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멍하니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포션 남기면 혼낸다는 말을 남긴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선이 골렘에 고정된다.
놈에게도 눈이 조각되어 있어서일까?
어째선지 눈을 마주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허나 착각이다.
눈앞의 적은 생물체가 아닌 무생물이다.
몸은 강철로 이루어져 있기에, 시신경이 있을 리가 없다.
‘놈은 나를 시각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아. 보이는 것과 달리, 사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방심하지 말자.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이다.
“흐읍!!”
- 까앙! 깡!
부목을 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부상이 악화 되겠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러진 다리를 물건 취급하며 움직였다.
- 쿠웅. 그극…
육중한 놈의 칼이 움직인다.
허리를 노리고 들어 오는 중단 베기.
거대한 크기를 가진 놈의 입장에서 보면 하단 베기다.
목적은 간단했다.
달려오는 나를 쳐낼 생각이다.
괘념치 않고 놈을 향해 최단 경로로 달려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권술가는 최대한 붙어 싸워야 한다.
놈이 검을 들었든 그렇지 않든.
- 후우우웅!!
바람을 찢어내며 놈의 칼이 내 몸통을 향한다.
체감 시간이 소리 없이 늘어진다.
하체에 힘을 단단히 주며 검격의 경로를 눈으로 새겼다.
동작이 큰 공격.
이 한 번만 막으면 골렘에게 반격 할 수 있다.
저 무식한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면 척추가 버텨내지 못한다.
어떻게든 손등으로 흘려내야 했다.
직접적으로 칼날과 맞닿는 손은…
금강수(金剛手)가 버텨줄 것이라 믿자.
- 콰드득…!
“크흡!”
나의 손을 짓이기려 드는 압도적인 물리력.
허나 손은 부서지지 않았다.
흘려내기를 유도했기에 칼날이 손등을 긁어가며 ‘카각! 가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 콰아앙!!
놈의 칼날이 바닥에 때려 박혔다.
저 단단하던 ‘연금석’도 이 정도의 물리력에는 버텨내지 못했나 보다.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으니.
흘려내기를 성공한 대가는 치렀다.
금강수(金剛手)가 강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손목까지만.
허나 칼날을 흘려내며 놈의 검면이 내 팔뚝에 약간 닿았다.
‘젠장. 약간 짓뭉개졌네.’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물리력 자체에 의해 내장이 작게 진동하며 호흡이 흐트러졌다.
입안에 미약한 철분의 맛과 피비린내가 스멀거리며 올라왔지만,
이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에 허둥대기에는 내 집중력이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 까앙!
한번 다리를 크게 박찬 뒤,
놈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지금!’
놈이 내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기 전.
한 치의 틈도 없어야 한다.
그 짧은 순간에 내뿜을 수 있는 최대의 위력으로 일정권을 내질렀다.
- 콰아앙—!!
촉각이 없기에 타격감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선명한 시야는 뒤로 날아가는 골렘의 가슴에 내 주먹 자국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케 해주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놈의 몸체가 우그러진 것이다.
‘통한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내 공격은 통했다.
기쁨도 잠시.
나는 책장에 처박히기 직전인 놈의 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목적대로 놈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에는 성공했다.
거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내 사정거리는 놈에 비해 너무나 짧으니까.
내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악착같이 따라붙어야 한다.
죽더라도 놈의 코앞에서.
하드모드 퀘스트를 받는 순간 그 정도의 각오는 했다.
- 콰드득! 쿠우웅—!!
책장을 낙엽 부수듯 뭉개버린 놈이 벽에 부딪혔다.
나의 기습적인 공격에 검을 놓쳤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놈의 오른손에는 그 거대한 칼이 아직까지 쥐어져 있었다.
‘예상하긴 했어.’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손과 칼의 자루는 하나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외견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착각하지 말자.
놈의 정체는 육체를 자유자재로 변경 가능한 액체 금속.
놈의 몸 어디에서든 칼날이 솟아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오든 재빠르게 반응해야 한다.
“후우…!”
바닥에 나뭇조각과 더불어 찢어진 책의 페이지가 휘날린다.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할 일에 각오를 새겨야 했기에.
내게는 믿음직스러운 육감은 있다.
그러나 크리스와 했던 육감 훈련을 떠올려 보면…
오감이 닫힌 채 육감으로만 느끼는 것 보다, 오감이 전부 열려 있을 때의 위기 감지 능력이 몇십 배는 뛰어났다.
청각, 시각, 촉각.
하나를 제한할수록 내가 느낄 수 있는 육감은 줄어만 갔다.
그리고…
‘지금은 통각이 닫혀 있지. 과연 이 상태로 내가 처음 당했던 그 기습을 피할 수 있을까?’
내 다리가 부러져버린 놈의 첫 공격.
도저히 보고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실험체’와 다르게 공격에 필요한 예비 동작도 없었고, 사정거리도, 공격 한계 횟수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건 해야 하는 일이다.
고통이 두렵다고 내 능력을 제한하기에는, 적이 너무나 강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몸을 살짝 긴장시켰다.
혀를 깨물지 않도록 이를 단단히 문 다음…
나의 통각을 전부 되살렸다.
“흡!”
살짝 뒤틀렸던 내장.
뭉개졌던 팔뚝.
그리고 지금 딛고 있는 오른쪽 발.
통각 세포가 강렬하게 방어기제를 보내어 온다.
뼛속 그 깊숙한 시신경 줄기가 타들어 갔다.
그렇게 내 뇌가 모든 신호를 전달받았을 때.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들이쉬던 숨이 멈추었다.
하지만…
곧바로 초점은 돌아왔다.
“허억… 헉…!”
이미 각오했던 고통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고통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지금까지 뇌가 끊이지 않고 마약성 도파민을 뿜어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치유』가 이성을 잃지 않게 계속해서 다잡아 주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감내하며 싸울 수 있다.
물론 쓰러진 놈에게 다가가기 위해 오른쪽 발을 디뎠을 때 약간 생각이 달라지긴 했지만.
- 깡!
“씹… 젠장.”
저절로 욕지기를 불러일으키는 고통에 통각을 조금만 낮출까 하는 고민이 든다.
허나 나약함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외로 나는 꽉 막힌 인간이다.
스스로에게만 한해서.
- 깡! 까앙!
그래도 의식적으로 고통을 무시하며 발을 디디니 금방 발걸음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악과 깡으로 멀쩡한 척을 하는 것이다.
마치 왕따를 당했던 ‘백하민’ 시절.
이를 악물고 헬스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것처럼.
- 웅!
고통에 저절로 풀렸던 금강수(金剛手)를 활성화 시키자 이전과 다르게 내 손의 감각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빈 유리병이 바닥을 뒹굴었다.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 대충 팔뚝에 뿌렸기 때문이다.
때마침 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 쿠웅! 쿵! 처억.
휘날리던 흙먼지와 나뭇조각이 내려앉고 칠흑색의 강철 육체가 드러난다.
책 속에 파묻힌 칼날을 꺼내 들더니, 자세를 잡는다.
아까 보았던 검술의 첫 식이다.
마치 빈틈없는 교육용 자세 교본을 보는 것만 같다.
‘연금술사가 검술 교본을 모티브로 골렘의 움직임 패턴을 만든 것 같지만…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게 작용했어.’
연금술사는 마법과 연금학 분야에선 역사적인 재능을 보였다.
허나 근접 전투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나 보다.
이 골렘은 대인(對人)을 상대로는 너무나 무력하다.
“큭큭… 네 스텟이 아깝다.”
멜이 큰 중상 없이 오래 버텨준 것.
방금 나의 노림수가 어렵지 않게 먹혀든 것.
검술에는 능통하나, 전투에는 그렇지 못한 모습이다.
무술을 익힌 인간끼리의 싸움은 끊이지 않고 심리전이 오간다.
허나 놈의 검초는 다르다.
빠르고, 강력했으며, 효율적이었으나…
비웃음 나올 정도로 정직했다.
딱 이지가 없는 몬스터를 상대로나 효과적인 골렘이다.
그 어떤 하얀 고래를 데려와도 놈에게서 심리전의 우위를 가져갈 수 있으리라.
능력치의 차이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진 고기가 되겠지만.
“차라리 슬라임처럼 인간의 관절에 구애받지 않은 변칙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 더 까다로웠겠다.”
물론 언제든지 몸에서 칼을 뽑아내며 기습 할 수 있겠지만,
기본 자체가 육체 관절의 한계라는 족쇄에 묶여 신체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저 교본 자체는 연금술사가 살았던 시대에 무척이나 위력적인 검술이었을 것이다.
검로는 정교했고, 무게 중심은 완벽했으며, 자세는 흔들림 없었다.
어디까지나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의 기준으로.
모든 검술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뼈와 살, 근육, 칼 각기 다른 질량을 가진 인간.
모든 구성이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골렘.
과연 저 검술이 골렘의 무게 중심을 기준으로 맞추어져 있을까?
그럴 리 없지.
놈은 그저 무식한 근력으로 억지로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 궤적이 너무나 군더더기 없어 전투 경험이 많이 없는 사람은 깨닫지 못했을 뿐.
“가진 스텟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해.”
- 까앙! 깡!
놈이 움직일 낌새를 보이자, 나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벽에 몰린 위치에서 빠져나오는 걸 두 눈 뜨고 봐줄 수 없다.
“흐읍!”
- 후우웅!
허릿심이 담긴 중단 베기.
거대한 칼날이 내 머리통을 노리고 휘둘러진다.
고맙게도.
간단히 몸을 낮추는 것으로 피할 수 있었다.
먼지가 뒤섞인 미지근한 바람을 전신으로 느낀다.
시선은 오로지 놈의 명치에.
한걸음 크게 다가선다.
- 수욱!
“이럴 줄 알았어!”
- 콰드득!! 콰앙…!!
품으로 다가오는 날 묵직한 철덩이가 마중해 주었다.
가슴팍에서 갑작스럽게 솟아난 것이다.
허리 숙인 나를 노리고 하강하는 금속 기둥을 주먹으로 내려쳐 아래에 처박았다.
나는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그 기습적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피부가 우수수 일어나며 미리 경종을 보내었기 때문이다.
- 카아앙!!
바닥을 높게 박차오른다.
인간이라면 심장이 있을 놈의 명치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자신의 몸이 액체로 되어 있다는 상기시켜주듯 찌그러졌던 놈의 배는 어느새 수복되어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게는 공격이 통한다는 확신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놈은 마나를 담은 공격에 피해를 입었다.
그러니 이길 수 있다.
- 흐읍!
눈을 깜빡할 정도의 짧은 숨 고름.
이제는 너무나 몸에 익어버린 자세였기에,
공중 떠 있음에도 손발이 순식간에 자리를 찾아갔다.
가장 정확한 자세에서 내지르는 일정권(一正拳).
남은 모든 마나를 한 주먹에 담는다.
마나를 아낄 필요는 없다.
이것으로 끝장을 내지 못하더라도…
…내겐 마나가 무한히 있으니까.
- 콰아앙——!!!
주먹의 끝에서 강철을 부수는 불꽃이 피어났다.
*
멜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믿지 못하였다.
저 골렘의 강함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 욱신.
“윽…”
숨이 고르게 돌아오자 다친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한층 선명해졌다.
찬영이 준 포션을 바르고 마셨지만, 하급 포션으로는 금이 간 뼈가 붙으려면 적어도 세시간은 필요했다.
그러나 고통 덕분에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니란 것은 알게 되었다.
한번.
단 한 번 공격을 허용했을 뿐인데 의식이 끊길 뻔했다.
혀를 깨물며 억지로 정신을 되찾아야 했다.
멜이 살아오며 엮인 인연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골렘은 그녀가 겪어 본 누구보다 강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인물 중 가장 강한 하얀 고래에서 부단장보다 훨씬 더.
하지만…
오늘 이후로 그녀 내면에 있던 강자의 순위가 완벽히 뒤바뀌었다.
- 콰아아앙—!!
인간의 주먹이다.
멜과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그러나 저 주먹이 골렘에게 박혀들 때면 마치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 불똥을 피워냈다.
그 결과 또한 범상치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지축을 울리던 골렘이 화살처럼 날아갔으니까.
- 콰드드득!! 우당탕!!
화살처럼 날아간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갔다.
- 콰아앙—!!!
또다시 나뒹구는 골렘에게 주먹이 박혀 들어 갔다.
한주먹 한주먹이 전력을 담은 일격 같아 보인다.
멜 그녀가 보유한 마나를 전부 때려 박아도 저 주먹질 한번의 위력을 절반도 못 낼 것이다.
어떻게 저리 마나가 많을 수 있지?
사실 찬영님은 전설 속에 나오는 드래곤은 아닐까?
그녀로서는 무슨 일을 겪어야 저리 많은 마나를 보유할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뚜욱. 뚝.
볼을 타고 따뜻한 액체가 흐른다.
찬영이 드래곤 같은 것일 리 없다.
그는 따뜻한 웃음을 가진 인간이자, 그녀의 둘 없는 소중한 연인이었으니까.
그러니 멜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멜에게 있어 그의 모습은…
재가 되기 직전에 가장 환하게 불타오르는 불꽃.
회광반조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녀 자신의 탓으로.