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새로운 스킬을 얻어서일까?
귓가에 아련한 시스템 소리가 들려온다.
올라온 시스템 창을 읽을 정신은 없었다.
- 후욱…!
몸이 으슬으슬 떨리면서 열이 올랐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손을 뻗으라 손짓하는 버튼 하나가 생겼다.’, 비약을 마신 멜이 원작에서 묘사한 표현이다.
나는 그 기분을 십분 공감한다.
애매하게 속을 간질이는 것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
이 스위치를 누르게 된다면…
말 그대로 혈기가 끓어오르며, 증폭된 힘이 주는 쾌락에 젖게 될 것이다.
‘몸이 무너져 가는 것조차 잊은 채.’
물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혈귀화를 종료할 수 있다.
그저 그 마음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을 뿐.
낮은 정신력으로는 역으로 집어 삼켜지고, 오래 유지하면 목숨을 잃는다니?
어디 강 건너 소년 만화에나 나올법한 위험하기 스킬이다.
현실에서 얻게 되면 사용을 주저하게 되는.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혈관 하나하나가 느껴질 정도로 거세게 피가 몰아쳤다.
슬슬 가라앉던 미열이 거대한 열기로 돌아와 몸을 다시금 덥혔다.
딱히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무력을 손에 넣었다.
다리가 박살 나 있음에도.
“…후우.”
갈수록 속이 점점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열기를 담은 숨결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뿌드득…
“…역시 몸이 쑤시긴 하네.”
욱신거리는 고통.
몸이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혈귀화를 활성화하게 되면 얻는 능력 중 하나인 상처 재생(中)이 있으니까.
사용 초기에는 붕괴가 되는 속도보다 회복이 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렇기에 더욱더 악질적이다.
사람이라면 방심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니까.
‘제일 심각한 건…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어.’
전신을 달구는 뜨거운 열기.
손쉽게 얻은 강력한 힘이 주는 원초적인 쾌락.
고통은 너무나 쉽사리 잊혔다.
내 청력이 좋지 않았다면, 실시간으로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은 10초.
더 이상의 유지는 위험했다.
멋도 모르고 30초 동안 유지한 멜이 꽤 뼈아픈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들끓는 피를 가라앉힌다.
내 지배 아래의 스킬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혈귀화는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붉어진 동공이 제 색을 되찾았다.
‘좋아. 이 정도면 내 예상 범위의 한참 아래야.’
시스템이 경고한 중독 증세?
확실하게 존재했다.
혈귀화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내비치며 한 번 더 누르라 말을 걸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쉽사리 무시할 수 있을 정도다.
비유하자면 손가락에 박힌 가시 정도의 거슬림.
새로 얻게 된 강력한 수의 대가치고는 무척이나 값싸다.
‘예상대로… 이 스킬의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자연치유』가 억누를 수 있어.’
몸이 점점 무너지다가 죽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눈이 가려져 그것만을 경계하게 된다면…
그건 명백한 실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간 카운팅만 신경 쓰면 누구나 방지할 수 있으니까.
제일 무서운 부작용은 따로 있다.
바로 중독 증세다.
멜은 비약을 마신 이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혹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지금의 나처럼 별반 어렵지 않게 이겨내었으나…
나중에 가서는 많이 지쳐 했었다.
휴식 시간 없이 계속되는 유혹에 깎여만 가는 정신력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특성만을 믿은 건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야 뒤 없는 행동이 되니까.
혹여 내 예상보다 유혹이 훨씬 심해, 정신력이 회복되는 속도보다 소모되는 속도가 빨랐다면?
안젤리에게 ‘구름 나무 차’를 얻어 마셔 스트레스에 면역을 얻으면 된다.
이미 기연을 뺏어 놓고 말하기 뭐하나…
이건 멜이 먹는 것보다는 내가 먹는 게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핑계지. 나보다 멜이 더 준비되었다고 해도 내가 먹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합리화는 못 하겠다.
앞으로도 누군가 미래에 얻을 기연을 가로챌 수 있다면 그리 할 것이다.
설령 원래 주인이 나보다 훨씬 대단한 효율을 뽑는다고 한들.
누군가 본다면 쓰레기처럼 보이겠지만, 뭐 어떤가?
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게다가 나는 쓰레기가 맞다.
완전히 검은색으로 돌아서지 않게 회색을 유지하고 있는.
“둘러봐도 얻을 건 더 없어 보이고… 슬슬 나갈까.”
암시는 혈귀화를 활성화하지 않아도 유지가 된다.
덕분에 눈앞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암시와 강화된 시력.
약간을 헤맨 원작의 멜과 다르게 나는 단번에 벽에 새겨진 문양을 찾는 것에 성공했다.
- 터벅터벅.
‘유지한 시간은 대략 10초… 체크해 봐도 몸이 아픈 곳은 없어. 하지만, 텀을 두어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겠지.’
시스템의 설명에는 사용에 아무런 자원도, 쿨타임도 들지 않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이놈은 반드시 휴식기를 가져야 하는 스킬이다.
단 한 부위에 집중되어 붕괴 되는 것이 아닌, 몸 전체가 동시에 무너지는 만큼 쌓인 부담을 알아채기가 어렵다.
만약 스킬을 종료했을 때 오른팔의 근육이 꽤 찢어진, 아픈 근육통이 느껴진다면…
“다른 팔다리는 물론이고, 심장과 허파 같은 내장까지 그에 준하는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붕괴가 진행됐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의미다.
그렇게 문양에 손을 대기 직전.
나는 비약을 마시자 올라왔던 시스템 창을 닫아 놓은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무슨 내용이지?”
시스템 로그를 뒤적거려 닫힌 창을 다시 띄운다.
곧, 기다란 글을 담은 창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 띠링!
=
* Tip
[직업]
‘직업’ 기능 해금 및 선택 가능한 직업이 3개 이상 되었을 때 직업을 고를 수 있습니다!
직업마다 숨겨진 조건을 만족해야 선택창에 나타납니다.
한번 나타난 직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택한 직업은 이후 변경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변경에 긴 쿨타임이 필요하니, 신중한 선택을 권합니다.
=
=
[직업 변경]
현재 적용 중인 직업: —
- 해금된 직업
▷ 용병
[용병의 수완]
퀘스트 완료 시 획득 카르마 5% 증가.
해금 조건
1. 용병단 소속.
2. 의뢰 완료 2회.
▷ 댄서
[타고 난 스타]
매력 스텟 + 10
매력 스텟에 따른 카리스마 및 첫인상 버프 증폭
해금 조건
1. 매력 스텟 40 이상 보유.
2. 주기적인 춤 연습.
▷ 밤피르(вампир)
[불사자의 집념]
주변에 피를 흘리는 적이 있을 경우, 체력 재생 극소량 획득.
대상과 가까이 붙을수록 효과 강화.
피를 흘리는 대상이 많을수록 효과 강화.
[진득한 피]
출혈 저항 20%
해금 조건
밝혀지지 않음.
현재 상태 - 직업 변경 가능 / 재사용 대기시간 720:00:00
=
그러고 보니 액체 골렘을 잡으라는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으로 직업 해금도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런 시스템 알림이 없었기에 일단 넘어갔었다.
어련히 때가 되면 정보창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차분한 심정으로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해금된 직업은 총 세 개.
직업을 선택하면 그 직업에 딸린 이득을 주나 보다.
하나같이 패시브 버프들이다.
세 직업 모두 내게 이득을 주고 있지만…
유독 한 개의 직업 이름이 보랏빛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다른 직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는 것처럼.
“밤피르(вампир)라… 흡혈귀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종족 아닌가?”
아무렴 어떤가.
보이는 성능이 떠오르는 의문을 입안으로 쏙 들어가게 만든다.
모바일 게임의 에픽 아이템을 떠오르게 하는 보라색 직업은 그 위용이 못지않게 뛰어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직업과 달리 패시브 효과가 두 개.
게다가 [불사자의 집념]은 읽기만 해도 그 성능이 짐작된다.
내 무기가 주먹인 만큼 적에게 출혈을 유발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것도 큰 걱정은 안 되었다.
이제는 나의 주먹을 ‘둔기’라고 칭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력을 담는다면,
뼈가 부러지고 살이 멍드는 수준이 아닌 피부가 터져 나간다.
그 증명으로 쌍요궁(雙搖躬)이 눈알에 직격한 백원후는 사방팔방에 피를 튀겼다.
이런 내 주먹을 둔기로 분류하다니?
그렇다면 단순한 철구를 쏘아내던 원시 대포도 둔기가 돼버릴 것이다.
“선택할 직업이라… 고민할 것이 있나?”
- 띠링!
=
[직업 변경]
현재 적용 중인 직업: 밤피르(вампир)
.
.
.
현재 상태 - 변경 불가능 / 719:59:59
=
용병의 직업 효과인 퀘스트 획득 보상 5% 증가.
분명 눈길을 끌기는 한다.
허나 상대가 나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흡혈귀가 되기로 했다.
그래 봐야 종족이 바뀐 것은 아니라, 외형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드디어 처리해야 할 일이 끝났다.
나는 문양에 손을 대 미로로 다시 돌아갔다.
‘다음 문양은 완전히 힌트가 없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용병들이 기상하기 직전,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뒤져 보아도 남은 하나의 비밀 실험실은 찾지 못했다.
결국 더이상의 소득을 올리지 못한 채 복귀해야만 했다.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아직 첫날일 뿐이다.
왕실 담당자가 찾아오기에는 시간이 넉넉히 남았다.
원작에서는…
‘아마 서신이 도착하고도 4일 걸렸나?’
용병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다.
내게는 그것이 호재가 되어 주었다.
*
골렘을 잡기 위해서는 무한한 마나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2주가 약간 안 되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시간을 지구에서 보내야 했다.
지구에서는 사지가 멀쩡했으니 평범한 일상을 가졌다.
가령 크리스가 집 안에 없는 틈을 타 안젤리와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고다연과 만나기 위해 댄스 크루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등.
‘뭐… 진도는 그닥 나가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제대로 손도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기는 하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고다연이 협조를 했다.
우리 둘의 연애에 대해서.
거창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 변화는 무척 사소해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연애 초기와 차이점을 비교하는 것이 꽤 재밌어서 요즘은 즐기며 관찰하고 있다.
메신저 답장 속도가 칼답에 가까울 정도로 빨라졌다.
심지어 가끔은 고다연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
연습실에서 나를 보고는 살짝 웃으며 반겨준다.
물을 건네어 줄 때 잠깐 맞닿은 손에 얼굴을 붉힌다.
연습하느라 젖은 땀의 냄새를 의식하며 나와 거리를 벌린다.
‘움직이기 편한가?’로만 판단하던 운동복 선택에 외견까지 고려 대상이 되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 봐도 애정이 생겼다고 알아채지.’
멜의 사건 때문에 스스로를 눈치 빠르다고 도저히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둔감한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찬영씨는… SNS는 따로 안 하세요? 찾은 계정이 있기는 한데, 아무런 업로드가 없어서…”
“SNS는 안 합니다. 제 성격이랑 좀 안 맞더라고요.”
“아… 그런가요?”
나의 대답에 고다연이 살짝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내 연락처를 기반으로 나의 SNS를 찾아본 모양이다.
계정 자체가 있기는 했다.
전에 백하민이 내게 한 욕설을 캡처하기 위해 급하게 가입했으니까.
‘그 이후에 전부 지워버렸지만.’
백하민 때 SNS에 투자한 시간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한평생 사용할 시간을 훌쩍 앞지르리라.
그러니 이제는 필요 없다.
너무 질려서 하고 싶은 생각조차 안 든다.
“굳이 SNS를 안 찾으셔도 돼요. 제 사진이 필요하시면 그냥 찍어서 드리겠습니다.”
“네,네에? 어,어떻…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고다연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했다.
그래도 용케 마지막 말을 떨지 않고 말하는 것에 성공했다.
정곡을 찔린 당황을 억누르고 평정을 찾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입가에 감도는 희미한 미소를 본 그녀의 얼굴이 점점 수치심에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읏… 그,그런게… 진짜 아닌… 데…”
“정말요?”
“…”
나름 숨기려고 한 모양이지만, 내게는 뻔하게 읽혔다.
마음이 가는 연인의 SNS를 찾으려는 이유가 뭐겠는가?
당연히 업로드된 사진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고다연의 입장에서 보면 불평등 할 만했다.
나는 언제든 그녀의 SNS를 보며 색다른 얼굴을 구경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녀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댄스 크루 공식 너튜브에 올라온 내 영상이 올라온 지 2주가 훌쩍 넘었으니 슬슬 질릴 만 했다.
다른 사진도 가져보고 싶었겠지.
그렇다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할 용기나, 도촬할 수는 없으니 그녀가 할 행동은 간단하다.
내 SNS를 찾아보는 것.
“그래도 제가 사진을 보내드리고 싶으니 보낼게요. 나중에 문자로. 아, 이왕이면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주세요.”
“네엣?!… 그,그건 너무…”
“하하. 농담이에요.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잖아요? 저희 일단은 비밀 연애니까.”
“그렇죠. 네… 네에…”
고다연은 표정 연기를 비롯한 관계 조절에 능숙하다.
허나 여전히 연애에 대해서는 풋풋할 정도로 초보였다.
내가 살짝만 흔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면.
그것이 그녀가 가진 매력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