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당연히 멜에게 이런 거짓말을 한다고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야 멜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은 것이 되니까.
이건 오로지 내 마음대로 저지른 거짓말이어야 한다.
멜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려면.
“멜씨! 저,정말 감사해요! 자세한 전말은 모르지만, 찬영을 구해 주셔서…”
지구에서 이미 한번 들어 그렇게 알고 있는 크리스는 멜을 향해 감사가 담긴 미소를 보내었다.
그 목소리에는 소량의 호의가 섞여 있었다.
다행히 내 거짓말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는 모양이다.
“아니, 아니에요! 저는 절대…! 으읍! 읍!”
- 꼬집.
사실을 말하려던 멜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상냥히 꼬집었다.
멜의 고개가 나를 향한다.
나는 당황스런 눈을 하는 그녀를 향해 작게 눈웃음을 보내주었다.
이 행동으로 멜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내가 한 거짓말은 잘못 말한 것이 아닌 의도 된 것이라고.
“네? 멜씨?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가요?”
“아. 함정에 빠졌을 때. 서로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줬거든. 그래서 퉁 치기로 했지.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상쇄된 걸로 하자고.”
“남자들의 우정… 같은 거야?”
“하하. 비슷하네.”
나는 멜의 입술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 크리스를 향해 대답했다.
입술을 살살 잡았음에도 멜의 입에서 말이 나올 기미는 잘 보이지 않았다.
상황에 대한 의문으로 내 의도를 살피는 것에 바쁜 듯하다.
“그래서 목숨을 구한 건 둘 다 잊기로 약속했는데… 어쩌다 보니 어겨버렸네.”
“아하. 그래서 멜씨가 찬영의 말이 틀리다고 하신 거구나.”
“그렇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말하는 것에 낯간지러움을 느끼나 봐.”
- 스윽.
잡고 있던 부드러운 입술에서 손을 떼었다.
나는 멍하니 나를 보는 멜의 머리를 살짝 쓸며 말했다.
“찬영님… 설마…”
그녀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온다.
슬슬 멜도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죽여도 이 정도의 거리라면 크리스도 전부 들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들어도 유추가 불가능할 수준으로
“…이건 네 의견도 듣지 않고 내가 벌인 일이니, 네가 마음 쓸 필요는 없어.”
“하,하지만 이런 건…!”
“멜. 잊지 마. 함정에서 우리가 했던 ‘약속’.”
“…”
더듬거리던 멜의 입이 조용히 다물어진다.
내 의견을 반박하지 않고 수용하기.
나와 멜이 나눈 약속이다.
허나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크리스를 속이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 농도를 상당 부분 덜 수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오는 당황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
나는 눈짓으로 멜에게 그리 말했다.
“찬영이랑 멜씨, 둘이 엄청 친해 보인다.”
“함정 속에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겪은 일이 좀 특별했잖아? 유대감이 쌓일 만 하지. 그치 멜?”
“네? 네,네에…”
“음… 생각해 보니 그런가? 그런데 찬영… 그 다리… 얼마나 다친 거야…? 많이… 안 좋아?…”
드디어 다가온 질문에 멜의 작은 몸이 조용히 굳었다.
다행히 크리스의 이목은 오롯이 내게 집중되어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실제로 그녀는 내 다리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설령 지구의 육체는 멀쩡하더라도, 크리스의 눈에는 진짜 나의 다리와 다를 바 없나보다.
지구에서도 끈질기게 상세한 상태를 물어온 그녀다.
하지만 내가 살짝 얼버무렸다.
‘이런 건 텀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하는 게 좋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잘 모르겠어. 상처를 입었을 당시에는 꽤… 심각했거든. 일단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고. 나머지는 기도하는 수밖에.”
새까맣게 변색 되었던 종아리.
그 소름 끼치는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하겠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악화 되었어도 어쩌면 내 다리는 괴사를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마나 각성자의 재생 능력과 포션, 특성까지.
그린 얌은 큰 의미가 있나 싶지만…
아무튼 나는 회복과 관련된 많은 패를 보유하고 있다.
어쩌면, 정말 잘하면 후유증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겠지만.
“…찬영이 그리 말할 정도면… 상당히, 심각… 한 거네.”
크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격렬한 전투는 못 할 것이다.
좀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크리스에게 무력을 기댈 것이다.
뼈가 붙을 때까지를 한정으로.
“괜찮아. 찬영. 분명 잘 완치될 거야!…”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 걱정을 끼치기보다는,
역으로 격려하며 북돋아 주었다.
“그래.”
나는 크리스의 말에 부드럽게 웃으며 동의해 주었다.
사실 내심은 완치를 기대하지 않는 것과 별개다.
그녀가 내게 그러했듯, 나도 크리스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내 다리가 이러다 보니까… 생활에 불편한 게 있을 것 같아서.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말이라고 해? 당연히 도와줘야지!…”
“큭큭. 그래도 크리스 너 혼자서 나를 돕기는 힘들겠지? 너도 휴식 시간은 있어야 할 테고.”
“응? 별로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다리가 어느 정도 나을 동안은 멜이 나를 도와주기로 했어. 둘이 돌아가면서 부축을 부탁할게.”
냉정히 생각해 보아도, 이 다리로는 한동안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힘겨울 것이다.
그럼에도 고집을 부리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생각은 없다.
크리스와 멜에게 기댈 것이다.
그녀들이 곤란할 때면 내게 부담 하나 갖지 않고 기댈 수 있도록.
“멜씨. 오시면서 계속 찬영을 부축해 주셨죠?”
“예? 네… 마,맞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한동안은 제가 부축할게요. 나중에 찬영을 잘 부탁드려요.”
“아뇨! 그, 그… 다리도 따지고 보면…”
“멜. 약속.”
“읏… 그…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베넷씨…”
“약속? 약속이라면 찬영이랑 멜이 했다는 그 빚을 퉁치는 것 말하는 거지?”
나는 크리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거짓말을 했음에서 오는 죄책감은 없었다.
이건 선의의 거짓말이다.
결과적으로 행복에 모두가 함께 다가서기 위한.
크리스가 내 다친 다리의 방향에 섰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자넷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 저벅. 저벅.
“조심… 천천히…”
“크리스? 그리 세공품 다루듯이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다친 지 얼마 안 된 상처잖아? 이런 건 초기에 제일 조심 해야 해.”
“…맞는 말이네.”
부목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끔 닫아 둔 통각을 열어보며 특이사항이 없는지 체크만 했다.
만약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가 곪거나 악화 되면 큰일 나니까.
아직도 꽤나 고통이 몰려들어 왔지만, 골렘과 싸울 때처럼 눈앞을 흐리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고통이 느껴진다는 사실은 호재다.
일단 괴사와는 한걸음 멀어졌다는 뜻이니까.
- 저벅. 저벅.
“…진짜 파계승이 맞네. 명도 질겨라…”
“큭큭. 오랜만에 재회인데 보시자마자 악담이네요.”
“오랜만은 무슨. 하루의 반도 안 지났다.”
“그러네요. 너무 다사다난한 하루라.”
나의 시간 감각으로는 자넷과 며칠 만에 만나는 것이다.
지구에서 보낸 시간이 꽤 되니까.
허나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겠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감흥이 상당히 새로웠기에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피곤… 할 만했지.”
자넷이 내 다리를 보고는 말을 흘렸다.
그녀의 갈색 동공이 우리를 천천히 흩어 가면서 확인한다.
크리스에게 몸의 절반을 완전히 기댄 나.
걱정의 색이 짙은 크리스의 얼굴.
절대 밝다고 말 못 할 멜의 표정.
미간이 좁혀진 것이, 내 상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듯하다.
“롬. 대기하느라 수고했어.”
“아뇨, 단장님. 쉬기만 한 걸요.”
“알면 됐네. 그런데…”
- 스윽…
자넷이 롬의 귀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귓속말을 하려는 모양새다.
내 앞에서 대놓고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들린다.
- 소근소근…
“파계승 쟤. 많이 심각하대?…”
“어… 저도 잘 모르는데… 분위기를 보니 가벼운 상처는 아닌 것 같아요.”
“역시 그렇지? 후…”
자넷의 얼굴에 고민이 잠긴다.
무엇을 저리 고민하고 있을까?
머리를 굴려본다면…
한 가지가 있다.
‘설마 당장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고 나를 방출 할 생각인가?’
내게 주어진 정보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다.
하지만 내심 이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 따져 볼수록 날 방출하면 막대한 손해란 결론에 닿는다.
물론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 가정사에 아픈 기억이 있는 괴짜.
돈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수전노.
딱 이 정도다.
돈을 좋아하다 못해 섬기는 수준이지만, 그런 언행에 비해 동료에게는 돈을 떼먹으려 들지는 않았다.
나름 자기 사람을 아낀다는 뜻인데…
날 방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세상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더 소수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귓속말을 그리 대놓고 하십니까? 제 이야긴가요?”
“됐어. 새끼야. 그냥 네 뒷담 한 거야. 신경 꺼.”
“허…”
자넷이 이상한 생각을 품기 전에 변명을 해야 했다.
나의 유능함을 살짝 어필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후유증이 남더라도 내가 가진 능력이 전부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력도 약간 빛이 바랠 뿐.
부목을 댄 상태로도 하얀 고래 전원을 개인전으로 이겨낼 자신이 있다.
물론 상처가 악화 되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을 전제했을 때만.
‘날 쳐내면 네게 큰 손실이다. 자넷. 잘 생각해.’
실질적으로 당장 무력을 쓸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용병단을 나가게 되면 크리스도 함께 나갈 것이다.
크리스는 이능력을 안 쓰더라도 하얀 고래 내부에서 상위권에 위치한 강자.
그런 인재를 잃는 것은 명백한 손해다.
게다가 나도 쓸모없지만은 않다.
적당히 내가 가진 감정사의 능력이나, 방대한 지식을 다시 되새겨 주면 되겠지.
그리 판단하고 자넷에게 말을 꺼내려던 그때.
나보다 자넷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봐 파계승. 잠깐 와봐.”
“예?”
“씁! 오라면 오라고.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니… 근데 저 다리가 이래서 혼자서는 제대로 못갑니다.”
“…에이 씹. 내가 부축해 줄게.”
자넷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어깨를 짚는다.
그리고 나를 부축하고 있던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크리스? 좀 빌린다?”
“…마음대로.”
“좋아. 허락도 받았으니 가자고.”
- 스윽!
나와 자넷이 볼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것을 본 크리스의 눈썹이 작게 씰룩였다.
하지만 막아서지는 않았다.
여전히 ‘과하게 집착하면 정떨어진다’라는 말을 신경 쓰고 있는 눈치다.
그 말을 직접 들은 자넷의 앞에서는 더더욱.
- 저벅저벅.
“읏, 킁킁… 어라…?”
“네?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너 몸에서 뭔가 향기로운 냄새가 나서. 동양인은 다 그래?”
아무래도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보니 내 몸의 냄새까지 느껴졌나 보다.
당연히 자넷이 맡은 것은 바디워시와 샴푸 같은 인공 향료의 냄새다.
“단장님은… 의외로 대담하시네요? 그런 이야기도 하고.”
“…어? 이거 부끄러운 짓이냐?”
“음… 상대의 체취를 맡는 건 거의 연인끼리 하니까요? 가족끼리도 잘 안 하죠 보통.”
“윽! 그,그러냐?”
자넷이 작게 당황했다.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투다.
이 돈 귀신도 수치를 느끼긴 하는구나…
그녀의 얼굴에 작게 열이 올랐다.
바로 옆에 있어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크,크흠!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아뇨. 저는 칭찬을 꼬아 듣는 사람은 아니라서.”
“…치,칭찬…?”
“설마 아니었나요?”
“아! 맞아! 칭찬!”
- 저벅저벅.
우리는 용병단과 약간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간의 잡담과 함께.
목적지는 우리의 대화가 저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곳이다.
그렇게 적당히 거리를 벌렸을 때.
본론이 시작되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리 어두운 곳까지 데리고 오셨나요? 전 이미 연인이 있는데요.”
“…재미없는 농담은 치우고. 심각한 이야기야. 너… 그 다리. 많이 안 좋아?”
“사실대로요?”
“어.”
“높은 확률로, 후유증이 남을 것 같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기기 힘들고, 설령 솔직히 이야기하더라도 내게는 많은 장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넷은 절대 나를 방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신감이 내게는 있었다.
“…그런가.”
“크리스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이제 자넷의 판단을 들으면 된다.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넷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넷은 말없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1분. 2분. 3분.
짧다면 짧은 시간 속 고민을 하던 자넷이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 슥.
자넷이 자신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드러낸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게 건네었다.
“…받아.”
- 턱.
“이건…?”
나는 손안에 물건을 보았다.
유리병의 모양은 달랐지만, 그 내용물은 어디선가 본듯한 붉은 빛을 띠는 액체.
바로…
하급 포션이었다.
‘이걸 자넷이 가지고 있었다고?… 왜? 분명 원작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