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해가 떠오르기 직전인 야심한 새벽.
복귀를 마친 대부분의 용병들은 베이스캠프에서 때늦은 단잠을 즐기고 있다.
만일을 대비한 몇몇 불침번만을 남겨둔 채.
불침번의 이목을 속이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용병이 도망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많은 용병단의 모임으로 그 대부분이 초면이다.
때문에 설령 탈주를 하더라도 본인들 알바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 목표가 지상이 아닌 더 깊은 미로라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절대 상상 못 하리라.
- …
발걸음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합금으로 만들어진 부목에 지구에서 가져온 담요를 씌워 둘렀기 때문이다.
마찰력이 사라진 밑창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한 균형 감각을 필요로 했지만,
내가 달리는 것에 별 어려움은 못되었다.
“후우…”
베이스캠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졌을 때쯤.
나는 활성화 시킨 ‘고요한 발자국’ 스킬을 해제했다.
또한 만일을 대비해 얼굴에 걸어 두었던 ‘디시빙(Deceiving)’ 역시 사용을 중지했다.
- 탁탁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오감이 강화되어 있는 새벽의 시간이 지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물론 감각 강화 버프가 사라진다고 못 찾는 건 아니지만…
약간 더 피곤해질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거대한 미로에 존재하는 주먹만 한 문양.
연금석과 비슷한 위장색으로 숨겨져 있으며,
그중 하나는 바닥을 포함한 네 개의 벽면 중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말로만 들으면 정말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허나, 생각보다 그리 막막하지는 않다.
‘내가 들어갔던 비밀 실험실도 그랬고… 원작 속 멜이 들어간 비밀 실험실 역시… 모두 중앙 실험실 근처에 있었어.’
‘생명의 씨앗’이라는 비약과 보물이 놓여 있던 그 방.
두 비밀 실험실은 그 근처에 있었다.
나와 멜이 통로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중앙 실험실이 발견되었고,
원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멜이 기연을 찾은 지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중앙 실험실을 찾은 것이다.
한번은 우연이되, 두 번은 우연이라고 넘어가긴 힘들었다.
세 비밀 실험실 모두 미로의 정답 근처에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것은 간단했다.
“중앙 실험실에 찾아간 뒤, 그 지점부터 역순으로 문양을 찾아야지…”
나는 수십 개의 통로 중 하얀 고래가 들어갔던 통로를 찾아 달렸다.
*
왼쪽과 오른쪽.
천장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빠지지 않고 눈이 흩는다.
하지만 찾는 건 보이지 않고, 짜증 나는 놈들만 눈에 밟혔다.
- 께륵— 끽—
아직 누구도 지나지 않은 통로기에 실험체들이 맞이했다.
그들이 나를 감지하기 직전인 아슬아슬 한 거리.
최대한 다친 발에 부담이 가지 않게끔 의식하면서, 벽에 붙은 실험체들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나를 감지 한 놈들이 뼛조각을 쏘아내기 위해 목을 뒤틀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주먹이 한 놈의 얼굴 뼈를 부수고 들어갔다.
- 콰드득!
두개골이 폭신한 커스터드처럼 뭉개어진다.
볼 것도 없는 즉사다.
남은 놈은 두 놈.
공격 준비를 마친 놈들은 이미 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흡!”
오른쪽 벽에 나란히 붙은 놈들의 사이로 도약한다.
뼛조각을 쏘아내기 직전인 두 놈의 목을 양손에 잡고, 악력만으로 으스러뜨리려고 했다.
마나를 잔뜩 머금어 강화된 강력한 근력.
어린애 같은 놈의 목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손안에서 뭉개졌다.
- 으드득… 그륽…! 긁…!
가래를 끓는 소리를 내며 두 놈이 바닥에 뒹군다.
우습게도 놈들은 아직 살아있다.
나는 마치 콩나물처럼 변형된 놈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으깨주었다.
뇌수가 튀지 않을 정도로 친절하게.
발로 밟는 것이 제일 깔끔하지만, 그래서야 다리에 부담이 가버린다.
나는 놈들의 시체를 하나도 빠짐없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왕이면 바닥에 흐르는 피까지 치우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냥 시체를 없애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목적은 주먹으로 뭉개졌다는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다.
용병들 중 둔기를 쓰는 이는 적으니까.
이 미로를 떠돈 사람이 나인 게 특정되지만 않으면 된다.
“이 통로는… 문양이 안 보이네.”
이 통로는 처음 찾기 시작한 통로.
뒤로 조금만 돌아가면 중앙 실험실이 있다.
첫술부터 배부르게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다음 갈림길을 찾기 위해 통로의 끝으로 향했다.
- 터벅. 터벅.
통로의 입구는 수십 개 있다.
어느 통로로 들어가든 갈림길만 잘 선택 한다면 중앙 실험실에 도착할 수 있다.
다만, 이지선다를 전부 한 번에 맞출 수 있는 확률이 말도 안 되게 낮을 뿐.
그만큼 이 미로는 거대했다.
하지만 나는 중앙 실험실의 도착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미 자넷이 만들어 둔 정답이 제시되어 있으니까.
모든 갈림길에는 횃불의 재를 묻혀 둔 흔적이 존재했다.
‘혹시 몰라 용병단과 함께 한번 지나온 길을 다시 봐도… 문양은 처음 발견한 그게 끝이었어.’
원작의 ‘문양은 오른쪽 벽에 새겨져 있었다.’라는 서술에 속아 오른쪽 벽만을 살펴보았다.
천장과 왼쪽 벽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바닥 역시 함정을 찾기 위해 대충 봤다.
그렇기에 나는 신중히 사방을 흩으며 중앙 실험소에 도착했다.
결국 새로 발견한 문양은 없었지만.
“…어디로 가지?”
출구를 향해 역으로 걸어가도 갈림길이 나를 반겼다.
왼쪽과 오른쪽.
- 터벅터벅.
고민은 길지 않았다.
왼쪽이다.
선택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고민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을 뿐이다.
내게는 자넷과 같은 특별한 감각이 없다.
육감이란 것도 생명이 위협될 정도의 위기가 아니면 뚜렷하게 발동되지 않았고.
그냥 좀 더 마음에 드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 께르륵—
통로 저 멀리.
봐도 봐도 새롭게 못생긴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꽤 많은 통로를 거쳐서 왔지만, 실험체가 없는 통로를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몇백 명이나 불로의 영약에 대한 실험에 희생 된 거야?…’
통로마다 서넛의 실험체라…
적어도 천을 넘을 거라는 결론이 도출되었을 때, 나는 약간 질렸다.
어째서 시스템이 연금술사를 설명할 때 ‘악랄하다.’라고 칭하는지 깨닫게 되는 기분이다.
*
내 손에 랜턴이나 횃불은 없었다.
용병단과 다닐 때와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두운 것이다.
어차피 빛이 있든 없든 시야의 넓이에 차이점은 없다.
그렇기에 광원을 들 이유 역시 없었다.
내 무기는 양손이니까.
빛 한점 없어도 수색에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희미한 빛조차 없이 완벽한 어둠이라면, 인간인 이상 앞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시력이 좋은 것과 관계없이, 시신경이 사물을 감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신선의 호흡법이 선사해 주는 강화는 단순히 눈이 좋아지는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어둠은 내 눈을 가리지 못한다.
그 증명은 내가 실시간으로 하고 있다.
원래라면 눈앞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깔린 어둠 속.
나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명암이 희미하게 차이 나는 색으로 새겨진 문양을.
“…왼쪽 벽.”
‘왼쪽’ 벽이라면 원작 속에 나온 그 문양일까?
두 눈으로 확인하면 된다.
혹여 액체 골렘과 같은 가디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가장 중요하게 보호해야 할 실험실조차 골렘은 휴면 상태에 빠져 있었어.’
멜이 건들고 나서야 가동을 시작했다.
그보다 중요도가 덜 한 장소에 골렘 이상의 위협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설령 골렘과 비슷한 가디언이 있다고 한들…
함부로 건들지 않고, 하나하나씩 상태창을 열어 살펴보면 된다.
- 툭. 후욱!
“…”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 문양을 손으로 만지자,
내 몸은 어느새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 [건물 정보 확인]
이름: 트리스 메기스투스의 비밀 실험실 #1
종류: 구조물
레벨: -
상세:
악랄하고 위대한 연금술사 트리스 메기스투스.
그가 자신의 거주지에 만든 3개의 비밀 실험실 중 첫 번째 실험실입니다.
책과 책장이 들어차 있던 흔적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있던 자료는 어딘가로 이동된 모양입니다.
* 미로에 비밀스럽게 새겨진 글귀에 물리력을 가하면 입장 가능합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실험실 내부에 있는 글귀에 물리력을 가하면 퇴장 가능합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세 번째 비밀 실험실에 비하면 첫 번째는 약간 넓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대략적인 넓이는 비슷했다.
이 비밀 실험실은 텅 비었기에 착각했다.
빼곡한 책장과 칠흑색 관, 바닥을 가득 메운 마법진이 사라진 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 것이다.
“다른 가구도 없고… 여기까진 원작과 같아.”
방 안에 유일하게 있는 것은 정 가운데에 존재하는 저 투박한 상자뿐.
그 이외에는 먼지밖에 없었다.
위장을 하고 있는 가디언은 없는 것이다.
- 띠링!
“상자도… 함정은 아니네.”
자넷과 함께 발견 한 상자와 비교할 수 없이 투박한 상자다.
어디 항구 도시의 구석에나 놓여있을 법한 매우 실용적인 디자인.
원작의 묘사와 들어맞았다.
- 끼이익… 덜컹.
상자의 위쪽에 쌓인 먼지가 흩날린다.
나는 가볍게 그 먼지를 손으로 저으며 안쪽에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유적의 주인이 연금술사라고 하려는 걸까?
지금껏 마주한 기연은 모두 하나같이 액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비약의 경우 진한 붉은색.
그런데…
“비주얼이 왜 이렇게…”
유리병 내부에 거품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탄산의 그것과는 다르다.
마치 용암이 끓어오르듯 끈적하고 질척대는 기포를 뿜어내고 있다.
전분과 빨간색 색소를 잔뜩 넣은 토마토 스프를 보는 것 같다.
한마디로 먹는 순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생겼다.
‘도대체 멜은 이걸 무슨 정신으로 마실 생각을 한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이 어두운 방은 빛 한점 없다.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멜이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절박한 심정으로 마신 것이다.
이 위험한 빛깔을 보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 띠링!
“…역시 그냥 확인해서는 안되네.”
상태창을 열어 보아도 생명의 씨앗 때와 마찬가지다.
중요한 부분이 검열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자세한 효과를 모른 채 먹을 수는 없다.
내 입으로 들어갈 물건이니까.
괜히 다리에 두를 담요를 가지러 지구에 갔을 때 농땡이 피운 것이 아니다.
지금을 대비하여 쿨타임을 지구에서 벌어 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을 사용했다.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이름: 진조의 혈정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스킬, 혈귀(血鬼)화 획득. 암시 획득.
상세:
불사의 비약에 대한 연구 중.
불로종인 흡혈귀에게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된 비약입니다.
목적으로 하던 불사의 비약의 제작은 실패했습니다.
단순히 실험 도중 파생된 비약이지만, 큰 가치를 지녔다는 건 변함 없습니다.
어둠을 꿰뚫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스킬, 혈귀(血鬼)화를 얻게 됩니다.
* 추가 정보
[혈귀(血鬼)화]
몸속에 잠든 진조(眞祖)의 피를 일깨웁니다.
상처 재생 (中)
스테미나 재생 (中)
스텟 버프 +25%
사용 및 유지 시 필요로 하는 자원은 없습니다.
유지 시간 동안 동공이 붉은색으로 물듭니다.
‘혈귀화’는 해가 저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부작용]
▷ 섭취 시 짧은 시간 동안 몸에 열이 오릅니다. (상태이상 - 미열)
▷ 흡혈귀가 아닌 이가 ‘혈귀화’를 사용할 경우, 점점 거대한 부담이 가해집니다. 최후에는 몸이 완전히 붕괴 됩니다. (상태이상 - 사망)
▷ ‘혈귀화’에는 중독 증세가 있습니다.
* 세계관 귀속 아이템입니다. 상점창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제작자 - 트리스 메기스투스
=
“암시까지 제대로 달려 있고… 효과도 원작이랑 완전히 같네.”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 비밀 실험실이 원작 속 멜이 찾은 곳이 맞다.
내가 모르는 큰 부작용도 없다.
망설일 것이 뭐 있나?
나는 뚜껑을 열고 단번에 비약을 들이켰다.
- 꿀꺽.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스킬을 획득했다는 시스템 메세지와 함께.
그리고……
나를 유혹하는 목소리 한줄기가 아련히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