 관해 깊게 물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서로의 연애 이야기를 하고는 했으며, 가볍게 지나가듯 흘린 정도였으니까.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단순히 인터넷이 아닌, 실제로 생생한 정보를 얻을 기회.
“…사실.”
“사실?”
“나,나,남자친구가… 생… 겼는데…”
“남자친구? 단순히 썸남이 아니라, 진짜 연인?”
- …끄덕.
고다연의 긍정에 방이 다시금 뒤집어졌다.
세 명의 친구는 합심해서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백하민과의 연애는 제대로 된 연애라고 칠 수 없었다.
그녀들의 기준에서는 이번이 고다연에게 생긴 첫 남자친구인 것이다.
어떻게 만났는지.
사귄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몇 살인지.
누가 고백했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등등…
고다연은 진도를 제외한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물론 고백은 한 것이 아닌 받은 것으로 바꾸어 말했다.
그녀의 입으로는 자신이 고백했다 말한다니,
이미 수치심은 연애중인 것을 공개한 것으로 한계였다.
“동갑이라고? 우와… 내가 없는 사이에 이런 큰일이 있었다니…”
“나,나도 갑작스러워서… 미리 이야기를 안 해줘서 미안?…”
“사진은? 남자친구면서 같이 찍은 사진도 없어?”
아직 박찬영에게 받기로 한 사진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진은 존재했다.
그녀에게 사과하기 위해 보낸 사진이 남아 있으니까.
보여줄까?
살짝 고민되었다.
그녀가 주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퇴… 하셨다고 했지? 아직 이유를 못 들은 걸 봐서는 사정이 있으신 것 같던데…’
혹시나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민폐가 갈까 봐.
함부로 행동하기보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하는 것이 옳으리라.
친구들 역시 SNS를 즐겨 했기에 한창 대학 커뮤니티에서 떠돈 ‘잘생긴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까먹지 않았다면 남자친구의 얼굴을 이들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사진은… 그러고 보니 없네? SNS도 안 하고.”
살짝 죄어드는 죄책감을 무시하고 거짓말을 했다.
“정말? 어쩐지 의심되는데…”
“만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잖아?”
댄스 크루의 너튜브 공식 채널에 가보면 박찬영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은 눈치다.
그 사실에 고다연은 속으로 살짝 안도했다.
- 우웅.
가방에 들어있던 그녀의 핸드폰이 한번 울렸다.
문자가 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지금은 친구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녀가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연애 중인 것을 공개할 만큼이나 궁금한 것에 대해.
“그래서… 다들 지,진도는 언제쯤 나가?”
“음… 나 같은 경우는 키스는 고백받은 당일에. 그런 남친이 많았지.”
“나도 썸은 일주일 정도 타다가 키스한 날에 사귀었어. 첫날밤은 길면 한 달?”
“오. 이렇게 놓고 보니 다들 비슷하네? 나도 똑같아.”
“기,길면 한 달이라고?”
“다들 비슷하지 뭐. 고딩도 아니고… 아, 다연이 너는 첫 연애이니 좀 다르려나?”
“연애를 시작한 지 언제쯤 했다고?”
“이 주 정도 된다던데.”
“오. 그럼 키스는 전부 했겠네?”
“아. 그래서 다른 사람은 키스 언제쯤 하냐고 물어본 거야? 너무 진도가 빠른 것 같아서?”
“킥킥. 부끄러워하기는. 오히려 느린 거니까 안심해.”
“…”
고다연은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아직 키스는커녕 제대로 손조차 잡지 못했다는 절망적인 속도에 대해.
‘내가… 그렇게 느리게 진도를 나가고 있나?…’
한두 명이 말한다면 그냥 넘기겠으나,
세 명 전부 입을 모아 그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해가 아니란 뜻이다.
여태까지 그녀가 거부감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진도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박찬영과의 스킨십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 우웅.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문자가 또 온 것이다.
지금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무시하려 했으나…
- 우웅. 웅.
문자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급한 연락 아니야?”
“음… 생각나는 건 없는데…”
- 스윽.
고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어 쌓인 문자를 확인했다.
정말로 별생각 없이 열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화면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어라? 그 남자는 누구야?”
그러니 문자 속, 박찬영이 보낸 셀카가 친구 중 한 명에게 보여도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왜 하필 지금 사진을 보내셨어요 찬영씨…!’
“뭐? 남자? 설마 남친 아니야?”
“어디 어디… 야! 너 왜 숨겨!”
“어라? 숨기는 걸 보니 진짠 것 같은데?…”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숨긴 것이 악수가 되었다.
친구들은 금세 사진 속 주인공이 고다연의 남자친구란 것을 유추해 내었다.
“지연아! 너 잠깐 봤었지? 어떻게 생겼어?”
“어,엄청 잘생겼는데… 연예인처럼… 그래서 나도 남친일 거라곤…”
“뭐? 잘생겼다고? 야 고다연 잡아!!”
고다연은 세 명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초인이 아니었다.
그냥 운동을 좀 한 평범한 여자였다.
결국 모두의 눈앞에서 핸드폰의 잠금을 푸는 수밖에 없었다.
“…와… 그냥 미쳤네.”
“진짜? 모델이나 연예인이 아니라?”
“…모델…을 하고 있기는 한데…”
“허… 그러네. 이건 모델 안 하면 손해지.”
“이렇게 생긴 일반인이 있다고? 거짓말 아냐?…”
“문자 내역 봐봐… 아주 꿀이 떨어진다 그냥.”
“저,적어도 문자 내용은 보지 말아줘…!”
“앗. 그건 미안…”
“아무튼 왜 순식간에 사귄 지 알 것 같다… 야. 이건 고백받은 순간 잡아야지…”
“안 잡으면 진짜 바보지 바보.”
고다연은 혹시나 지적이 나올까 봐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끝내 지적은 나오지 않았다.
대학 커뮤니티에 떠돌던 그 남자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눈썰미가 유달리 좋은 사람이거나, 직접 대면을 한 것이 아닌 사진으로만 본다면 눈치채지 못할 법했다.
도촬 사진과 달리 이 사진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도촬 사진은 멀리서 찍느라 화질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한번 본 것 같은데? 다연이 네 남자친구.”
- 움찔!
“모델 한다잖아. 인터넷에서 봤겠지.”
“아하.”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지연의 말에 몸이 덜컥 굳었던 고다연은,
친구들의 오해에 다시 안도하였다.
‘…그래도 진실을 밝힌 보람은 있어. 스킨십… 스킨십이라…’
일단 그녀의 연애 진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느리단 것을 알았다.
그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이 순간에도 박찬영은 그녀를 위해 참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돌아오는 토요일의 데이트.
큰 시도는 절대 아니더라도…
고다연은 약간, 아주 약간의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