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 하아암…
하얀 고래의 평단원 롬.
그는 크게 하품을 하며 지루함을 달랬다.
일하지 않고도 받는 돈은 좋았지만, 심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손에 들린 기름 랜턴을 제외하더라도 광원은 많았다.
그가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통로 전체에 랜턴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어둠에 먹혔던 통로는 끝까지 밝혀져 있었다.
덕분에 롬이 확보 가능한 시야는 실험체의 사거리를 훌쩍 상회했다.
‘기습당할 걱정은 없다… 이 말이지.’
원거리 공격을 하는 적들이지만, 어둠 속에 숨지 못하면 롬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
비싼 값을 주고 구입 한 비늘 가죽 방패는 그 값어치를 해낼 것이다.
화살은 물론 쇠뇌까지 막아내는 성능을 지녔다.
하물며 별로 빠르지도 않은 뼛조각이라면?
고작해야 낼 수 있는 것은 흠집이리라.
롬의 실력이라면 상대가 몇 명이든 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홀로 남은 것이다.
어디까지나 통로가 빛으로 채워져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젠장… 벌레 움직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네.”
도를 넘은 고요함에 피부를 간질이는 소름이 타고 올라온다.
롬은 의도적으로 입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주변에 깔린 적막을 조금이라도 걷어 내기 위해.
허나 작은 소리는 기다란 통로를 타고 가다 금방 사그라지고 말았다.
- …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한 명의 용병으로써 겁은 먹지 않았지만,
전혀 겪은 적 없는 이질적인 분위기에 오한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롬은 심각할 정도로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이 장소에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나타날 확률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장과 찬영의 연인은 롬을 이곳에 대기 시켰지만,
정작 롬은 찬영과 멜이 사라진 자리에 그들이 다시 나타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으레 함정이란 침입자들을 죽이기 위해 설계되어 있으니까.
- 퉷.
‘…몇 번을 겪어도 기분 더러운 일이야.’
동료의 죽음은 흔했다.
하지만 여전히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이번 유적 탐사의 희생자가 그 둘이기에 더더욱.
멜은 죽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여자를 꽤나 울리게 생긴 주제에 숙맥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나름 열심히 제 몫을 하려 노력하는 것도 좋게 보였다.
찬영은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이 고루 친하게 지냈다.
또한 그에게 도움 하나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단원 전체가 우울한 분위기인 것은…
연인을 잃은 크리스 베넷의 눈가에 맺힌 눈물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들 공통된 마음으로 찬영을 걱정했다.
당연히 찬영과 친한 것은 롬 역시 마찬가지였다.
- 후우…
“…멜 자식 그렇고, 찬영 그 친구… 진짜 괜찮은 놈이었는데. 살아 있었으면 좋겠네.”
“저 부르셨습니까? 롬씨?”
“으아악!! 씨이팔! 뭐야!!”
- 쨍그랑! 화르륵!
롬은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랜턴을 떨어뜨렸다.
유리가 깨지고 기름이 흘러나오며 바닥을 불태웠다.
싸구려 기름인지라 화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피부 정도는 충분히 태울 만했다.
- 채앵! 휘익!!
하지만 롬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매단 칼집에서 검을 뽑아 휘두른다.
자신의 뒤에 선 적이라 추정되는 누군가를 향해.
- 터억. 후욱…!
“으어억?!”
“진정하세요, 롬씨. 저입니다. 박찬영.”
허나 롬의 칼질은 가볍게 제압당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바닥에 퍼진 작은 불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
스스로의 강함을 잘 알고 있는 롬으로서는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말이 걸린 것보다 자신이 간단히 무력화된 것이 훨씬 놀라웠다.
“무…슨… 어? 너,너 살아 있었냐?…”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롬을 반겼다.
전혀 상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 …척.
롬은 우선 칼부터 거둬 자신의 검집에 넣었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에게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크게 다칠 뻔한 것이다.
롬은 미안한 얼굴로 찬영에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갑자기 뒤에서 불러 죄송했죠. 아, 멜도 있어요. 제 뒤에.”
찬영의 말대로였다.
그의 등에 가려진 뒤쪽을 보자 흰색 머리의 남자애가 보였다.
순백색의 머리카락에 먼지와 피딱지가 달라붙어 있었지만, 확실했다.
멜이 맞다.
하지만 약간 이상한 언행을 보였다.
평소의 밝고 앞으로 나서길 좋아하는 녀석답지 않게, 아무 말 없이 찬영의 뒤에 숨어 옷자락만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어째선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뭐지?’
그 모습에서 무의식적으로 여성스러움을 느꼈지만,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이 안 좋을 뿐인 것으로 치부하며 잡념을 털어내었다.
롬은 그리 날카로운 성격의 사내는 아니었다.
“둘 다 무사한 거야?”
“음… 애매하네요. 저랑 멜 모두 엉망진창이라…”
찬영은 붕대가 감긴 멜의 오른팔을 돌아보며 말했다.
걱정이 담긴 눈빛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팔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멜의 팔보다 훨씬 많이.
역시 성직자는 성직자.
자신이 상처가 더 큰데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다니…
롬은 그의 올바른 심성에 내심 감탄했다.
“멜 쟤는 얼굴이 왜 붉냐? 뭐 아픈 곳이라도 있대?”
“아. 원래 부상을 당하면 끙끙 앓잖아요? 아마 그런 걸 겁니다.”
“…그 문양은 역시 함정이 맞았나 보네. 둘 다 고생했다.”
두 명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그 붕대가 너무 새것같이 보였지만,
역시 롬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 카각!
“어라? 방금 무슨 소리야?”
금속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가 아래로부터 들린다.
마치 칼끝으로 바닥을 긁는 소리와 비슷했다.
롬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고,
찬영의 다리에 생긴 특이이상을 발견했다.
“너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지금은 임시로 부목을 대었고요.”
“허… 괘,괜찮냐?”
“네. 멜이 지금 절 부축해주고 있어서 움직일 수도 있고요.”
롬은 그제야 멜이 찬영을 잡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전혀 그리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찬영을 부축해주고 있는 모양인가보다.
“다들 어디 가셨습니까?”
“아. 먼저 출발했어. 먼저 떠난 것에 섭섭해도 이해해라. 일단 의뢰금은 받아버렸으니…”
찬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전혀 섭섭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하얀 고래의 입장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롬은 역시 생각이 깊고, 인간 친화적인 성격을 가진 그 답다고 생각했다.
“참…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둘 모두 목숨을 붙여 빠져나오다니…”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어… 어… 사실,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하기로 할 지 이야기가 안 되어 있거든. 정말로 나올 줄 상상도 못해서…”
“아…”
“그 다리를 보면 베이스캠프에서 치료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좀 위험할 수도 있어.”
롬은 고심했다.
과연 ‘데이비드슨’들이 우리가 돌아갈 길에 있을까?
‘아오… 잘 모르겠네.’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 보았다.
지나온 길은 찬영을 비롯한 다른 단원들과 오면서 깨끗이 청소했다.
하지만 미로를 배회하는 놈들과 마주쳐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고는 단정 짓지 못한다.
지금 이 통로처럼 빛이 들어차 있으면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돌아갈 길은 절대 밝지 않을 것이다.
밤눈이 밝은 찬영도 부상 입었다.
만일 기습이 오면 심각할 시 전멸까지도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롬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찬영이 그에게 해답을 내려주었다.
“본대로 합류하죠.”
“본대? 음… 지금 단장님 꽤 많이 앞으로 가셨을 텐데…”
“본대는 함정을 수색하며 전진하느라 천천히 나아가고 있을 겁니다. 뒤쫓는 것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지요.”
“아니지. 우리도 함정 수색을 해야 하잖아.”
“제가 하면 훨씬 빠릅니다. 다리를 다쳐 앞으로 나서서 뼛조각을 쳐내진 못하겠지만, 함정을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니까요.”
“오. 그렇다면 합류가 좋겠네. 단장님이 방금 지나간 길에 데이비드슨이 있을 확률은 낮으니까.”
게다가 이곳은 이미 베이스캠프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차라리 합류하는 것이 훨씬 빠르리라.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다 같이 이동을 하려 했으나…
갑자기 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씹. 어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랜턴은 방금 깨뜨렸는데…”
“네?”
“랜턴이 없다고… 젠장…”
롬은 뒤에서 기습적으로 말을 걸어 온 찬영에 놀라 들고 있던 랜턴을 떨어뜨렸다.
이미 바닥을 불태우던 불은 꺼진 지 오래다.
더이상 어둠을 지워 줄 광원이 없는 것이다.
적어도 롬에게 있어서는.
그런 롬을 찬영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상식상으로 롬의 발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랜턴이 깨졌음에도 이 통로는 여전히 밝혀져 있다.
설마 롬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어… 저쪽 통로 바닥에 놓인 것 전부가 랜턴 아닙니까? 혹시 저것을 가져가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아. 오! 그러네!! 저걸 들고 가면 되겠다! 이야, 역시 똑똑하네?”
“…으음… 네… 감사합니다.”
찬영이 어색한 얼굴로 감사를 했다.
설마 이런 누구나 떠올릴 법한 당연한 이야기로 감사 인사를 받을 줄 몰랐다는 얼굴이다.
“하하하! 깜빡 한 거야. 설마 정말로 내가 잊고 있었겠어? 난 용병치고 꽤나 똑똑하다고! 그냥 너네들이 무사한 걸 보고 너무 놀라서 잠깐 생각이 닿지 못한…”
롬이 웃으며 핑계를 대었지만,
찬영은 물론 멜도 그리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 카앙. 캉.
찬영이 불편한 다리를 멜에게 부축받으면서도 기어코 선두에 섰다.
롬에게 파티의 결정권을 맡기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
갈림길마다 한쪽 벽에 시꺼먼 재로 표식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헤매지 않고 본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함정 역시 조기에 내가 발견 했기에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멜의 어깨에 기대어 걸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다친 발에 가해지는 부담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사실 키 차이 때문에 롬에게 기대는 것이 더 편했지만…
내가 남자와 몸을 맞대기 싫었으며,
멜도 나를 자신의 손으로 부축해 주고 싶어했기에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입을 열지 않았다.
- 저벅. 저벅.
그렇게 하염없이 통로를 가기를 몇 분일까.
저 먼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오기 시작했다.
“도착한 것 같네요.”
“…정말이요?”
멜의 몸이 바싹 굳는다.
크리스를 마주해야 하니 긴장을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뒤에 선 롬 몰래 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 흠칫!
손을 잡힌 멜이 작게 놀란다.
신경 쓰지 않고 작게 손을 주무르며 마사지해 주자, 굳어진 멜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표정 역시 억지로라도 웃음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풀렸다.
다행히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나 보다.
- 저벅. 저벅.
“아… 저도 보여요…”
멜이 저 멀리서 일렁이는 불빛을 보고 작게 읊조렸다.
저들은 횃불과 랜턴을 들고 있다.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유적은 사방이 너무나 어두웠기에 더더욱.
- 저벅. 저벅.
“크리스!!”
저쪽에서도 가까워지는 우리를 감지하고 발을 멈춘 것 같다.
나는 내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크리스의 이름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멀리서 ‘찬영? 찬영이야?’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크리스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누가 듣더라도 격렬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생사가 불분명했던 연인들의 재회다.
실제로 크리스는 이미 내가 나름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함정에 빠진 이후.
나를 처음 마주치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다.
- 탁탁탁!!
“조심해! 함정이 있을 수도…”
- 와락!
내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못했다.
크리스가 내게 안겨 왔기 때문이다.
상당히 속도감 있게 다가왔지만, 나는 그녀가 다치지 않게 크리스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멜은 이미 은근슬쩍 내게서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내 곁에 서 있던 사람이 바뀔 수 있었다.
멜에서 크리스로.
“찬영! 다,다리가…! 괘,괜찮아?”
“조금 다쳤지만 목숨을 건진 게 어디야?”
“그,그건 그런데… 그래도…”
“오히려 이 정도 상처에서 끝난 게 다행인 함정이었는 걸?”
“…많이 위험했어?”
“응. 나 혼자였다면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멜이 곁에 있어서 살았지.”
“멜씨가?”
여태까지 눈을 살며시 감고 크리스의 타박만을 기다리던 멜.
그런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 입에서 그녀가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기 때문이리라.
“…네? 차,찬영님?…”
멜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멜에게 대꾸하지 않고 크리스를 향해 말을 이어 했다.
“맞아. 멜이 내 목숨을 구해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