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자넷은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금전에 눈이 돌아가 사건의 경중을 가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분명 원작 속 자넷도 이 보물들을 빼돌릴 수 있었어.’
그녀에게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가 있다.
그럼에도 원작 속 자넷은 끝까지 그 아티팩트를 타인의 눈앞에 내보이지 않았다.
이 수많은 보물을 포기하고.
이건 자넷의 가치관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이다.
그녀 나름대로 어디까지 욕심을 부릴지 기준점을 세워 두었다는 뜻이니까.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자넷의 허리까지 오는 작은 언덕.
언덕의 크기는 과장을 보태도 크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잡동사니가 아닌, 그 대부분이 보석과 황금으로 이루어진 만큼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녔으리라.
언덕의 대부분을 이루는 금화.
현실에서 가져와 팔기 좋아 보이는 금괴.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술잔.
금화 사이에 파묻힌 반지와 목걸이까지.
그 모두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손을 댄 흔적이 있네요. 아마 왕실 연금술사가 쓰다가 남은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 그럼 도대체 원래 이 방에 얼마나 많은 양의 보물이 있었단 거야?”
작고 희미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지상의 시간은 밤이다.
스킬로 증폭된 나의 예리한 시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바닥에 먼지가 쌓이지 않은 공간이 많아.’
저 자리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증거다.
가령 황금의 언덕 같은.
이 값비싼 언덕은 절대 한 개가 아니었으리라.
- 터벅터벅.
솔직히 저 금덩어리가 탐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허언이다.
바닥을 뒹구는 금괴 한 개만 지구로 가져가도 차를 몇 대나 뽑을 테니까.
허나 지금 당장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저런 재화가 아니었다.
방 중앙에 놓인 작은 궤짝.
상자 자체만으로 수집할 가치가 있을 만큼 휘황찬란한 저 궤짝 안의 내용이 궁금했다.
“눈에 띄는 궤짝이네요. 한번 열어보겠습니다.”
“어라? 야! 파계승! 그런 중요해 보이는 상자에는 보통 함정이…”
- 덜컹! 끼이익…
“없네요. 함정.”
“…”
나는 자넷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는 내용물로 시선을 돌렸다.
부드러운 천이 몇십 겹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무언가를 고정하기 위한 틀이 보인다.
틀로 만들어진 소켓은 총 세 개.
하지만 두 개는 빈자리였다.
- 달칵.
“…뭐가 들어 있어?”
“물약입니다. 초록색 빛을 띠는.”
나는 자넷에게 유리로 만들어진 약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상자 안에는 이 하나의 물약만이 존재했다.
원래는 3개가 있으리라 짐작되었지만…
연구를 위해서인지, 두 개는 왕실 연금술사가 가져갔나 보다.
“초록색?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여기까지는 원작의 흐름과 같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이 물약의 효과가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전에 연중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물약의 정체가 궁금했다.
“한번 제가 감정 해보겠습니다.”
“아. 부탁할게.”
-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생명의 씨앗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 억제
상세:
■■■ ■■에 대한 연구 중.
■■■인 엘프에게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된 비약입니다.
목적으로 하던 ■■■ ■■의 제작은 실패했습니다.
단순히 실험 도중 파생된 비약이지만, 큰 가치를 지녔다는 건 변함 없습니다.
■■를 일부 억제합니다.
하지만 ■■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서서히 진행되던 ■■가 늦추어질 뿐,
때가 되면 ■■가 한 번에 진행 됩니다.
마치 엘프처럼.
* 세계관 귀속 아이템입니다. 상점창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내용은 검열이 심했다.
하지만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을 쓰면 전부 확인이 가능하리라.
문제는…
함정을 빠져나오며 뼛가루에 사용해, 현재 쿨타임이란 것이다.
“음… 효과를 잘 모르겠네요.”
나는 지구에서 쿨타임을 벌고 다시 오기보다는 그냥 모르는 척을 하기로 했다.
높은 레벨의 기능 해금을 필요로 하는 비약이다.
게다가 대놓고 가치가 높다고 적혀 있기도 하고.
자세한 효과는 모르지만,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것 없다.
이 비약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기연이니.
만일 이게 귀한 것이란 게 밝혀지면…
내가 가지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상세한 값어치를 다른 이들이 알게 하면 안 된다.
적어도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는.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이런 멋들어진 궤짝 안에 들어있던 놈인데, 가치가 높을 것 같네.”
“초록색 물약. 들어본 적 없으신가요?”
“몰라. 이런 물약은 연금술사에게 감정을 의뢰하면 돼.”
“연금술사는 몸값이 높지 않나요?”
“보통이라면 나도 이런 돈 지랄을 안 하는데, 이놈은 좀 귀해 보이잖아?”
크게 걱정할 것 없다.
원작대로라면 연금술사가 이 물약의 효과를 알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오래된 인물이라고 하지만, 무려 불사의 비약을 만들어 낸 연금술사가 제작한 물약인데…
보통의 연금술사는 전혀 알아내지 못하리라.
“일단 챙기죠. 아, 그러고 보면… 그… 빼돌리는 건 어디까지 할까요?”
공간 확장 주머니는 자넷이 숨겨 둔 한 수다.
그걸 모든 단원의 앞에서 밝히기 싫어할 만 했다.
그러나 크리스의 능력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자넷의 경우와 다르게, 쓰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미 보물을 발견할 경우 빼돌리기로 입을 맞춰놓았다.
무려 왕실을 상대로 하는 사기극인 만큼 긴장될 법 하지만,
사실 그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나와 크리스는 상황이 얼마나 어렵게 돌아가든 어렵지 않게 몸을 빼낼 자신이 있었다.
질문을 들은 자넷이 작게 고민했다.
그녀의 눈이 황금 언덕으로 향한다.
“…크리스가 가진 그 아티팩트는 물건을 얼마나 더 넣을 수 있어?”
“크리스?”
나는 크리스를 쳐다보며 대답을 하길 기다렸다.
아무리 나라도 그녀의 아공간 내용물까지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 있는 것 전부 넣을 수 있을 만큼 남아있어.”
“허. 네가 가진 아티팩트, 꽤 넓네?”
“좋은 거라서.”
- 으쓱.
크리스의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나 보다.
자넷의 얼굴에 명백하게 신남이 자리 잡는다.
“그럼 어느 정도가 적당하려나아? 파계승. 넌 어떻게 생각해?”
이미 결론을 정해 두고 물어보는 표정이다.
자넷이 가끔 하는 시험 비슷한 장난이다.
내가 제대로 그녀의 금전감각을 배우고 있는지 보기 위한.
그리고 나는 정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전부 빼돌려야 합니다.”
“으에? 차,찬영님?”
“찬영? 이걸 전부?…”
나를 부축하던 크리스와 멜이 당황한다.
그와 반대로 자넷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눈치가 아니다.
저건 정답을 맞힐 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오오? 전부? 이 많은걸? 욕심도 크셔라. 왜 그렇게 생각했대?”
자넷의 과장 된 반응에서 내가 말한 것이 정답이 맞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전이라면 나는 분명 어중간한 수치를 말했을 것이다.
상대는 무려 왕실이고, 너무 많이 먹으려 들면 꼬리가 밟히리란 생각이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건 전부 먹어치워야 탈이 없는 놈이다.
“어중간하게 빼돌리면 오히려 냄새를 맡을 것입니다. 이 넓고 위험한 유적에, 나온 금화가 고작 몇 줌이라면요.”
사실 이 보물 전부를 가져다 바쳐도 의심의 눈을 살 것이다.
꽤 많은 양이기는 하지만, 이 유적이 보통 방대해야지.
대놓고 그리 보지는 않겠지만…
툭툭 건드는 말투를 듣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물며 발견된 보물이 절반이라면?
절대 의심을 피할 수 없다.
분명 몸수색을 받을 것이다.
아티팩트따윈 없으니 크리스가 들키지는 않겠지만, 자넷의 주머니가 발견돼 골치 아파질 수 있다.
거기에는 이 보물과 비견되는 거대한 자금이 들어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10% 정도만 훔치는 것도 위험 부담과 비교하면 수지가 맞지 않다.
50여 명이어서 나누면 얼마 안 될 것이다.
고작 며칠 일당을 받겠다고 왕실과 척을 지는 건 불편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하하! 과연. 그리고? 더 있어?”
“네. 이 통로를 지나쳐 오며 한 티끌의 금화도 발견 못 했습니다. 그건… ‘유적에 재화는 전혀 없었다.’라는 거짓말을 하기 딱 좋은 상황이죠.”
“오오! 정답!”
“뭐… 다른 용병단은 발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률이 너무나 희미하네요.”
정답을 여러 개 만들어 두는 미로라니,
그만큼 목적을 상실한 것도 없다.
게다가 이런 보물의 산이 여럿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아니, 이 유적의 주인을 생각해 보면 그리 없을 만한 건 아닌가?
‘일단 원작에는 다른 장소가 발견되지는 않았어.’
미로의 정답은 이곳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더 있다면, 자넷의 특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그녀가 다른 곳을 돌아보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낌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자넷의 특성은 금전적인 이득이 있는 곳만을 알려준다.
그러나 금전적인 이득이 없는 장소라면,
추후에 발견되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차피 그 장소에 보물은 없을 텐데.
결과적으로 ‘이 유적에 보물은 없다’라는 거짓말은 절대 들키지 않는 것이다.
“킥킥.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아주 잘 가르쳤어. 이전에 그 세상 물정 모르던 놈이 아니야. 그치?”
“설마 단장님의 덕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럼? 누구 덕인데? 내 덕 맞잖아?”
“아… 네…”
그리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자넷에게 배운 것도 꽤 많으니까.
하지만 본인 입으로 본인을 저리 띄우니 좀…
한심해 보이긴 하다.
“…그럼 크리스. 부탁할게.”
“으응…”
크리스가 ‘이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보물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모든 하얀 고래 단원이 지켜보았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왕실에 밀고한다면 골치 아파지겠지만…
그럴 걱정은 거의 들지 않았다.
단장인 자넷을 닮아 하얀 고래 대부분은 돈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밀고를 한 사람에게는 큰 보상을 주지 않냐고?
아니, 절대 아니다.
망해가는 왕국의 부패한 귀족.
아무리 생각해도 보물을 전부 차지한 다음, ‘죄를 고발한 대가로 처벌에서 면책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끝이리라.
당연히 손에 떨어지는 금화는 몇 개가 끝일 것이다.
이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제 몫을 챙기는 것보다 더 적은 금액이다.
내부 고발을 하면 대우받으리라는 믿음 자체가 잘못되었다.
귀족보다 훨씬 신뢰가 가는 동료가 있는데 도대체 왜?
적어도 우리 중 귀족을 믿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뭐… 정 아니꼬우면 왕국을 뜨면 그만이고.’
철사자, 하늘 산맥과 다르게 하얀 고래는 정해진 거점이 없다.
큰 원정에는 제국까지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작 속 멜이 하얀 고래에 들어오길 희망했다.
왕국에 한정된 것이 아닌,
전 세계를 떠돌아다닐 수 있는 큰 기회니까.
물론 완전히 이민을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 언어가 좀 걸림돌이 되겠지만…
애초에 왕국과 제국의 언어는 큰 차이가 없다.
처음 창제된 ‘훈민정음’과 현대에 개정된 ‘한글’,
후기 근대 영어(Early Modern English)와 현대 영어(Modern English)의 차이점 수준이다.
눌러앉아서 익히게 되면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까지는 쉽게 배운다.
‘글을 모르는 자넷도 제국어를 떠듬떠듬할 수 있을 정도이니.’
드디어 기나긴 유적의 탐사가 끝을 보인다.
우리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며, 챙길 수 있는 실험체의 시체는 모조리 챙겨 들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나와 나를 부축 한 크리스를 제외하고 한 사람당 서너 구를 들었지만, 그것으로도 전부 챙기지는 못했다.
그만큼 전투가 잦았다는 뜻이다.
돌아가는 길은 전투가 없었다.
함정 역시 전부 파악해 둔 터라 큰 위협도 없었다.
귀환이 무척이나 빠르게 이루어진 이유다.
“…뭐라? 미로를 헤매던 중 특수한 방을 발견한 것 같다고?”
“네. 하지만 방 내부에 값어치 있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여기 그 방 안에 있던 책입니다.”
“흐음… 진짜군. 처음 보는 글자야… 보물이 없다는 소식은 좀 골치 아프구먼. 후…”
기사는 막사로 들어가 서신을 한 장 쓰더니,
잘 마감된 편지를 자신의 종자에게 건넸다.
종자는 기사의 명을 듣고 유적의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왕실이겠지.
좀 더 자세한 정황이 밝혀지면 공식적으로 탐사가 종료될 날도 머지않았다.
단원들 역시 밝은 얼굴로 며칠 뒤 있을 휴식을 기대했다.
허나…
나의 볼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다리를 걱정하는 크리스와 멜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들 잠이 든 틈을 타 홀로 유적을 뒤질 것이다.
아직 찾아야 할 비밀 실험실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닌 기연.
왕실에서 사실 확인을 위해 유적에 들어오면 운신에 제약이 생긴다.
그 이전에 어서 미로를 뒤져야 한다.
‘가능하면 오늘 안에 찾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