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새로 얻은 건물 정보 확인은 꽤 쓸만했다.
토대가 되는 아이템 정보 확인의 레벨에 영향을 받는지, 새로 얻은 정보가 많았다.
‘약간 검열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맥으로 봤을 때 ■■■ ■■ 안에 들어가야 할 단어는 [불로의 비약]이겠지.’
원작에서 멜이 들어간 비밀 실험실.
불로의 비약이 만들어지고 있던 실험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더라도 추가로 한 개의 실험실이 더 있다.
시스템에 적힌 대로라면 실험실은 총 세 개라고 했으니까.
‘아마 그 실험실도 높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거야.’
즉, 내가 앞으로 찾아야 할 문양은 두 개가 되었다.
“나갈 방법도 찾았으니… 슬슬 나갈까? 다들 걱정할 테고.”
“…네.”
멜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이 공간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좋겠지만,
곧 내가 입은 부상을 모든 용병단이 알게 되니 당연하다.
그중에서 멜의 죄책감을 가장 크게 건드린 것은 크리스겠지.
물론 크리스는 내 다리를 본다고 해도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구에서 말을 맞춰 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멜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큰 반감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멜이 알 리가 없다.
그러한 이유로 멜의 속은 크리스를 향한 미안함으로 시꺼멓게 타오르고 있었다.
“멜. 잠깐 이쪽으로 와봐.”
“네?”
멜에게 곁에 와달라고 했다.
내가 그녀를 향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멜은 부목을 댄 내가 일어서거나,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울먹거리는 눈으로 제발 앉아서 쉬어 있어 달라고 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고집을 부리며 일어설 수 있을까?
- 저벅저벅.
“…어디 불편한 곳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옆에 잠깐 앉아 봐.”
“어… 네…”
멜은 얌전히 말을 들으며 곁에 앉았다.
그녀는 일어 선 키 뿐만이 아니라, 앉은 키 역시 작았다.
정수리 높이가 내 어깨에 닿을 정도로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 멜의 정말 작은 체구를 가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와 별개로, 여전히 멜의 얼굴은 어두웠다.
- 슥.
“앗…”
나는 고개를 숙인 멜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멜은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녀를 연인으로 바라보고 있다.
명백히 이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풀 죽어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귀엽기는 하나,
상황이 심각한 만큼 마음 편히 보지는 못하겠다.
- 슥. 스윽.
“찬…영님?…”
그러고 보면 멜은 나의 다리를 다치게 만든 속죄로 무언가를 약속받았다.
도망치지 말고 내 곁에 계속 있는 동시에,
나의 요구에 반박하지 말고 얌전히 수용하기로.
기한도, 상한선도 없는 완전한 불공정 계약이다.
그렇다고 내가 멜에게 못된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 이 손은…? 조,좋기는 한데에…”
“멜.”
“…네?”
“너는 내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수락하기로 약속했어. 그렇지?”
- …끄덕.
“…맞아요.”
멜이 결심이 서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을 요구받더라고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는 얼굴이다.
나를 믿는 건지, 순진한 건지…
내가 ‘이상한’ 요구를 할 거라는 상상도 못 하는 표정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면…”
망설임을 연기하면서,
말끝을 흐려 보았다.
“…아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긴 좀 이르려나?”
“아뇨!! 말씀하세요! 어떤 것이라도 꼭!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드릴게요!”
멜은 자신에게 부탁을 해주길 강하게 요구했다.
내가 한발자국 물러나자, 멜 쪽에서 도리어 크게 다가온 것이다.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그녀의 반응에 만족스러워졌다.
나는 멜을 향해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괜찮아요! 망설이지 마시고!”
“그냥… 오랜만에 둘이 있을 기회인 것 같아서.”
“…네?”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한 화제였나보다.
멜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봐봐. 평소 우리는 단원들이나 크리스의 시선 때문에 잘 붙어있지 못했지?”
“그,그렇죠…?”
“그런데 지금은 딱 둘이 있잖아? 방해가 들어 올 수도 없고.”
“…아.”
“우리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해서. 좀 더… 서로가 가까워질?”
그것도 잠시.
대화가 계속되자, 점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말의 의미를 깨달은 모양이다.
“앗… 그…”
멜이 내 표정을 슬쩍 바라본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상상은 착각일 확률이 높겠지만…
나는 그런 그녀와 동공을 마주했다.
살짝 웃음을 지으면서.
“읏…!”
멜이 작게 숨을 삼켰다.
그녀는 내가 이런 식으로 눈을 마주쳐 주는 것을 좋아했다.
전에 말하기를, 아무런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은색이 마음에 든다나?
한국에 널린 수많은 검은 동공을 보며 자라온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할 감상이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알았으니, 사용하기 꺼릴 이유는 없지.’
멜에게 있어서 서로 말없이 눈을 마주치는 것은 하나의 스킨쉽이다.
확실히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속을 채웠던 찐득한 죄책감이 조금씩 밀려난다.
그 자리를 대신해 분홍색의 수줍음이 점차 들어차기 시작했다.
‘…귀엽네.’
방금 내가 한 말에 담긴 속뜻에 대한 깨달음.
밀폐 공간에 연인과 둘이 있음에서 오는 설렘.
동시에 그녀가 좋아하는 스킨쉽까지.
그런 복잡한 원인이 얽혀 멜의 동공을 세차게 흔들었다.
결국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는 못하였지만.
나는 자못 궁금해졌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멜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숫처녀인 그녀답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허락하려나?
아니면 역시 그런 것은 이르다며 거절?
어느 쪽이든 흥미진진한 것은 매한가지다.
설령 거절당하더라도 진도는 나가게 할 생각이니까.
나는 멜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멜이 움직였다.
- …끄덕.
그녀는 고개를 깊게 끄덕인다.
눈이 한번 차분히 감았다 떠지며,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눈에 새롭게 담긴 것은 결심이었다.
“…알겠어요…!”
- 스윽!
깜짝 놀랐다.
멜이 곧바로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멜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손을 덜덜 떨어 가면서도,
자신의 겉옷을 잡고 망설임 없이 벗기 시작했다.
“…잠깐. 멜.”
“네,네?…”
막 옷을 잡고 내리려던 그녀의 손이 내 말에 멈춘다.
자신의 용기가 저지당한 것에 당황한 표정이다.
곤란한 것은 오히려 나다.
살짝 멜이 안타까우면서,
입안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 따악!
“하읏!…”
멜이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상당히 아프나 보다.
그야 그럴 법하다.
나는 꽤 봐주지 않고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으니까.
“읏? 왜,왜애?…”
새빨개진 얼굴.
그보다 약간 더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직 멜은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자신이 왜 딱밤을 맞았는지를.
“진심으로 나를 허락 해준 것이면 나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
“……”
“하지만, 방금은 아무리 봐도 죄책감 때문에 그런 거잖아. 혹시 내가 틀렸어?”
“…그…”
멜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죄책감 때문에 허락해준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줘도 못 먹는다고?
이건 준 게 아니다.
정확히는 주긴 줬는데, 제대로 된 것을 준 것이 아니다.
만일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수락을 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대었을 것이다.
또한 아직 이르다며 거절했으면 그 이야기 역시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은근슬쩍 진도를 빼었겠지만.
하지만 이 상황은 틀렸다.
죄악감에 못 이겨,
지은 죄를 덜기 위해서 내게 안기려 들다니?
‘화는 나지 않지만… 좀 씁쓸하네.’
‘연인 사이의 첫날밤은 무조건 애정이 가득해야 해.’처럼 분홍빛으로 점칠 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나는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티끌 한 점 없는 백색도, 새까만 검은색도 싫다.
둘을 반반 섞은 회색이면 만족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의 멜의 행동은 충분히 혼날 만 한 행동이다.
“모르겠어?”
“네?… 그…그게…”
나와 멜이 타인이거나, 이후 크게 얽히지 않을 사이라면 군말 없이 굴러온 떡을 먹었을 것이다.
원나잇을 배척하기에는 내 과거가 좀…
많이 화려했으니까.
하지만 우리 둘은 가벼운 사이가 아니다.
“우리는 연인이야. 그렇지?”
“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멜 너를 연인으로 여기고 있어. 그러니 그날의 고백을 받아 준 것이고. 그럼 방금 네 행동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멜은 이번이 첫 연애다.
실수라고 보기도 애매했지만, 이 정도의 삐끗함은 충분히 저지를 수 있었다.
내가 알려주면 된다.
나는 그녀의 연인이니까.
“음… 그렇지. 하나 예시를 들어볼게. 너에게 정말 친한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친구…요?”
“응. 서로 성격이 이보다 더 없을 정도로 맞고, 그 친구도 너를 정말 좋아하는 것이 느껴지며, 너도 엄청 아끼는 그런 친구가. 아! 당연히 동성 친구로 상상해. 이성 친구면 좀 질투 날 것 같아서.”
“풋… 네. 가족 같은 친구네요…”
다행히 내 농담에 시종일관 굳어 있던 멜의 표정이 풀렸다.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렇지.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네게 큰 잘못을 저질렀어. 고의는 아니었지만, 멜 너는 피해를 보고 말았지.”
“…”
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숙인 시선의 끝에는 내 다리가 있었다.
“넌 충분히 용서할 수 있었어. 꽤 큰 피해를 입어서 화도 조금 났지만, 아끼는 친구를 잃기가 몇 배는 더 싫었거든.”
“화가… 났군요… 역시…”
“당연히 이미 대화를 나누며 서로 화해는 했지. 어디까지나 화는 ‘조금’ 난 것이니까.”
“화해…”
세세히 따지고 보자면 딱 들어맞는 비유는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하길 선택했다.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단기간에 겪은 멜이 쉽게 이해하도록.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네게 사죄 삼아서 금화를 주겠다는 거야.”
“금화요? 돈?…”
“맞아. 그것도 엄청나게 고생을 하면서 모은, 자신에게도 단 한 개밖에 없는, 네게 주고 나면 더는 얻을 수 없게 되는 소중한 금화를.”
“…아앗…!”
“너는 그 금화를 받고 기쁠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멜이 깨달았다.
내가 하고픈 말을.
“그… 죄송…해요…!”
“…그 금화를 써서 함께 음식을 먹자고 권유받으면 너는 기쁘게 수락 할 거야. 아니면 금화를 자본으로 함께 여행이나 떠나자고 해도 넌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금화를 통째로 네게 주면… 좀 그렇지?”
“네… 좀 그렇네요… 이해했어요…”
이해했으면 됐다.
오글거리는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자.
멜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죄책감이 아니다.
방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 툭.
멜의 머리가 내 가슴에 기대어졌다.
피가 조금 말라붙은 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찬영씨는… 엄청… 어른스럽네요.”
“칭찬이야? 늙었다고 돌려 말하는 건 아니지?”
“저,절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어린애가 된 기분이라…”
“널 어린애로 보다니? 그러면 이런 짓 안 하지.”
“…네?”
- 스윽.
나는 슬쩍 왼손을 들어 멜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말했잖아. 지금은 우리가 서로 가까워질 절호의 기회라고.”
“그,그,그건 제 착각이라고…!”
“큭큭. 그건 착각 맞지. 하지만… 저번에 약속했잖아? 다음에 꼭 다시 키스하자고.”
“아…! 그랬,죠…”
어디까지나 키스까지만.
내가 원래 세워둔 목표였다.
동침까지 가기에는 멜이 준비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되어야 멜과 둘이 남을 수 있으려나?
“눈 감아.”
“하으…”
멜이 눈꺼풀이 꼭 하고 감긴다.
너무 힘을 줘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여전히 순수하고 귀여웠다.
수많은 차원에 존재하는 육체 중 하나의 부상쯤은 눈감아 줄 만큼.
- …스윽.
고개를 숙였고,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이전 같은 입술만 비비는 어린애의 키스는 아니었다.
서로의 뜨거움을 확인할 수 있는 연인의 키스였다.
- 츕…
천천히.
너무 놀라 도망치지 않게끔.
그녀의 입안을 부드럽게 노크했다.
멜은 당황했는지 내 품 안에서 몸을 작게 굳혔지만,
곧 작게 입술 사이의 틈을 벌려주며 허락을 했다.
죄책감 때문에 거부하지 못한 것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몸을 맞대고 있어 멜의 심장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마치 벨데루 씨앗을 먹은 토끼의 심박수가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