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포션의 명성은 너무나 유명하기에 멜도 알고 있다.
그 가격도, 그 위력도.
물론 그 한계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다리가 완전히 부러진 찬영의 상처.
부상당한 즉시 포션을 바르면 완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찬영은 늦지 않게 포션을 사용한 것 같았다.
이대로 푹 쉬면 분명히 완치하리라.
그러나 저렇게 억지로 일어나 싸우게 된다면…
- 콰아앙 ! 우직! 우드득…!!
다시는 완전히 고치지 못할 것이다.
붉은빛이 돌기에 이 포션은 하급 포션이고,
중급 포션부터는 귀족이나 얻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그걸 찬영이 모르고 일어섰을 리 없다.
방금 먹은 포션의 주인은 찬영이니까.
조용히 쉬고 있으면 후유증 없이 완치되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너무 약해서… 날…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어떻게든 그녀 혼자서 이겨낼 생각이었지만, 세상은 바란다고 이루어질 만큼 쉽지 않았다.
꽤 가난한 성장기를 보내며 세상은 비정하단 것을 이미 알고는 있었다.
그녀가 기댄 것은 하나였다.
행운.
최근 들어 멜은 계속 운이 너무나 좋았다.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행복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녀가 기적을 한 번 더 바란 것은 과한 욕심일까?
- 콰앙 ! 쿵… 콰아앙——!!!
골렘은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저 거대한 칼날로 찬영을 맞추기에는 둘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다.
허나 상대도 멍청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가끔 강철 육체에서 무작위로 철 덩어리가 찬영을 짓이기려 들었다.
그녀가 팔을 다쳤던 공격이다.
그 공격이 직격하는 일은 없었다.
멜의 눈에는 찬영이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그 공격을 족족 흘려내었다.
마치 공격이 들어올 것을 알고 있는 것마냥 보인다.
“찬영님… 팔이…”
수도승의 비술.
주먹을 단단하게 해주지만, 팔뚝은 아닌 것 같았다.
공격을 흘릴 때마다 찬영의 팔뚝이 피를 흘리는 것을 넘어서 걸레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피부 가죽이 밀려서 찢기고, 뭉개져 붉은 근육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먹은 골렘을 노리고 움직였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 콰아앙——!!
몰아치듯 찬영의 주먹이 쇄도했다.
한번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놈의 몸체가 크게 아작난다.
마치 금속이 아닌 무른 과일을 때리는 것 같았다.
허나 골렘은 자신의 육체를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재생시켰다.
부서지고, 회복하고. 다시 부서지고 회복하길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 속도는 찬영이 골렘을 부수는 속도가 약간 앞서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완전히 부수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리리라.
‘분명 찬영님의 마나가 먼저 떨어질 거야…’
멜은 찬영의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그녀는 찬영이 지구에서 마나를 회복하고 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나오는 결론이다.
그녀가 도와야 했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찬영의 바지 밑단으로 피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임시로 봉합한 찬영의 다리 상처가 터졌다.
회복은커녕 악화 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싸움에서 이겨도 찬영은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부상당한 다리를 혹사시킨 후유증이 어떻게 다가올지 무서웠다.
만일… 그의 오른 다리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게 된다면,
멜은 죄악감에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찬영님을 도와야 해. 최대한 다리에 가는 부담을…’
멜은 찬영보다 훨씬 약하다.
골렘의 몸체에 칼이 닿은 적은 있으나, 순식간에 회복이 되는 검상만 내었을 뿐이다.
그처럼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도움이 될 방법은 많았다.
찬영은 골렘의 기습적인 견제 때문에 주먹을 연속적으로 날리지 못하고 있다.
항상 한 번의 공격 뒤에는 회피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회피를 하는 와중에도 골렘의 몸체는 착실하게 회복되고 있다.
골렘이 신체를 변형시켜 하는 공격은 동시에 한 번밖에 못하는 듯했다.
그러니 찬영에게 향하려던 공격을 멜이 분담해 받아낸다면 분명 도움이 되리라.
‘…할 수 있어. 이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할 수 있어!’
골렘의 변칙적인 공격은 너무나 빠르다.
하지만, 공격이 아닌 방어만을 대비하고 있다면 몇 번이고 막아낼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멜의 집중력은 특성으로 드러날 만큼이나 뛰어났으니까.
물론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싸울 수 있어야 했다.
“후우… 후우…”
약간 긴장되었다.
아마 무척이나 아플 것이다.
그러나 찬영은 부러진 발로 억지로 일어나 싸우고 있고,
피부가 실시간으로 찢기는 것조차 신음 하나 없이 견뎌내고 있다.
엄살 피울 생각은 없었다.
- 우둑!
“끕…!”
뒤로 꺾인 오른손의 중지와 검지.
그것을 왼손으로 잡아 제 자리로 돌려 내였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미 포션을 한 병은 마시고, 한 병은 금이 간 팔에 발랐다.
이제 슬슬 붓기 정도는 빠져서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는 있었다.
좀 많이 아프겠지만.
지금부터 멜이 할 것은 회피가 아닌 방어다.
골렘의 공격을 견디기 위해선 양손으로 칼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 스걱!
겉옷에 칼집을 낸 뒤, 길게 찢어 붕대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오른손과 칼자루를 빙빙 돌려 감았다.
매듭을 맺고, 오른손 위에 왼손을 올렸다.
이것으로 어지간해서는 칼을 놓치지는 않으리라.
잠깐 휴식을 맛보며 풀린 다리를 칼자루로 찍어가며 억지로 각성시켰다.
다행히도 그녀의 다리는 말을 들어주었다.
- 탁탁탁!
모든 준비가 끝마친 지금.
멜은 망설이지 않고 찬영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언제 찬영의 마나가 떨어질지 몰랐다.
일분일초라도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찬영님! 저도 도움을…! 엇?”
멜은 찬영에게 자신의 참전을 큰 목소리로 알렸다.
그녀와 찬영의 호흡이 틀어져 오히려 방해되는 일은 절대로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더이상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찬영은 멜이 온 것을 뒤돌아 바라보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하나의 틈이었다.
멜 그녀가 저 틈에 끼어든다면 분명히 빈틈없이 딱딱 떨어지리라.
- 채앵!
“흡!!”
그 생각은 맞았다.
방금 만들어진 틈에 멜이 들어가자, 딱 부담 가지 않을 위치에서 찬영을 보조할 수 있었다.
찬영과 멜.
양측 모두의 움직임이 하나도 겹치지 않으면서, 골렘을 상대하기 너무나 알맞은 위치다.
그의 강함을 목격했을 때 만큼이나 소름이 온몸을 더듬었다.
‘이,이렇게 재빠르게 판단이 가능한 거야? 부상을 입고 싸우는 와중에?’
서로 언어로 소통하지 않았음에도 찬영은 멜이 가장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포지션을 유도해 내었다.
그것이 멜을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지휘였기에.
이는 찬영에게 생각할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으며,
테라포밍 세계에서 여러 번 전투를 이끌어 본 경험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멜의 능력을 전부 꿰고 있었다.
올바른 지시를 못 내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온다!’
- 콰드득! 끼리리릭…!!
멜은 자신의 명치를 노리고 쏘아지는 강철을 검면으로 막으며 흘리고자 했다.
잡철로 만들어진 싸구려 칼이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휘어진다.
당장 금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멜이 공격을 더 버틸 수 있더라도,
그녀의 칼이 많이 버텨주지 못할 것이다.
- 콰아앙—!!
바로 앞에서 들리는 폭음에 멜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선지 땀과 피에 단 하나도 젖지 않은, 방금 씻은 것 마냥 뽀송뽀송 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이 보인다.
찬영의 주먹이 만들어 낸 소리였다.
풍압이 멜의 옷자락을 크게 뒤흔들었다.
가까이서 들으니 주먹에 담긴 파괴력이 한층 더 실감이 났다.
저 위력을 내뿜는 찬영도, 그 공격을 수십번이나 버티는 골렘도 까마득한 강자로 느껴졌다.
‘세,세상에…’
인간의 형태를 한 강철 골렘의 어깨가 완전히 뭉개어진다.
만일 상대가 뼈와 관절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오른손은커녕 상반신 전체를 움직이지 못하리라.
하지만 골렘의 팔은 운신에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손에 쥔 칼이 찬영을 향해 내려찍은 것을 보니.
- 그그극… 쿠우웅!!
골렘의 칼이 벽을 세차게 긁으며 찬영을 향해 내려 찍혔고,
어렵지 않게 피한 그가 오히려 골렘의 팔꿈치를 안쪽으로 완전히 꺾어 버렸다.
- 콰아앙—!!
멜은 눈치를 챘다.
찬영이 눈에 보이는 대로 무작정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사람이라면 급소라고 여겨지는 곳만을 신중히 선택하며 공격하고 있다.
마치 약점을 찾는 것처럼.
“…젠장. 머리, 심장, 목, 복부, 쇄골… 심지어 칼도 한번 부숴 봤는데 전부 없네. 골렘의 핵 같은 건 없는 건가?”
골렘의 핵?
연금술에 대해 완전히 지식이 전무한 멜은 찬영이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저 시도 가능한 공략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만을 눈치로 알아들을 뿐이었다.
사실 찬영도 연금술에 대해 그리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판타지 소설에서 읽어 온 토막 정보를 조합해 누구나 가능한 추론을 해볼 뿐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차원이 맞지만, 이 세계의 베이스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니까.
“숨겨진 라이프 베슬 같은 것도 안 느껴지고… …정말 완전히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야 멈추려나?”
- 콰앙——!!
굳이 따지자면 바닥에서 푸른 빛을 내는 마법진이 수상했다.
허나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마법진과 골렘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그렇다고 딱히 약점에 대해 감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육감은 이 골렘을 물리적으로 부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찬영이 멜의 합류를 별말 않고 받아들인 이유다.
그로서도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때려 박을 수는 없었다.
멜은 알지 못하지만, 현재 찬영은 지구에서 며칠이나 보낸 뒤다.
‘읏! 또 온다!’
- 콰앙! 끼기긱—!
멜은 이번 공격도 성공적으로 흘려내었다.
허나 칼의 내구성은 점점 소모되어 갔다.
이젠 확실하게 실금이 간 것을 볼 수 있었다.
- 주르륵.
멜은 볼을 훔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었다.
상대적으로 얇은 검날 부분이 약간 부서지며 날카로운 파편 한 조각이 튀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녀의 볼 쪽으로.
멜의 핏값은 보상받았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골렘의 몸체에 찬영의 주먹이 박힌다.
한번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번이나.
- 콰앙 ! 쾅—!! 콰아앙——!!
단번에 골렘의 인간의 형체를 잃는다.
마차의 짓밟힌 과일처럼 어그러져갔다.
골렘은 멜에게 쏘아진 몸체를 아직 회수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절호의 공격 기회.
찬영은 이번 기회에 완전히 뭉개버리겠다는 듯, 악착같이 주먹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골렘이 보여온 패턴은 이런 신체 변형 공격은 중복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것을 알기에 멜의 무력으로도 찬영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놈은 자신을 공격하는 찬영을 향해 금속을 쏘아내었다.
멜이 흘려낸 공격을 아직 회수하지 못했음에도.
‘저 공격, 동시에 두 번이나 쓸 수 있는 거였어?!…’
지금까지 보여왔던 패턴을 뒤집는 공격에 멜은 경악했다.
놀랍게도 찬영은 공격을 회피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기에 못 한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예상했으며, 피할 수도 있었다.
허나 오히려 주먹을 뻗으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길 선택했다.
- 쿠우우웅—— 우웅— 웅——
주먹과 강철이 맞닿는다.
볼에 난 솜털이 진동에 떨며 멜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강대한 위력을 담은 두 공격이 부딪히며 공기를 타고 이 공간 전체를 울렸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무게에 어마어마한 속도.
물리 법칙상 미친듯한 위력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다.
물론 물리 법칙 따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멜이지만,
직접 칼로 흘려내 보았기에 그 위력의 편린을 알고 있다.
그러니 골렘의 저 공격을 피할 생각만 했지 정면으로 맞붙을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아무리 그의 주먹이 강하다고 한들…
저 터무니 없는 공격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자살 행위 같다고 여겼다.
그런 만큼 멜이 찬영을 걱정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정말 놀랍게도,
두 강격의 싸움에서 찬영이 승리했다.
- 콰드드득…! 뿌득…!!
쏘아진 금속은 저지당하다 못해 역으로 밀려났다.
그 장면을 본 멜이 그제서야 깨달았다.
몸체를 변형 시켜 쏘아내는 공격은 동시에 한번 밖에 못 하지는 않으나…
회수하기 전에 중복으로 뽑아내면 그 위력이 한참이나 낮아진다.
이 모든 사실을 찬영은 이미 아는 것처럼 보였다.
골렘이 신체 변형 공격을 두 번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과,
두 번 째 공격은 파괴력이 현저하게 낮아져 자신의 주먹이면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차,찬영님. 어떻게 아셨어요? 놈이 이중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 정도까지 몰렸는데도 안 쓰는 걸 보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거 아니겠어? 혹은 패널티가 있거나. 후우…”
“골렘을 상대로 심리전을 하시나요?”
“…놈을 만든 제작자는 무생물체가 아니잖아. 육감을 믿고 한 것도 없지 않지만…”
찬영의 표정은 전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가볍지 않고 무거웠다.
또한 실시간으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팔과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그리 만든 것이다.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실제로 찬영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는 방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저게… 생각하면서 싸운다는 것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