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지구
“좋아! 이걸로 마지막!”
- 찰칵!
카메라서 터진 조명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감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상을 살짝 찌푸릴 만 하지만 내 표정은 전혀 흔들림 없었다.
딱히 모델 일에 대해 프로 의식을 가지게 된 건 아니다.
‘별로 눈이 부시지도 않고…’
마나 각성 덕인지, 스킬의 안력 강화 버프 덕인지…
내 눈은 어지간한 타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굳이 눈부신 것을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에 그러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야… 너랑 일하면 작업 속도가 다르다니까? 사진발을 잘 받아서 여러 번 찍을 필요도 없고, 눈에 밟히는 흠도 없어 보정도 순식간에 끝나.”
댄스 크루의 총무이자, 지금 내게는 고용주인 임준혁.
그가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돌려 보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가와서 오늘 찍은 사진들을 내게도 보여줬다.
“어때?”
“음… 이 정도 퀄리티면 괜찮은 건가요?”
“하하하! 당연하지! 오늘도 수고했어. 급료는 계좌로 넣어줄게.”
“감사합니다.”
솔직히 사진들은 내가 봐도 꽤 잘 나오긴 했다.
따로 포토샵이나 필터를 넣을 필요도 없을 만큼.
과하지 않을 정도로 큰 키와 보기 좋은 길이의 다리.
고된 수련으로 인해 벌어진 널찍한 어깨,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한 피부까지.
어디 지하상가에서 구입 한 중국산 짝퉁 옷이라도 핏이 저절로 살아날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볼 때는 이 옷들 전부 꽤 나쁘지 않은 디자인을 하고 있다.
아무리 자취방에 조약 하게 꾸민 열악한 촬영실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과분한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때. 넌 스스로가 모델 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재능이랄 것까지 있나요. 그냥 남들보다 약간 커다란 키 덕을 보는 거죠.”
“에라이. 곧 죽어도 자신의 입으론 잘생겼단 소리는 안 하네?”
“원래 자신의 얼굴은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고 하잖아요.”
“에휴… 내가 그 얼굴로 태어났으면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봤을 텐데.”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비추는 박찬영은 성실하고 겸손해야 했다.
그래야 고깝게 보는 눈이 조금은 줄겠지.
별 시답잖은 일에 귀찮게 얽히는 것은 질색이다.
물론 겉모습 꾸미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생각은 전혀 없다.
정작 시비가 걸려오면 내 성격으로는 곱게 못 넘길 것이다.
지금처럼 약간 말조심만 하면 되는 수준 정도면 된다.
이 정도는 숨 쉬듯 해낼 수 있으니까.
“조금 답답할 때도 있지만, 지 잘난 맛에 사는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지 뭐.”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연인이 필요하면 나한테 귀띔 하고. 내가 아는 후배가 너한테 관심이 있…”
“…아. 저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해서.”
“그래! 그런 부분이 답답하다고!”
댄스 팀원들이 종종 내게 권유해 오는 소개팅은 모조리 쳐내고 있다.
그 유명한 ‘자만추’를 들먹여 대며.
그럴 때마다 내게 향하는 저 화병 어린 눈빛은 감내해야 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하냐… 너는 남들이 걱정 안 해줘도 알아서 여자가 꼬일 것 같으니까.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하지만 내 마인드를 진심으로 바꾸려는 사람은 없었다.
못생긴 사람이 이러면 쓸데없는 고집이지만,
내가 하면 뚝심 있다는 평을 받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이게 생겼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모델 일은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육체노동도 없고, 급료도 세니 불만이 있을 리가요. 무엇보다 제 예상보다 시간을 훨씬 적게 잡아먹더라고요.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듭니다.”
“전에 고용한 모델은 이리 빨리 안 끝났지. 너에 비해 시간이 한 두세 배는 더 걸렸다? 이건 너라서 엄청 빠르게 끝나는 거야.”
“그런가요?”
“그래. 그래도 적성에 맞는 것 같다니 다행이네. 음… 그럼… 권유 정도는 해볼까?”
- 부스럭.
내 반응을 보고 살짝 망설이던 임준혁이 무언가를 건네었다.
손에 쥐면 완전히 가려질 만한 크기의 직사각형 하얀색 종이.
명함이다.
“어라? 이 회사… 쇼핑몰 아닌가요? 그것도 엄청 큰.”
“오! 알고 있어? 그럼 이야기가 빨라지겠네.”
백하민 시절, 나도 옷을 살 때 이용한 적이 있는 쇼핑몰이다.
꽤나 이름이 알려졌다는 뜻이다.
정확한 순위는 모르지만…
적어도 남성 패션 쇼핑몰 업계에선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하다.
‘…거기다 회사 대표라고?’
직함에 대표이사라고 적혀있다.
이 명함,
평범해 보이는 것에 비해 무거운 명함이다.
그런 명함을 내게 왜?
“다름이 아니라 친한 분이 네게 모델 일 관련으로 관심이 있다고 하셔서. 알고 있겠지만, 그분도 나처럼 쇼핑몰 하나를 하고 계셔. 뭐…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지.”
“친한 분이라면… 설마 이 명함의 주인?”
“맞아. 내가 창업할 때 도움을 많이 받은 분이야. 네가 모델 일에 흥미가 없다고 하면 명함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리 느껴지지는 않아서.”
“인맥이… 넓으시네요.”
과거라면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나쁘지 않게 들렸다.
나는 회사의 소속 모델로써 에이전시에 묶여 있기가 싫었다.
내가 능동적으로 스케줄을 잡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델 일을 해보니 생각보다 시간 조율이 자유로웠다.
기존에 임준혁과 친분이 있다 보니 어느 정도 편의를 받은 것이다.
다른 쇼핑몰에서도 이렇게 자유로울 것이란 보장은 절대 없겠지만…
그건 그쪽 사장과 계약 내용을 조율하기에 따라 달린 것이리라.
이야기가 잘 되면 좋고, 그것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잊으면 된다.
‘합의점을 못 찾으면 그냥 계약을 안 하면 되니까.’
계약하게 되면 얻는 이득은 있다.
지금 버는 수입이 알바치고는 짭짤하긴 하다.
그러나 돈을 펑펑 쓰기에는 수입이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수익을 일정 수준까지는 늘려 둘 필요는 있었다.
‘그래야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가져온 재화를 처분해 급전이 생겨도 의심을 안 받으니…’
지금의 수익은 단순한 알바로, 누구나 예측이 가능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뼈가 삭을 정도로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다.
타인이 내 수익을 쉽사리 예측하지 못할 정도면 충분하다.
이건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나의 풍요로운 지구 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연락하라는 건 절대 아니야. 무시해도 돼. 그런데, 혹시나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고. 우리 스케줄에만 영향 없으면 다른 곳과 계약해도 상관없잖아?”
“연락… 한번 해보겠습니다.”
“오! 그래? 그럼 좋지! 아, 근데 그 쇼핑몰은 꽤 커서 너 말고도 다른 모델도 많을 거야. 그냥 알고 있으라고.”
“그런가요?”
“응. 모델 한 명이 소화해낼 물량이 아니거든.”
나를 제외한 프로 피팅 모델들이 있다?
이건…
‘써먹기 좋은 핑계가 될 것 같은데?’
*
특별할 것 없는 서울 어딘가의 평범한 길.
주변에 고다연을 제외한 사람은 없었다.
“다연씨.”
“네?”
내 부름에 앞을 걸어가던 고다연이 뒤를 돌아본다.
손에 들린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아이스 아메리카노.
항상 카페인을 입에 달고 사는데 밤에 잠은 올까 싶다.
“요즘 특히나 의상 센스가 눈에 띄는데요? 너무 잘 어울려요.”
기존에 입던 단순한 운동복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내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고다연은 운동복을 고를 때 외견을 상당히 신경 썼다.
센스가 있다 말한 것은 허언이 아니다.
인싸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정확히 찾았다.
“앗, 그… 가,감사합니다…”
- 슥…
고다연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괜스레 구겨진 곳을 피거나 먼지를 터는 등.
갑작스러운 칭찬에 명백히 기뻐하는 언행이다.
내가 그녀의 노력을 알아챈 것이 달가웠나 보다.
“하하. 뜬금없이 칭찬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 센스가 제게 필요해서.”
“센스가… 필요하다고요?”
“네. 저 총무님이랑 모델 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네에… 잠깐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하고 계신다고…”
“원래는 그랬는데, 이번에 큰 쇼핑몰에서 저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말이 나와서요.”
짤막하게 임준혁과 나눈 이야기를 해주었다.
또한 지갑에서 받은 명함을 그녀에게도 보여주었다.
명함을 본 고다연의 눈이 커진다.
그녀도 꽤 들어본 적 있는 쇼핑몰일 테니 당연하다.
“와! 찬영씨는 그럼 이곳과 일하시는 건가요?”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어요. 계약 건 관련해서 미팅 날짜는 잡았고요.”
“계,계약… 미팅… 뭔가 엄청 어른스럽네요.”
“…그런가요? 아무튼. 그래서 다연씨의 도움이 좀 필요해요.”
“예? 제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나요?”
나는 고다연을 향해 작게 웃었다.
드디어 기나긴 서론이 끝나고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고다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이 화제를 시작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있죠. 그쪽 대표님이랑 미팅을 잡았는데, 제가 마땅히 입고 갈 옷이 없거든요.”
“옷… 말인가요?”
“네. 게다가 프로 피팅 모델들도 있다는데… 제 옷이 과하게 질 떨어지면 좀 보기 그렇잖아요?”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의류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첫인상으로 남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볼까?
답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다.
몇백 하는 명품까지는 아니라도 깔끔한 옷을 할 필요는 있었다.
적당히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
“아… 그럼 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저 옷 고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다연씨.”
“으으… 저,정말 죄송하지만… 저 남자 옷은 잘 모르는데…”
“부담 갖지 말아요. 그래도 보는 눈은 있으시잖아요? 그냥 제가 입고 나온 것을 평가만 해주시면 됩니다.”
“과,과연 제가 도움이 될까요?… 그래도 확신이 안 서서…”
“으음… 아직… 모르시겠어요?”
“네?”
“이거 데이트 신청이에요. 지난번 밥 한 끼 먹은 건 첫 데이트로 치기엔 너무 짧았잖아요?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보고 싶어서.”
“핫! 아! 그,그렇! 읏!”
멍하니 내 말을 듣던 고다연이 크게 당황한다.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전혀 생각이 닿지 못했나 보다.
‘반응을 보니… 나를 남자로 의식을 못 한 것이 아닌, 연애 쪽으로는 생각이 안 돌아 가는 건가?’
차분히 고다연의 표정을 읽어 보았다.
부끄러움과 당황, 그사이에 섞인 것은 선명한 기쁨이었다.
까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럼… 제안은 수락인가요?”
“네! 가,갈게요! 가죠! 옷 사러!”
“언제 시간이 되나요? 저는 자유로워서.”
“시,시간표가…”
- 허둥지둥!
고다연이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대학의 시간표 어플을 확인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나는 얌전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것도 꽤 귀여웠지만,
어느 정도 진정했으면 한다.
아직 본격적인 데이트는 시작도 안 했으니까.
왼손에는 핸드폰, 오른손에는 커피를 든 고다연이 바쁘게 핸드폰을 뒤졌다.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으으… 평일은 조별 과제가… 토,토요일은 어떠세요? 어차피 이번 주 댄스 크루 모임은 일요일이고…! 혹시 안되나요? 그러면 다음 날이…”
“저는 언제든 괜찮으니까, 조금 진정하세요.”
“앗! 네…! 죄,죄송해요! 자꾸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
여전히 당황이 가시지 않는 눈치다.
꽤 당황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겉모습을 포장하는 것에 익숙한 그녀치고는.
그러니…
고다연이 진정할 수 있게끔 내가 돕기로 했다.
‘음… 오히려 더 당황하려나? …그래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니 해보자.’
- 스윽.
“흣…?”
- 움찔!
나는 손을 뻗어 고다연의 오른쪽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내 손의 굳은살이 손등에 닿자, 고다연의 몸이 덜컥 굳는다.
갑자기 손을 잡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살짝 웃으면서 내 손 안에 들어온 작은 손등을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 쪽으로.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조금 진정하세요.”
“…아.”
빨대를 그녀의 입 부근에 가도록 위치를 조정해 준 뒤,
잡았던 손을 부드럽게 놓았다.
그제야 고다연은 멈춰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진 이유는 숨을 참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10일 만에 제대로 된 스킨십이네.’
그리 생각을 한다면…
저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치는 않았다.
“…”
기껏 가져다주었지만, 그녀가 커피를 마시는 일은 없었다.
그저 열이 오른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번 손을 이마에 대며 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고다연은 이미 한계에 치달은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더 자극하면 도망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이후는 데이트 날에 하기로 했다.
“토요일. 기대할게요.”
“…네에…”
고다연이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